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성일기

주지봉 전설

이청산 2006. 5. 14. 17:49

주지봉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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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일기·35



무너지고 난 뒤 새로 쌓은 주지봉의 돌탑주지봉 공든 탑이 무너졌다. 황사가 날고, 비바람이 치고 난 뒤에 봉우리에 올랐을 때, 탑이 허망하게 무너져 있었다. 몇 날 며칠을 두고 하나하나 쌓아가며 공을 들였던 '그분'의 낙담은 쌓아 올린 탑의 크기만큼이나 컸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낙담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봄비가 내리고 날이 개어 청명한 하루해가 지난 어느 저녁 답에 주지봉을 올랐을 때 탑은 다시 차곡차곡 쌓여 가고 있었다.

해발 367m의 나지막한 산봉우리. 그러나 매우 가파르다. 그 가풀막을 오르다 보면 숨결도 가쁘고, 다리도 아프고, 몸은 땀으로 흠씬 젖지만 사람들은 그 봉우리를 힘을 다해 오른다. 그곳에 오르면 마성의 모든 동네와 동네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을 모두 한 눈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늘목, 연작살, 가랫골, 진장터, 화산, 띠실, 솥골, 못고개, 저부실, 샘골……, 그리고 오정산, 단산, 봉명산, 주흘산, 백화산, 성주봉, 어룡산……. 그 산자락 사이사이로 올망졸망 자리 잡은 동리들, 몸에 감길 듯 정겨운 곡선을 그리며 이어지는 마을길, 바둑판처럼 반듯한 선을 그으며 펼쳐져 있는 질펀한 들판, 산야의 풍경을 그림처럼 담고 흐르는 시냇물……. 주지봉에서 내려다보는 들판의 모습은 청량제를 들이킨 듯 가슴을 시원스레 트이게 하고, 오순도순 모여 있는 동리들은 지난날의 애틋한 추억 같은 정감에 젖게 한다.

주지봉을 옛날에는 '비이산'이라 부르기도 했고, '주지미'라 일컫기도 했다고 한다. 못고개 마을에서 '납짝골'이라고 하는 북쪽 골을 타고 산을 오르다 보면 세종 때의 효자 조형(趙珩)이 세웠다고 하는 비홍정(飛鴻亭)이라는 정자가 있어 '비홍정산'이라 부르다가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그 소리가 변하여 '비이산'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그리고 누가 지은 것이지는 알 수 없는 작은 절이 이 골짜기에 있었는데, 이 절의 주지가 어느 날 절을 떠나가고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아 이를 두고 '주지미귀(住持未歸)'라 일컫다가 이게 산 이름으로 변하여 '주지미'라 부르게 되었다는 유래담도 있다. 이 이름도 흐르는 세월 따라 '주지봉'으로 변하여 불리게 되었는데, 이 이름에 '朱芝峰'이라는 아름다운 뜻을 지닌 글자가 붙여지게 되었다.

이 골짜기에 있었다는 정자며 작은 절은 지금은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지만, 그 절의 주지는 절을 두고 왜 이 산을 떠나게 되었을까. '절 싫으면 중 떠나라'는 속담처럼, 너무도 험하고 가파른 골짜기에 있는 절을 오르내리기 힘이 들어 중이 떠나버린 것일까. '마법의 성'이라는 말이 문득 연상되는 '마성(麻城)', 주지봉은 그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그 곳에 오르면 마성이 시원스레 다 보일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사람들은 주지봉을 오르고 싶어하지만, 기슭이 너무도 험준하여 쉽사리 오를 수가 없었다. '주지봉(朱芝峰)'이라는 미명(美名)은 쉽게 오를 수 없는 그 봉우리에 대한 동경심을 드러낸 것인지도 모른다. 그 동경의 마음을 현실에 옮겨 놓고자 하는 분이 있었다. 그분에 의해서 주지봉은 이름처럼 꽃다워져 갔다.

그분은 우선 길을 내기 시작했다. 밋밋하거나 약간의 경사가 진 곳은 풀숲을 헤치고 발자국만 새기면 될 일이지만, 숲이 우거지고 가풀막이 심한 곳은 나무를 베어 내고 길을 텄다. 그리고 베어낸 나무를 잘라 층층이 횡목을 대고 계단 길을 만들었다. 수많은 품을 팔고 땀을 흘린 끝에 삼백여 계단을 놓았다. 한꺼번에 제일 많은 곳은 173계단이나 놓았다. 정상으로 오르기 직전의 제일 가파른 곳에 놓은 계단길이다. 수많은 세월 속에서 그분이 쏟은 힘이며 열정은 이 봉우리의 높이며 크기보다 더 높고 컸다. 드디어 봉우리를 오르는 길이 났다. 사람들은 그 계단을 타고 쉽사리 오르내릴 수 있었다. 가파른 계단 길이라 다리도 팍팍하고 숨결도 가쁘지만,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기대와 즐거움, 땀의 양에 비례하는 신체의 운동량을 즐기며 경쾌한 마음으로 올랐다.

그분의 열정은 길을 닦는 일에만 그치지 않았다. 가쁜 숨 몰아쉬며 땀에 젖어 오를 사람들을 생각했다. 정상에 터를 닦았다. 나무를 베어 다듬었주지봉에 설치한 등걸나무 벤치다. 등걸나무로 다리를 세우고 껍질을 정성스레 벗겨낸 몇 개의 등걸을 걸쳐 벤치를 만들었다. 나무의 하얀 속살이 부드럽게 드러난 벤치는 팍팍한 다리를 두드리며 오른 사람들이 편안하게 앉아 눈 아래로 펼쳐지는 풍경을 감상하기에는 안성맞춤의 자리가 되었다. 또 그분은 봉우리 한 복판에 돌을 모으기 시작했다. 몇 아름은 될만하게 기초를 놓아 원뿔 모양으로 돌을 쌓아 나갔다. 주위에 흩어져 있던 것이거나 땅 속을 뒤져 캐낸 것이거나 바위를 깨뜨린 것들을 모아 쌓았다. 탑은 나날이 그 높이를 더해갔다. 언제나처럼 저녁 무렵의 산을 올라보면, 땀흘려 하나하나 쌓아간 정성이 역력히 드러나 보였다. 괭이며 해머 그리고 나무를 베어 만든 사다리와 해어진 실장갑이 그분의 정성을 대변하고 있었다. 두어 길쯤의 높이가 되었을 때 상륜탑 구실을 할 돌을 얹음으로써 쌓기가 끝났다. 탑을 쌓아 올리무너지기 전의 처음 쌓은 돌탑면서, 쌓아올린 탑을 바라보면서 그분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무엇을 빌었을까. 큰바람이 불고 난 뒤 봉우리에 올랐을 때, 그 공든 탑이 중동에서 무너져 있었다. 그분도 안타까웠을 것이지만, 무너진 탑을 바라보는 사람의 가슴도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그러나 며칠 뒤에 그 탑은 말끔히 복원되어 있었다. 더욱 튼튼하게 세워졌다. 그 공든 탑을 결코 무너뜨릴 수 없다는 의지가 결연히 드러나 보이는 듯했다. 탑에 담으려 했던 그분의 기도 속에는 자신의 공덕을 비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주지봉을 아끼고 고향 마성을 사랑하는 마음 또한 없지 않았을 것이다. 점점 작아져만 가는 고향이 이제부터라도 번성해지기를 비는 간곡한 마음을 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제 주지봉을 오르는 사람들은 몸과 마음의 안식처를 모두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안락한 의자에 앉아 땀을 닦으며 시원스레 펼쳐지는 마성의 전경을 즐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공든 탑을 향해 소원도 빌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주지봉에 봄이 왔다. 생강나무 노란 꽃으로부터 온 봄은 주지봉 봉우리에 붉디붉은 진달래꽃을 무덕무덕 피어나게 했다. 붉은 지초[朱芝]는 아닐지라도 봉우리 곳곳에 피어난 진달래는 그 이름처럼, 그분의 공덕처럼 주지봉을 붉게 물들였다.

나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지역의 어느 기관에서 평생을 공무원으로 봉직하다가 퇴직한 분이라는 것과 산아래 마을 어디에 살고 있다는 말만 들었을 뿐, 그분을 대면한 적이 없다. 내가 퇴근을 하고 주지봉을 오를 무렵이면, 그는 이미 일을 마치고 산을 내려 간 뒤이다. 그 분의 일이란 물론 길을 닦는 일, 벤치를 만드는 일, 탑을 쌓는 일들이다. 그뿐만 아니었다. 벤치와 탑의 주변을 다듬기도 하고, 꽃과 나무들을 옮겨심기도 했다. 일을 하다가 두고 간 연장이며 마시다 둔 음료수 병에서 그분의 체취가 느껴지는 듯도 했지만, 그분의 모습을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분이 다듬다가 간 땅을 고르기도 하고, 그분이 심어 놓은 나무가 바람에 쓰러진 것을 세워 부목을 다시 받치기도 하면서 그분과 마음을 나눈다. 그분이 닦은 길을 오르고, 그분이 만들어 놓은 벤치에 앉아 땀을 닦고, 그분이 쌓아놓은 탑을 바라보면서 감사의 인사를 새기기도 한다.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하여, 누구 때문에 누구를 위하여 그러한 것을 닦고 만들고 쌓았을까. 그런 일을 할 때의 심정과 생각을 짐작하면서 그분의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한다. 깊은 사색이 깃들인 장인의 얼굴일 것도 같고, 자비로 가득 찬 도인의 얼굴일 것도 같고, 세상사 모든 것을 달관한 철인의 얼굴일 것도 같다.

오늘도 해거름에 주지봉을 오른다. 오늘은 그분이 무슨 일을 해 놓았을까. 무엇이 달라졌을까. 늘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이루어져 있을 기대 속에 주지봉을 오른다. 엊그제부터는 내가 오르는 해거름에 저부실마을에 사는 한 사람도 열심히 주지봉을 오르고 있다. 아침이며 낮에는 또 많은 사람들이 주지봉 공든 탑을 향해 올랐을 것이다. '주지미귀(住持未歸)'의 주지는 떠나는 주지봉 전설을 만들었지만, 그분은 찾아오는 주지봉 전설을 만들고 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의 그분은 더욱 거룩한 전설로 남을 것 같다.

지금 마성은 떠나고 있다. 인구가 줄고 학생이 줄고 있다. 묵밭이 늘어나고 집이 비고 있다. 임자 없는 책상이 늘어나고 교실이 비어가고 있다. 돌아오는 마성의 전설을 만들 사람은 누구인가. 지방자치단체 선거를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출마를 했다고 한다. 저마다 지역의 충실한 일꾼이 되어 살기 좋은 지역으로 만들겠다는 현란한 공약을 내놓고 있다고도 한다. 그 사람들 중에 있을까. 돌아오는 마성의 전설을 만들 사람이―.(2006.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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