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주는 마음 받는 마음

이청산 2022. 12. 26. 14:32

주는 마음 받는 마음

 

  지하철 전동차를 탔다. 좌석은 다 찼고 서 있는 사람도 많았다. 나는 가방을 든 채 출입문 옆 손잡이를 잡고 서서 갔다. 앉아 있는 사람 중에는 젊은 사람들도 많은데, 대부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다가 건너편 좌석 중간쯤에 앉아 있는 중년 신사와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오라고 손짓했다.

  다가가니 일어서면서 앉으라 했다. 곧 내릴 사람인가 보다 하고, 감사하다며 앉았다. 그 신사는 반대편 문 쪽으로 가서 섰다. 한 역, 두 역…, 몇 역을 지나쳐도 내리지 않았다. 내 눈길을 의식했는지 몸을 숨기듯 서 있는 사람들 속을 파고들었다. 내가 내릴 때도 그는 내리지 않고 등을 지고 서 있었다.

  내가 서 있을 때 가까이에 앉아 있지도 않았고, 앉은 이들 가운데 어쩌면 가장 나이가 많을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내가 자기보다 나이가 조금 많아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사람이 나를 위해 자리를 양보하고, 내가 부담스러워할까 싶어 자기 모습까지 숨기려 하다니-. 민망하고도 무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등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내렸다.

  집으로 오는 내내 따뜻함이 느껴지면서도 마음은 그리 가볍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마음이 고작 고개만 잠깐 숙일 일뿐이었던가. 무렴한 일을 저지른 것 같아 얼굴에 뜬 화기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매주 금요일이면 한 시간 반가량 차를 타고 달려 12시 반경에 터미널에 내린다. 터미널 부근 어느 식당에 들러 내가 항상 청하는 메뉴로 점심을 먹는다. 맛있게 먹고는 고맙게도 늘 마중 나오는 분의 차를 타고 회원들이 기다리고 있는 도서관 평생교육 교실로 향한다. 금요일은 나에게 항상 즐거운 날이다.

  내가 늘 가는 식당 주인아주머니는 다닌 지 두어 해가 지난 어느 때부터 식대를 조금 깎아 받았다. 왜 이리 받느냐 하니, “자주 오시잖아요.” 한 마디뿐이다. 단골이라 대접을 해주는가 보다 하고 계속 맛있게 먹었다. 물가가 오름을 따라 가격표는 고쳐 쓰이기를 거듭했지만, 나의 식대는 달라지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그대로 둘 수는 없다 싶어 “조금 더 받으세요.”라 해도 “괜찮아요,” 또 한 마디뿐이다. 그 식당을 내가 계속 그렇게 이용하는 것이 옳은가 싶어 어느 지인에게 사정을 말하며 어찌하면 좋을까 했더니. “……글쎄요. 좀 없이 보였던 모양이죠.” 하며 웃는다.

  설혹 내가 좀 없이 보인다 한들,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인가. 그리 없이 보이는 사람을 두고 오랫동안 그렇게 후의를 베풀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성자임이 틀림없을 것 같다. 변함없이 찾아주는 데 대한 사의라 하더라도 늘 그렇게 하는 것은 너무 과분하지 않은가.

  어쩔까 하다가 자그만 선물 하나 마련하여 갖다 주면서 필요한 곳에 쓰시라 했다. 이런 걸 왜 주시느냐며 받지 않으려는 걸 억지로 안겼다. 그러고 나니, 음식을 더 많이 더 잘해주려 애쓴다. 요즘은 그 식당을 나설 때마다 갈등한다. 이 집을 계속 찾아야 할까, 어쩔까. 도움을 주는 걸까, 부담을 주는 것일까.

  여럿이서 어느 박물관에 갔다. 해설사의 안내로 전시물을 관람하고 출구로 나오는데, 로비에서 노인 한 분이 탁자를 앞에 두고 붓글씨를 쓰고 있다. 탁자 위에는 소액 지폐 몇 장과 책 몇 권이 놓여 있었다.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에게 휘호해 준다 했다.

  일행 한 사람이 하나 써 달라고 하자 성씨가 무엇인지 물었다. ‘전주 이가’라 하니, 시조를 말하고 조선왕조 성씨라면서 가장 영명한

임금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사들에게 내리신 교훈 중에 ‘寬弘莊重’이라는 말씀이 있다며 그 문구를 능란한 필치로 써서 낙관까지 박아 주었다. 성씨의 시조며 내력에 관한 이야기들을 훤히 꿰고 있는 것 같았다.

  휘호를 받은 이가 감동했는지 5만 원짜리를 선뜻 내놓았다. 노인은 좋아서 하는 일에 돈은 안 받거니와 이리 큰돈은 더욱 받을 수 없다며 던지듯 내쳤다. 탁자 위 돈도 조금 전에 누가 억지로 두고 간 것이라 했다. 그래도 드리고 싶다며 강권하니 글씨를 담은 액자 하나와 책 한 권을 자기 선물이라며 건네주었다.

  다른 사람들도 글을 청하여 받고 사례하니 사양하다가 쓴 글을 말아 책 한 권과 함께 주었다. 그렇게 해서 나도 책과 함께 고맙다며 받았다. 내가 받은 것은 태조 임금이 나라를 세우면서 남겼다는 ‘難得而人心’이라는 글귀였다. 책은 그가 펴낸 시집이었다. 나중에 그의 명함에 새겨진 누리집 주소를 찾아 들어가 보고 깜짝 놀랐다.

  올해 92세로 명망 있는 서예가일 뿐만 아니라 성씨 유래와 고전 전적에 대한 상당한 조예를 가지고 있고, 등단 시인이기도 했다. 그 연치에 누리집을 운영 중인 것이 놀랍기도 했지만, 종교, 역사 등에 관한 다양한 저술 이력이 더욱 놀라웠다. 그렇게 가진 솜씨로 여러 사람에게 감동을 선물하려고 하는 그 마음이 더 큰 울림을 준다.

  남에게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만남이었다. 당혹스러운 만남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 사는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모습을 우르러만 보아왔다. 그 마음들이 나에게 이르는 장면을 대하니, 나는 마치 딴 세상 사람인 것 같았다. 그들은 내가 별로 살아 보지 못한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었다.

  전철을 내리고, 식당을 나오고, 박물관을 나서는 걸음이 세상을 처음 걷는 것처럼 서툴 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어떻게 걸어야 할까. ♣(2022.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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