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성일기

봉암사 가는 길

이청산 2006. 5. 14. 17:50

봉암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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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일기·36



 

부처님 오신 날 사월 초파일, 봉암사가 문을 열었다. 한 해에 단 한 번 문을 여는 날이다. 마성면사무소 앞을 지나 문경 가은 섯밭재를 넘어 봉암사를 찾아간다. 절을 향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보에 갇혀 있던 물이 별안간에 터진 것처럼, 사람들은 산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었다.

봉암사(鳳巖寺)는 경북 문경시 가은읍과 충북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를 이루는 곳에 우뚝 솟은 희양산(曦陽山 998m)의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고찰이다. 이 절은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문으로 신라 헌강왕 5년(879) 지증대사가 창건한 이래 천년이 훨씬 넘는 세월 동안 선맥을 도도히 이어온 한국 불교의 성지로서 수행도량의 최후 보루로 일컬어지는 곳이다.

해방 직후인 1947년, 성철을 비롯한 청담, 자운, 향곡, 월산, 혜암, 법전 스님 등이 봉암사에 모여 '오직 부처님 법대로 살자'고 맹세하는 청규(淸規)를 세운 데서부터 이 절은 한국 현대불교사의 새로운 획을 긋는다. 이 청규가 곧 삼엄한 부처님 계율과 숭고한 조사의 유훈을 부지런히 닦고 함께 실행하여 구경(究竟)의 큰 결과를 빨리 이룰 것과, 어떠한 사상과 제도를 막론하고 부처님과 조사의 가르침 이외의 각자의 사견은 절대 배척한다는 등의 맹약을 담은 '봉암결사(鳳巖結社)'이다. 고려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이룬 이래 실로 칠백여 년만의 일이다. 이때부터 근래의 서암(西庵) 스님에 이르기까지 봉암사는 한국 불교의 선맥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1982년 6월 조계종 종단은 봉암사를 특별수도원으로 지정하고, 같은 해 7월 당시 문경군에서 봉암사 사찰 경내지를 획정 고시하여 일반인이나 관광객, 등산객의 출입을 철저히 막아 스님들이 수도에만 정진하도록 했다. 그 이후 봉암사는 전국에서 유일한 수행 도량으로서 선승이나 신도들이 한 번만이라도 다녀가기를 소원하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지금도 간혹 사람들이 봉암사에 들어가고 싶어하여 관리인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하지만, 허락되지 않아 하릴없이 발길을 돌리곤 한다. 하안거, 동안거엔 백여 명이 넘는 스님들이 결제에 드는데, 이를 원하는 승려가 하도 많아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고 한다. 워낙 규율이 엄해 웬만한 사찰의 주지들도 쫓겨나기가 일쑤라고 하며, 이 수행을 통해 종정이 3명이나 배출되기도 했다.

 

 

이 봉암사가 사월 초파일을 맞아 문을 연 것이다. 부처님의 자비처럼 날은 따뜻하고 청명했다. 가은읍 원북리, 그 한적한 시골 마을에 난리가 났다. 전에 볼 수 없었던 인파가 들끓었다. 절이 문을 연 것은 새벽 4시부터지만, 그 이전부터 자동차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경찰과 자율방범대가 동원되어 동네 초입부터 차량의 통행을 통제했다. 곳곳에 주차해 있는 차량이 홍수를 이루었다. 큰길 양쪽으로 도열하다 못해 부근의 초등학교 분교장에까지 차량으로 들이찼다. 남보다 일찍 와서 도로 연변이든, 빈터 어디이든 차를 세울 수 있는 사람들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아침나절이 되자 주차마저도 못하게 했다. 늦게 온 사람들은 아주 먼 곳에 차를 세우거나 되돌아가야 했다.

일단 주차를 할 수 있어도 쉽사리 절을 향해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절까지는 십 리 남짓한 길이 남았다. 절에서 참배객들을 위해 셔틀버스와 자원 봉사 차량을 운행했다. 차를 타면 5분 거리에 지나지 않건만 걸어가면 근 한 시간 길이다. 차를 기다리는 행렬도 대단했다. 몇 겹으로 선 줄이 차가 몇 왕복을 해도 줄어 들 줄 모른다. 사람들은 평소엔 잘 뵐 수 없는 부처님을 뵐 부푼 기대로 지루함도 잊은 채 줄지어 기다린다. 좀 젊거나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걸어서 절을 향해 간다. 기다릴 시간이면 걸어서라도 당도할 수 있을 것 같고, 봄바람 속을 걸어보는 것도 상쾌한 일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걸어서 봉암사로 간다. 하늘이 파랬다. 가로수의 잎들에 녹색이 짙어져 가고 있다. 저 멀리 들판 넘어 산자락 아래 인가들의 붉고 푸른 지붕은 신록 속에 피어난 꽃떨기 같다. 들판에는 파릇이 돋아나는 것들도 보이지만, 가꾸어질 것들을 예비하며 새 흙의 맨살들이 정갈하게 드러나 있다. 부처님이 오셨기 때문인가. 들판과 마을의 모습이 평화롭다. 그 평화를 가르며 이따금씩 차들이 질주한다. 참배객들을 위해 절에서 운행하는 차량들 말고도 많은 차들이 절을 향해 달리고 있다. 십리 밖에서부터 통제를 당했던 차량들은 무엇이며 이 금단(?)의 길을 신명나게 달리고 있는 차들은 또 무엇인가. 더러는 노인과 어린아이들이 타고 있는 차량도 있었지만, 그 중에는 거드름을 피듯 앉아 창 밖 풍경을 유유히 감상하고 있는 사람들이 탄 차도 없지 않다. 그런 차들은 대개 큼지막한 명차(?)들이다. 부처님은 진리의 깨달음을 위해서 명예도 지위도 일신의 안일도 모두 버렸거늘, 이 길이 부처님과 조사의 가르침을 결단코 실천하려는 결사가 세워진 엄숙한 수행 도량을 찾아가는 길이거늘, 특권을 누리면서 절을 찾아가는 사람들은 또 무엇인가.

어느 마을 앞을 지나는데,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피켓을 든 사람들이 시위를 벌리고 있다. 불교에서 쓰는 말이 이름으로 붙은 무슨 수련원을 성토하고 있다. 부처님을 팔아 영리를 취하려는 아무개는 각성하라는 외침과 함께 동네의 수려한 환경이 파괴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의 구호가 가득한 피켓을 들거나 플래카드를 걸어 놓고 목청을 돋구며 시위를 한다. 천성산 도롱뇽을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지율 스님에게 이곳에 와서 단식 투쟁을 좀 해달라고 애원하는 플래카드를 걸어 놓기도 했다. 길가에서는 보이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동네 안쪽 산골짝 어디에 수련원 공사로 인해 주변 환경이 심각하게 파괴되고 있는 모양이다. 많은 사람들이 봉암사를 찾아 올 이 초파일을 시위의 날로 택한 것 같다. 오늘이 아니면 적요한 이 한촌의 시위를 누가 지켜 볼 것인가.

 

봉암사로 가는 길은 멀고도 힘이 들었다. 이 지난한 속계의 일을 보고 듣고서야, 오랜 시간을 기다리거나 걷고서야 이를 수 있는 길이었다. 걷기 시작한 지 한 시간쯤 되어갈 무렵 산문에 도착했다. 이 길 초입에서 셔틀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이미 산문에 당도하여 절집으로 들고 있다. 산문에서부터는 걸어온 사람이나 타고 온 사람이나 다 함께 걸으면서 대웅보전을 향해 가야 한다. 사진 촬영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며, 등산객은 또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매고 있던 배낭은 모두 문 앞에 벗어 놓아야 했다. 어떻게 식별해낼지는 몰라도 단순 관광객도 출입을 통제한다고도 했다. 아무리 통제가 많아도 신발에 흙을 묻히지도 않고 유유히 산문 안쪽으로 드는 사람들이 있다. 명차(?)의 주인들이다.

길을 돋우며 십여 분을 더 걸어 절집에 도착했을 때는 법요식이 이미 끝난 뒤였다. 모처럼 문이 열린 절집에는 많은 참배객이며 불자들이 붐볐다. 절집은 많고 넓고 컸다. 평소엔 수행만 하던 도량이라 그런지 하많은 사람들이 들끓어도 속기(俗氣)

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색색의 연등이 아닌 하얀 색깔의 등이 마당을 메운 대웅보전 뜰 위에는 욕불의식으로 원을 빌 수 있도록 아기 부처님을 모셔두었다. 사람들은 향탕수를 부처님의 머리 위에 부으며 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법당에 들어 예불을 올리며 저마다의 소원을 빈다. 절집 한 쪽에서는 참배객들에게 일일이 공양을 차려낸다. 사람들은 공양간 앞에 줄지어 섰다. 나물 비빔밥에 미역국 한 주발, 떡 한 쪽으로 차려내는 공양이 부처님의 가피 덕인지, 먼길에서 얻은 허기 덕인지 세상의 어떤 요리보다 진미를 자아내는 듯하다. 마당 한쪽에 주저앉아 먹으면서 문득 명차(?)로 절집을 찾아오던 명사(?)들을 떠올린다. 그들은 어디서 어떻게 이 공양을 받고 있을까.

역시 봉암사에는 부처님이 오셨다. 쉴 틈 없는 손길로 수많은 공양을 차려내는 사람들, 우물가에 둘러앉아 공양 마친 그릇을 말없이 닦고 있는 사람들, 참배객들에게 차를 끓여 대접하는 사람들, 절집 곳곳에서 참배객들을 친절히 안내하는 사람들……, 신심 깊은 불자들이거나 봉사활동을 나온 학생들이다. 그들이 부처였다. 그들이 있기에 그 많은 사람들이 붐벼도 절집은 정결(淨潔)과 정밀(靜謐)이 유지되고 있는 듯했다. 이 절집과 이 땅을 맑게 하는 그들이 부처였다.

돌아가는 길도 붐볐다. 이 부처님의 세계에서 다시 사람 세상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역시

태워다 줄 차를 기다리는 행렬이 끝 모르게 늘어섰다. 사람 세상으로 돌아가게 할 차가 왔다. 줄에서 보이지 않던 몇 사람이 갑자기 차 문 앞으로 다가선다. 누군가 말했다.
 "여태껏 기다린 사람도 있는데 새치기하지 맙시다!" 또 누군가가 말했다.
 "관둬요. 부처님께 공덕 빌고 온 분들인데 남 속이기야 하겠어요?" 앞으로 다가섰던 사람들은 머쓱해 하여 물러났다.

이 사월 초파일이 지나면 봉암사는 또 문을 닫아 걸 것이다. 그리고 스님들은 지난날의 단호했던 결사를 생각하며 안거하여 용맹 정진할 것이다. 부처님의 법과 조사의 유훈은 한층 광채를 발하게 될 것이다.

그 빛나는 부처님의 법이 결코 절집 안에만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결코 스님들의 것만이지는 않을 것이다. 문을 닫아 건 채 갈고 닦은 그 법이 언젠가는 이 세상을 참으로 자비롭게, 평화롭게 만들 것이다.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것이라 믿으며 사람들은 사람 세상으로 돌아가는 차에 오른다.

그 날을 고대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은 오늘 이렇게 봉암사를 찾아 왔듯이, 그 마음으로 다음해 봉암사가 문을 열 날을 다시 기다릴 것이다, 사람들은.
  인간의 부산했던 발길 위로 하늘은 참 맑고 푸르다.♣(20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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