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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다

살고 싶다 아내는 살고 싶어 했다. 잘 살고 싶었다. 마당 텃밭이 좁다며, 사는 집이 편하지 못하다며 마음에 안 차 했다. 왜 그리 욕심이 많은가. 상추만 길러 먹을 만한 밭이면 족하지 않은가. 집이 좀 좁고 누추하면 어떤가. 얼마나 오래 살 거라고 그리 힘을 들이려 할까. 아내의 욕심에 나는 가끔 딴죽을 피우기도 했다. 어디 남의 쉬고 있는 땅이라도 있으면 찾아가 그 땅을 쪼아 무어라도 심고 갈았다. 잘 가꾸든 못 가꾸든, 푸성귀가 자라든 풀이 무성하든 그저 심고 갈고 싶어 했다. 벽돌로만 얇게 쌓아 지은 집 말고, 콘크리트 옹벽에 철근을 넣어 집을 지어볼 수 없을까. 추위도 더위도 걱정 없는 집, 마당 넓은 집에서 살아볼 수 없을까. 그런 집을 짓고 싶어 했다. 드디어 아내의 꿈이 눈앞에 이르렀다. ..

청우헌수필 2023.09.10

혼자 돌아왔다

혼자 돌아왔다 돌아와 달라고 애절하게 빌었건만, 오히려 나를 불렀다. 달려갔던 나는 혼자 돌아오고야 말았다. 돌아와 주기만 하면 내가 아주 딴사람이 되어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나의 애끊는 호소는 허공중에 무참히 흩어져 버렸다. 바쁜 일이 있더라도 아이들 전화는 잘 받아 달라던 부탁이 나에게 한 마지막 말이 될 줄이야. 당장 당신에게 달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러지는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 말만 믿고 나는 내 볼일을 천연하게 보고 있었다. 당신의 부탁대로 아이들의 전화를 잘 받았지. 그런데 이게 무슨 산산조각 깨어져 내려앉는 하늘 같은 일이란 말인가. 내가 달려갔을 때 당신 체온은 이미 빠져나가 버리고, 감은 눈에 앞니 하얀 끝자락만 살포시 보여주고 있었지. 오랜만에 만나는 나에게 짓는 미소였던가...

청우헌수필 2023.08.23

『가요무대』를 보며

『가요무대』를 보며 『가요무대』는 많은 시청자로부터 사랑을 받아오고 있는 아주 오래된 정통 가요 프로그램이다. 무대를 통해 방송하는 가요들은 애틋한 추억에도 빠져들게 하고, 가슴 뭉클한 향수에도 젖게 하고, 사무치는 그리움에 에어지게도 하고, 또 어떨 때는 어깨 절로 들썩이게 하는 흥겨운 가락으로 시름을 씻어주기도 한다. 그런 가요를 들으며 사람들은 흘러간 날의 추억과 사람, 그 그리움에 젖어 보기도 하고, 마치 그리운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 듯한 환영에 싸여 보기도 한다. 학창시절로 돌아가 풋풋한 친구들과의 우정 놀이에 빠져 보기도 하고, 첫사랑의 그림자에 아늑히 안겨 보기도 한다. 손뼉으로 함께 흥을 맞추며 살이의 고달픔을 잊어 보기도 한다. 『가요무대』는 그런 노래만 고른다. 그렇게 사람들의 심금을 ..

청우헌수필 2023.08.10

나를 버린 자리로

나를 버린 자리로 고적한 한촌 생활 속에서 일주일에 한 번 금요일 나들이는 적막을 활기롭게 넘어설 수 있는 아늑한 기쁨이요, 힘줄 돋는 활력소가 되고 있다. 나의 금요일은 ‘만남의 날’이다. 오전에 집을 나서 버스를 타고 구미로 가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도서관 수필반 회원들을 만난다. 희로애락의 사연들을 담은 수필을 함께 읽으며 문학과 삶을 이야기하며 한껏 희열에 젖는다. 그 시간이 끝나면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대구로 간다. 친구들과 정겨운 술잔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아니면 수시 연락을 통해 만나는 친구들은 먼 곳에 사는 나를 배려하여 그 만남의 약속을 나에게 맞추어 준다. 오늘도 공부를 끝내고 터미널로 나와 대구행 버스를 기다린다. 버스를 타는 재미도 쏠쏠하다. 일..

청우헌수필 2023.07.25

소원이 있다면

소원이 있다면 오늘도 산을 오른다. 푸르고 싱그러운 나무를 본다. 살 만큼 살다가 강대나무가 되고 고사목이 되어 쓰러져 누운 것도 보이지만, 산은 푸르고 울창하다. 하늘 향해 한껏 잎을 떨치고 있는 이 나무들이 있기 때문이다. 저 나무들의 소원은 무엇일까. 오직 하늘을 향하는 일이다. 하늘이 내려주는 빛을 타고 하늘에게 좀 더 가까이 오르는 것이 나무들의 가장 큰 소원일 것이다. 그 소원을 부여안고 열정을 태우다가 그 원이 다했다 싶을 때 서서히 내려앉는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나에게도 소원이 있는가. 어떤 소원이 얼마나 있는가. 한때는 바라는 것이 크고도 많았고, 해내고 이루고 싶은 것도 적지 않았다.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기도 하고, 바라기만 하다가 말고 하는 사이에 세월이 흘러갔다. 황혼을..

청우헌수필 2023.07.17

공수거를 바라며

공수거를 바라며 오늘도 산을 오른다. 숲이 한창 우거지고 있다. 엊그제만 해도 가냘픈 가지에 연록 잎을 내밀고 있던 것이 오늘은 튼실해진 가지에 우거진 녹음이 되어 오르는 길을 문득 막아서기도 한다. 나무가 이렇게 우거지다가는 산이 어떻게 될까. 산이 온통 풀과 나무 천지가 되어 내가 발을 들여놓을 틈도 없을 뿐만 아니라, 나무 아니면 아무것도 들 수 없고 마침내는 나무들도 설 자리, 살 자리가 없어 결국이 숲이 망하고, 산이 황폐해지지 않을까. 물론 기우다. 나무는 작은 씨앗으로 땅에 떨어져서 움이 나고 자라 잎을 돋우고 꽃을 피우면서 살아간다. 나무는 안다. 철을 맞이할 때마다 무엇을 달리해야 하고 얼마를 자라야 하는지를 안다. 그렇게 철을 거듭하려면 무엇을 가꾸어야 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도 안다..

청우헌수필 2023.06.26

나이 드니 참 좋다

나이 드니 참 좋다 오늘도 산을 오른다. 나날이 오르는 산이지만 빛깔이며 모습은 한결같은 날이 없다. 무엇이 달라도 다르다. 푸나무의 크기라든지, 나뭇잎 빛깔이라든지, 꽃이 피고 지는 거라든지, 열매가 맺고 떨어지는 거라든지 하루도 그 모양 그대로 있지 않다. 시간의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이 나무, 이 산빛에서 시간을 본다. 흘러가고 있는 시간의 얼굴이며 몸체를 본다. 맨살의 가지에서 꽃이 피고 잎이 나고 꽃이 지고 잎이 자라고 잎의 빛깔이 달라지다 내려앉고, 열매가 맺었다가 떨어지는 모습들 속을 시간이 흐르고 있다. 저들이 저리 변해 가는데, 나는 가만히 있는가. 아니다. 저들이 시간을 안고 변모를 거듭해 가듯 나도 나날이 달라져 간다. 나무가 나이테를 더해가는 것처럼, 나도 하루 이틀 시간을 더해..

청우헌수필 2023.06.10

남은 잔은 비우고 가세

남은 잔은 비우고 가세 아침이 참 눈치 없다. 원하는 사람이든 원치 않는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무차별로 찾아온다. 아침은 정녕 그런 분별을 못 하는 걸까. 기다리는 사람에겐 기꺼이 와주고, 기다리지 않은 사람에겐 슬쩍 비켜 가 주는 체면은 없는 걸까. 세상은 꽃밭 천지만도 아니고 가시밭 천지만도 아니다. 꽃밭이다가도 문득 가시밭이 다가서 오기도 하고, 가시밭인가 싶더니 저 너머에 꽃밭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웃다가도 울고 울다가도 웃는 것이 삶이라 했던가. 꽃밭을 살 때는 내일이면 또 어떤 꽃이 필까 싶어 밝은 아침이 어서 오기를 설렘으로 바라기도 하겠지만, 가시밭만 이어진다 싶을 때는 아침이 나의 것이 되지 않기를, 그래서 고난의 한세상이 다른 세상으로 바뀌어주기를 간곡히 비는 이들도 없지 않을 것이..

청우헌수필 2023.05.28

춘서春序

춘서春序 다른 나무는 한 달 전쯤에 꽃을 다 내려 앉히고 잎이 돋기 시작하여 벌써 무성한 녹음을 이루고 있는데, 아직도 꽃을 피워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벚나무가 있다. 그 나무 앞에 서면 꽃을 피워내기 위해 용을 쓰는 소리가 쟁쟁히 들릴 것도 같다. 강둑에 줄지어 선 벚나무는 마을의 큰 자랑거리다. 봄이 오면 어느 나무 할 것 없이 일매지게 꽃을 터뜨려 화사하고도 해사한 꽃 천지를 이룬다. 작년부터는 나무 아래 조명등을 설치하여 꽃이 피어 있는 동안은 밤낮으로 화려한 꽃 잔치를 벌인다. 꽃잎이 지고도 붉은색 꽃받침이 남아 또 한 번 꽃을 피우듯 온통 붉은 꽃 세상이 된다. 강둑을 다시 장식하면서 강물에 꽃 그림자를 드리운다. 꽃받침이 떨어진 자리에 뾰족뾰족 잎눈을 틔우다가 이내 풋풋하고 싱그러운 ..

청우헌수필 2023.05.12

음덕

음덕 집안 먼촌 할아버지뻘 되는 분이 나에게 조부님의 산소 비문을 써 달라는 청을 해왔다.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란 말을 누구한테서 듣고 부탁한다 했다. 글 쓰는 사람이긴 해도 그런 글을 써본 적 없다고 사양했지만, 같은 시조를 모시고 있고, 집안 내력도 모르지 않을 터에 자기 이야기를 들으면 쓸 수 있을 것이라며 강권했다. 살날이 그리 많이 남지 않은 것 같아 세상을 떠나기 전에 조상을 높이 기리는 일을 해놓고 싶다 했다. 장손은 아니지만, 남은 자손 중에서는 가장 맏이로서 자신이 꼭 해야 할 일 같다고 했다. 내년 윤년을 맞아 비를 세우고 싶다 했다. 권에 못 이겨 써 보겠다 했더니 족보를 들고 찾아왔다. 어느 날 풍수를 좀 아는 분과 할아버지 산소에 함께 갔었는데, 묫자리가 어떠냐 물으니 한참을 둘..

청우헌수필 2023.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