여기는울릉도

섬에서 신문 보기 -여기는 울릉도.3

이청산 2007. 3. 21. 16:40

섬에서 신문 보기
- 여기는 울릉도·3



김 선생은 섬을 떠난 지 닷새 만에야 겨우 섬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늘이 섬으로 돌아가는 일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다가 잔잔해지기를 기다려 어렵게 섬으로 돌아왔지만, 섬 살이를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사람들은 하늘이 하는 일을 어찌하겠느냐며 위로해 주었다. 김 선생이 섬으로 들어올 때 모든 것이 함께 들어왔다. 여러 가지 생필품이며, 우편물이며, 신문이며…….

섬의 모든 것은 하늘이 전해 준다. 하늘이 길을 열어주지 않으면 그 어떤 것이라도 들어올 수 없고 전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신문도 마찬가지다. 하늘이 길을 열어 주는 날, 그래서 배가 뜨는 날이라야 신문을 볼 수 있다. 배가 이틀만에 오면 이틀 치의 신문을 한꺼번에 봐야 하고, 닷새만에 배가 뜨면 닷새 치의 신문을 한꺼번에 읽어야 한다. 닷새 전의 것이라 하더라도 섬에서는 구문(舊聞)이 아니라 신문(新聞)이다. 오래 그리워 하다가, 긴 시간을 기다리다가 만난 사람이 더욱 반갑듯 구문일수록 오히려 반갑다.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다린 시간만큼 뉴스로서의 가치는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기다린 시간만큼 반가움도 크다. 뉴스로서의 가치에 대해서는 감수할 수밖에 없다. 배가 매일 뜨고 안 뜨고에 상관없이 섬에는 조간 신문이란 없다. 뭍에서는 새벽을 가르며 전해지는 신문도 섬에서는 저녁 무렵에야 겨우 볼 수 있다. 배가 뜨는 시간이라야 배에 실리고, 바다 건너기에 걸리는 시간만큼 배 안에 머물러야 하고, 배를 내려서도 산골짝 골짝에 자리잡은 동네로 전해지자면 온 하루해가 걸려야 한다. 저녁이거나 밤이거나 제 날짜에 볼 수 있으면 그래도 다행이다. 섬의 저 서쪽이나 북쪽은 우체통을 다시 거쳐서야 전해지기도 한다.

섬의 신문에 나 있는 기사란 이미 눈에 귀에 익은 사건들이 많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통해 이미 보고들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문 기다리기를 포기할 수 없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서는 보고들을 수 없는 것을 보여 주고 읽을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문의 지면이 넓은 만큼 한눈에 많고 자세한 정보를 읽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매체에서는 볼 수 없는 여러 가지 해설 기사며, 다양한 칼럼이며, 사설 같은 것도 놓칠 수 없는 것이지만, 때로는 광고조차도 중요한 정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언제라도 와 주는 신문이 고맙기는 하지만, 배가 뜨지 않은 날 수만큼 한꺼번에 신문이 오면 읽기가 쉽지 않다. 한꺼번에 읽어야 할 분량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두고두고 읽자 하면서도 신문이 자꾸 쌓이다 보면 모든 기사를 자세히 읽기가 어렵다. 이 또한 뭍에는 없는 섬 살이의 어려움이다. 섬 살이의 어려움이 어찌 한 두 가지랴. 섬에 사는 사람들은 섬에 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어려움에 대해서는 체념에 이미 익숙해져 있다. 그 체념 또한 섬 살이의 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섬사람들은 배가 뜨지 않는 날은 시간의 흐름이 멈추어주기를 주기를 바랄 때가 있다. 그 시간의 흐름이 멈추어질 수 있다면, 못 지킨 약속 때문에 속을 태울 일도 없고, 들어오지 않는 생필품 때문에 몸과 마음이 고단해야 할 일도 없고, 그 단절감 때문에 고적감을 느껴야 할 일도 없고, 읽지 못하는 신문 때문에 눈과 귀를 답답해 할 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할 수 있으랴! 뱃길을 마음대로 할 수도 없는데, 하물며 시간의 흐름을 어찌 사람의 뜻으로 움직이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가슴이 답답할 때는 저 망망히 푸른 바다를 보고, 고적감이 몸을 내려앉게 할 때는 힘차게 밀려와 섬을 일깨우는 저 하얀 파도를 보고, 물길 건너 저쪽이 그리울 때는 서로들 껴안으며 다독거릴 일이다.

저동항 저 먼 수평선 위로 밝은 해가 떠오른다. 하늘이 푸르고 물결이 잔잔하다.

오늘은 배가 잘 뜨겠지. 오늘 날짜 신문을 잘 볼 수 있겠지-.♣

 

 

       게시판 편지쓰기 방명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