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이청산 2021. 12. 15. 14:24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이  일  배

 

  나에게 언제 죽음이 와도 기꺼이 맞이할 마음을 가지고 있다. 살 만큼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하고, 이제 내가 짊어져야 할 짐이나 갚아야 할 빚이 별로 없는 홀가분함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특별히 무슨 깨달음을 얻어 죽음 앞에서 유달리 초연하려 하는 것도 아니다. 풀도 나무도 짐승도 사람도, 목숨을 가진 모든 것들이란 태어남이 있듯이 죽음이 있는 것도 당연하다는 평범한 상념에서일 뿐이다.

  죽지 않고 살아 있기만 해서도 안 되고, 그런 일이란 있을 수도 없지 않은가. 철이 되면 미련 없이 가지를 떠나는 나뭇잎처럼 나도 그렇게 담담히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그래서 나라에서 관리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라는 것도 쓰면서 죽음에게 순순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정말 죽음에 초연한 걸까. 그렇게 담담하다면 순순히 죽어갈 준비는 잘하고 있는가. 말과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행신은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아 나 자신에게 부끄러워질 때가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볼 때마다 ‘죽는다’는 사실 앞에서 문득 섬뜩해지기도 한다. 내가 죽으면 나를 담고 있는 이 공간들이며, 나와 함께 그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하고한 용품이며, 나와 맺고 있는 많은 관계는 다 어찌해야 하는가.

  내 손때가 짙게 묻었거나 내 손길 눈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저 수많은 책은 다 어찌해야 하고, 어쭙잖은 것일지라도 그간 써놓은 많은 글은 또 어찌해야 하는가. 나를 앉혀주던 서궤며, 나를 챙겨주던 가용들을 모두 한 점 불티로 사라지게 해야 하는 걸까.

  죽을 사람이 별걱정을 다한다며 실없다 할 일이지만, 실로 실없는 탓인지 가슴이 답답해질 때가 있다. 내가 지지 않으면 안 될 짐이 별로 없다 하면서, 가진 것 때문에 쉽사리 삶을 놓을 수가 없겠다는 생각은 또 무엇인가. 

덜고 줄이고 없이하면 될 것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법정 스님같이 무소유에 대한 자각이 철저한 사람이라면 왜 이런 걱정을 하겠는가. 역시 나는 범속한 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번 곱씹게 할 뿐이다.

  사실, 내가 가진 것 중에는 재물 가치가 있는 것은 별로 없다. 모든 가구며 용품들도 그렇지만, 내가 아끼는 책이며 글들도 그렇다. 책 중에 무슨 희귀본이 있어 두고두고 보존 가치가 있는 게 있다거나, 써 놓은 글 중에 문학사에 길이 남을 명문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럴지라도 나에게는 소중한 것들이다. 그런 것이 남의 손에 들면 그저 공허한 짐 덩어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나 죽고 나면 허접한 쓰레기 같은 것들만 남겨 처리를 부담스럽게 한다고 누구는 나를 원망할지도 모른다.

  죽음 앞에서 그게 좀 억울하고 안타까운 것이다. 나에게 소중했던 것이 남에게는 귀찮은 존재가 되고, 나는 긴요하게 챙기고 싶은 걸 남은 하찮은 것으로 보는 것이 죽음을 쉽게 여길 수 없게 한다고 하면, 나를 참 열없는 사람이라 할까.

  아내가 건강하게, 무병 무탈하게 오래 살기를 바란다. 아내가 나보다 먼저 세상을 달리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고, 그런 일이 있어서도 안 된다. 나 혼자 적막히 살아갈 일도 안타깝지만, 아내가 쓰던 것들을 어찌 두고 볼 수가 있단 말인가.

  염치없는 심사일지는 몰라도, 나의 순순한 죽음을 위해서라도 아내는 나보다 오래 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아내의 건강이 집안의 더할 나위 없는 평안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울러 내가 남겨놓은 것들을 적절히 건사하고 처결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민망하고 부질없다. 내가 지은 업보를 누구에게 미룬단 말인가. 누가 삶과 죽음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가. 어차피 언제 죽어도 죽지 않으면 안 될 일이라면, 죽음을 겸허하게 맞을 방도를 찾는 일 말고 다른 도리가 있을까.

  그 방도는 저마다 사는 모습에 따라 다 다를 수 있을진대, 나에게는 무슨 방도가 있는가. 그 방도를 살피며 내 삶을 돌아보노라면, 가지고 있는 것들에 얽매여 죽음을 주저하고 있는 내 모습이 참 같잖게 여겨지기도 한다.

  죽음을 기꺼이 맞이하고 싶다 하면서도 ‘가진 것들’을 놓기가 애석해 죽음을 망설이는 것은 그야말로 소탐대실이 아닌가. 노자(老子)도 사람의 마음이 머물 곳은 ‘소박함을 보고 품으며 사욕을 줄이는 데 있다.(見素抱樸 少私寡欲, 道德經 第19章)’ 하지 않았던가.

  좀 늦은 깨침이지만, 이제부터라도 세상 어떤 것이든 가지기를 탐내지 않고, 가지고 있는 것에도 착심을 줄이고 털어나갈 일이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따라갈 수는 없을지라도, ‘견소포박’하며 검박하게 살기만은 애쓸 일이다.

  잘 살기 위하여, 가붓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하여-.♣(202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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