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성일기

아내를 매수하다

이청산 2006. 6. 2. 16:58

아내를 매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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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일기·38



나는 경북 문경시 마성면에 살고 있다. 몸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민등록증의 주소와도 함께 살고 있다. 따라서 나는 지금 명실상부한 문경 시민이요, 마성 면민이다. 나는 울릉도에 살 때는 울릉 섬사람이었고, 의성과 선산에 살 때도 그 고장 사람이었다. 주소를 옮기지 않아도 그곳의 사람들과 더불어 살 수 있다. 그러나 그곳들이 어차피 내 '삶의 터'임에야 몸도 마음도, 행정 절차도 모두 그곳에 두고, 그곳 사람이 되어 그곳에 묻혀 살고 싶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했던 서양 격언이나 '그 고장에 가서는 그 고장의 풍속을 따르라[入鄕循俗]'했던 논어의 말처럼 울릉도에 가서는 울릉도에 취하여 살았고, 지금 마성에서는 마성에 빠져 살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마성의 공기를 마시며 마성의 산을 오르고, 마성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마성일기'를 쓰고 있는 것이다.

 

아내도 내 삶의 터를 쫓아와 대구에 있는 집을 비워 두고 마성에서 함께 살고 있다. 아이들이 다 떠나버리고 우리 부부만 단출하게 살고 있는 터에 굳이 두 집 살림을 할 필요가 없다는 데에 아내와 나의 마음이 모아졌다. 그래서 아내도 나처럼 마성 사람이 되어 마성의 산천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아내의 주소지는 마성으로 옮기지 못했다. 아내마저 주소를 옮기면 대구의 집은 육리청산(陸里靑山)이요, 무주공산 격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선거 철이 되었다. 한 사람이 여섯 표씩이나 찍어야 하는 지방선거가 다가왔다. 이 궁벽한 산촌 마을에도 후보자의 선거사무실이 생기고, 후보자의 인물을 커다랗게 새긴 대형 현수막과 플래카드가 걸리고, 십여 장의 포스터가 나붙었다. 인물도 참 많다. 인물을 크게 그려 붙인 트럭이 요란한 로고송을 확성기로 내뿜으면서 도로를 달리고 있다.

 

나는 마성의 면민이니 마성에서 주권을 행사하면 될 일이지만, 아내는 어떻게 하나? 나 한 사람 안 찍어도 될 사람은 다 되겠지 뭐. 다 그렇게 생각하면 뭐가 되겠어. 그러면 백여 키로를 달려 가잔 말이에요? 논의 끝에 아내 것은 부재자 투표를 하기로 했다. 인터넷을 뒤져 부재자 투표 신고 용지를 찾아내 내용을 적어 주소지로 부쳤다. 선거 공보와 함께 투표용지가 날아왔다.

 

누굴 찍으면 좋을까? 사람도 보아야 하지만, 당(黨)도 보아야지요. 맞아, 아무리 인물이 출중한 들, 그 솥에 들면 그 밥이 되어버리겠지? 진보니 뭐니 하면서 편이나 가르고, 세금이나 펑펑 매기는 그런 사람들은 싫어. 맞아, 당신 잘 생각했어. 나도 마찬가지야. 이번 기회에 그런 사람들 발 못 붙이게 하자구. 모처럼 아내와 나는 한 통속이 되어 즐거운 맞장구를 쳤다. 부재자 투표도 앉은자리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십여 키로 정도를 달려 시 소재지까지 나가야 했다. 꼭 이렇게 가야 해요? 백성들 사는 건 돌볼 생각 않고 편이나 가르기를 좋아는 사람 싫다면서? 그런 사람 없어지게 해야지. 아내를 달래어 투표장으로 갔다. 달래지 않아도 갈 것이지만, 달래는 체 해주었다.

투표장에 당도했다. 여기까지 오긴 왔지만, 맨입으로는 못 찍겠어요. 부재자 신고를 해주고, 투표를 채근하면서 몸 달아(?) 하는 나를 보고 아내는 오기를 부린다. 그러면 어쩌란 말이야? 수고비를 좀 주어야지요. 그렇지 않으면 아무나 막 찍어 버릴 거야. 그래 좋아, 막 찍지 말고 잘 생각해 찍으라고. 주머니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 주었다. 아내는 호호 웃으며 받아 쥐고서는 투표장으로 들어갔다. 아내는 나와 자기가 함께 원하는 후보에게 즐겁게 투표했을 것이다. 이리하여 아내를 매수(?)하는 일은 간단히 끝났다.

 

하기야, 내가 그렇게 매수하지 않아도 찍어주어야 할 사람한테 어김없이 찍어 주었을 것이다. 그 즐거운 매수 행위는 고적한 타향살이의 재미로운 파적(破寂)거리가 될 수 있었다. 지방 선거가 재미 하나를 우리에게 준 셈이다. 우리가 투표하는 일을 파적의 재미로 삼고 있을 때, 후보자들은 생사를 가를 듯한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모처럼 시내에 나온 김에 장이나 보고 가자며 장터로 갔더니 귀를 찢을 듯이 울리는 스피커 소리와 함께 넓적한 어깨띠를 둘러맨 사람들이 명함을 뿌리면서 연신 허리를 굽혀댄다. 아내는 나에게서 받은 돈을 꺼내어 갈치 두 마리를 샀다.

 

드디어 선거 날이 왔다. 동네 초등학교에서 진행되는 투표에 내가 맨 먼저 표를 찍을 것이라 생각하고 투표가 시작되기 전인 이른 시각에 투표장으로 내달았다. 벌써 수백 명이 줄을 서 있었다. 모두 일찍 투표하고 들일을 나가려는 사람들이었다. 이 산골 사람들은 순박했다. 이 바쁜 일 철이지만, 좋아하는 사람 찍어주기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한 시간 여를 기다려 겨우 투표를 마쳤다. 아내와 함께 왔더라면, 기다리기 지루해 하는 아내를 매수(?)해야 할 뻔했다.

 

투표를 마친 오후에 이웃마을 시냇가로 다슬기를 주우러 갔다. 속이 훤히 비치는 맑은 물 속에 까만 다슬기들이 다문다문 박혀 있었다. 날 저물 때까지 주우면 제법 거둘 수 있을 것이련만, 개표 방송 시간을 맞추어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갈치구이를 찬으로 올린 밥상을 앞에 두고 개표 방송을 본다. 당선 예상자 발표에 이어 개표 상황이 방송되었다. 우리가 바랐던 사람들이 속속 당선되고 이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그런 사람이 늘어났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손뼉을 쳤다.

 

"그런데, 어쩌지요? 그 사람이 안 보이잖아요." 아내가 안타까워했다.

시의원에 출마한 이웃의 마음씨 좋은 그 사람이 끝내 보이지 않았다. 마음씨 좋은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 모양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누가 민심을 마음대로 돌릴 수 있으랴.

"이 작은 마을에 그리 많은 사람이 나섰으니 쉽게 될 수 있겠어?"

그 사람들은 우리처럼 즐거운 매수(?)도 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선거법이 그리 삼엄하니 농담인들 '매수'라는 말을 감히 할 수 있었으랴. 해서도 안 될 말이다.

 

 

엄한 선거법 덕분인지 그래도 세상이 많이 맑아지고 있는 것 같다. 선거와 관련하여 좋지 않은 소식이 간혹 뉴스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기도 하지만, 돈을 뿌려 사람을 얻고 표를 사려는 일은 많이 없어진 것 같다. 다행한 일이다. 이 참에 세상이 좀더 맑아져야겠다. 낮에 다슬기를 줍던 냇가의 물같이 속도 훤히 다 들여다보일 만큼 맑고 깨끗한 세상이 되면 좋겠다. 맑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부지런히 일하면 모두들 잘 살 수 있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우리가 바라던 사람들이 많이 당선되었다. 그들은 모두 피폐해진 경제를 살리겠다고 한다. 살려야 할 건 경제만이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도 따뜻하게 살려내야 한다. 살기 어려운 세상 탓에 메마르고 찢기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따뜻한 마음만이 맑고 깨끗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이번 선거에서 당선된 사람들, 그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어 줄 수 있을까. 그들이 앞장 서 주기를 바라면서, 그리할 수 있으리라, 그리하리라 믿어본다.♣(200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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