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나무의 겨울

이청산 2020. 1. 21. 12:17
                                                    나무의 겨울

 

겨울 산에 찬 바람이 분다. 넓은잎나무들은 잎을 모두 떨구고 발가벗은 몸으로 서 있다. 가을부터 한 잎 두 잎 떨어져 내리던 나뭇잎이 겨울바람을 맞으며 몇 안 남은 것마저 다 떨어뜨리고 있다. 저러고도 이 혹한의 겨울을 무사히 날 수 있을까.

군걱정이다. 나무는 잎 다 떨굴 이 겨울을 위하여 한 해를 살아온지도 모른다. 나무는 늙지 않는다. 해마다 청춘으로 산다. 그 청춘을 위하여 이 겨울은 새로이 시작하는 계절이다. 입은 것은 모두 벗어버리는 것으로 새로운 시절을 기약하고 있는 것이다.

조용히 맨몸으로 하늘을 바란다. 맨살이 향하는 곳은 오직 하늘이다. 온몸으로 하늘을 안는다. 이 나무를 보고 시인은 어린아이의 순수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은 겨울이 오면 옷을 자꾸 껴입는데/ 나무는 옷을 한 겹씩 자꾸 벗어 내립니다/ 다 벗고 더 넓고 높은 하늘을 얻어 입고 섰습니다.”(정완영, 나무는)라고 했다.

한 겹씩 자꾸 벗어 내린다.’는 것은 무엇이고, ‘하늘을 얻어 입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지나온 모든 것들을 다 떨쳐버리고 새 생명 세상으로 향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일 것이다. 그 순수한 마음이 곧 하늘의 마음이 아닐까. 겨울의 나무는 하늘이 된다. 나무의 겨울은 하늘과 하나 되는 계절이다. 하늘은 만물에 생명을 준다. 나무에게 새로운 생명을 맞는 봄에 이르게 한다.

나무가 벗어낸 지난 철의 앞들은 어디로 가는가. 저를 태어나게 했던 땅으로 간다. 땅을 고요히 덮고 있다가 말없이 땅속으로 들어 땅과 한 몸이 된다. 저를 태어나게 했던 나무의 자양이 되어, 어느 봄날 다시 나무를 타고 솟아나게 된다.

그 봄날, 나무는 다시 잎을 얻는다. 비워서 얻은 것이다. 비워서 새로운 생명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일찍이 노자(老子)도 말씀하지 않았던가. ‘()의 지극함에 이르고 고요함의 도타움을 지켜 만물이 서로 어울려 생겨난다,’(致虛極, 守靜篤, 萬物竝作)라고 했다.

허의 지극함에 이른다.’ 함은 모든 것을 비워서 하늘을 받들어 따른다는 것이라 했다. ‘고요함의 도타움을 지킨다.’는 것은 그 비움을 통하여 고요함을 얻어 땅을 받들어 따른다는 것이라 했다. 이 하늘과 땅이 아울러 천지에 만물을 무성하게 한다는 것이다.

노자는 나는 그 만물로써 도()로 되돌아감을 살필 수 있다.(吾以觀其復)”라 하면서 말씀을 이어간다. “무릇 만물이 복잡하고 다양해도 어느 것이든 그 근원으로 돌아간다. 근원으로 돌아감을 일러 정()이라 하고, 이를 일러 명을 따른다 하며, 그 명에 따름을 일러 변함없음이라 한다.(夫物芸芸, 各復歸其根 歸根曰靜, 是謂復命 復命曰常)”라 했다.

바로 겨울을 사는 나무의 일을 말씀한 것이 아닌가. 세상에는 온갖 번다한 것들로 얽히고설켜 있지만, 마침내는 모두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나무의 겨울이 보여주고 있다. 돌아가면 무엇이 되는가, () 곧 땅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것이며, 이로써 변함없이 새로운 생명을 낳는다는 것이다.

노자의 말씀을 나무의 겨울, 겨울의 나무가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나무가 계절의 변화도 아랑곳없이 잎을 떨어뜨리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태어날 자리도 없을 것이고, 태어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면 나무는 그대로 세상의 종말에 이르지 않으면 안 된다.

노자의 말씀은 또 이어진다. ‘자연의 이치가 변함없음을 아는 것이 현명함이며, 변함없는 이치를 몰라 망령되면 흉하게 되는 것’(知常曰明. 不知常, 妄作凶)이라 했다. 잎이 지지 않는 나무를 상상해 보라. 그 일그러진 모습이 눈에 보일 듯도 하다.

비단 나무의 겨울, 겨울의 나무만 그러할까. 세상 모든 일의 이치가 그러하지 않을까. 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을 줄 아는 것, 앉은자리에서 내려올 줄 아는 것, 생이 다하여 죽음을 기꺼이 맞이할 줄 아는 것이 바로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것이 아니랴.

세상에는 이러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사는 삶들은 없는가. 한번 잡은 이득은 어찌해서라도 놓지 않으려 하고, 한번 차지한 자리는 영구히 제 자리로 잡고 있으려 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여 삶을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고 하는, 그런 사람들은 없는가. 그리하여 흉물이 될 삶은 없는가.

겨울 산을 오르며 잎을 다 떨어뜨리고 맨살로 서 있는 나무들을 다시 본다. 모든 것을 다 떨쳐낸 저 맨살 속에는 신선한 생명의 힘이 약동하고 있을 것이다. 오는 새 계절에 새로운 잎과 꽃을 피워낼 의지가 끓고 있을 것이다.

이 나무들 사이에 선다. 나는 지금 어느 계절을 살고 있는가. 이 나무들처럼 모든 것을 다 벗은 철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 나무 아래 떨어져 있는 하나의 가랑잎인지도, 곧 땅이 될 부엽(腐葉)일지도 모르겠다.

무슨 미련이 있을까. 자연의 일이 아닌가. 곧 봄이 오지 않는가. 새로운 잎이 나고 꽃이 필 봄이 올 것이 아닌가. 이대로 벗은 나무가 되고 떨어진 잎이 되고 싶다. 함께 나무의 겨울이 되고 싶다.(202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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