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818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파이브, 포, 쓰리, 투. 원 제로-” “공모가 55,000 현재가 61,600” 팡파르가 울리면서 거래소의 커다란 스크린에 숫자가 큼지막하게 떴다. 장내는 우렁찬 박수와 함성으로 터져 올랐다. 이李 대표 회사가 비로소 주식을 상장上場하는 날이다. 장내에는 주식 상장에 관계된 많은 인사며 관계자들이 모여 있고, 중앙에는 식장이 스텐딩으로 마련되어 있었다. 식전 행사로 이 대표가 증권회사 대표들에게 제품 설명해 나갔다. 세계 최초의 상·하·좌·우 90도 다관절 복강경 수술 기구의 성능과 제작 과정을 소개했다. 듣는 이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관심 깊게 듣고 보고 있었다. 식이 시작되면서 내빈 소개에 이어 회사와 제품을 안내하는 홍보 영상이 상영되고, 이어서 증권회사 대표와 이 대표가 ..

청우헌수필 2026.01.03

기다림에 대하여(8)

기다림에 대하여(8) 시골 버스는 승강장에 도착하는 시각이 제 도착 시각이고, 출발하는 시각이 제 출발 시각이다. 승강장마다 행선지와 출발 시각을 안내하는 표지가 붙어있지만, 어디까지나 참고용일 뿐이다. 승객들은 곁눈질로 슬쩍 한번 보면 된다. 지켜지지도 않을, 이런 쓸모없는 것을 왜 붙여 놓았을까. 붙여 놓았으면 지켜야 할 게 아닌가. 시골살이가 참 힘들구나, 하고 한탄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에 비하면 도시에서 시내버스를 기다려 타는 것은 얼마나 편리한가. 버스 노선 번호별로 경유지, 목적지가 상세하게 안내되어 있을 뿐만아니라, 몇 분 후에는 차가 도착할 것이며, 지금은 어디쯤 오고 있다는 전광판 안내에 이어, 이제는 전 승강장을 통과하여 곧 도착할 것이라는 여성 목소리 안내 방송이 나..

청우헌수필 2025.12.21

자기 자비에 대하여

자기 자비에 대하여 무엇을 해도, 어디에 있어도 무언가 마음 한쪽이 비어 있는 것 같다. 그 빈 마음은 책을 읽는 데도 집중을 못 하게 할 때도 있고. 무얼 먹어도 속이 차지 않게 할 때도 있다. 이 빈 마음의 정체는 무엇일까. 한 생애의 막을 내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지도 십수 년이 흘렀다. 한 생애가 막을 내렸다는 것은 지난했던 생애의 한 업에서 놓여났다는 것이다. 한동안 그 해방감을 만끽하며 지냈다. 별세계를 사는 것 같았다. 그 별세계도 한 해 두 해를 살다 보니 보통의 세계, 일상의 삶의 되어갔다. 그런데 그 일상에는 무언가 하나 있어야 할 게 비어 있는 것 같아 허전했다. 그렇다고, 그전 생애의 세계가 그립거나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었다. 한때는 시 낭송을 즐겨 하여 동호인들과 함..

청우헌수필 2025.12.11

건망에 대하여

건망에 대하여 오래 사귄 친구 이름이 한동안 기억나지 않다가 어느 날 문득 이름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보다 더 민망한 일은 아는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데, 이름이 통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물어보면 실례가 되거나 실망을 줄 것 같아 물어보지도 못하고 아주 답답했던 적이 있었다. 무슨 일을 하리라 하고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는 순간 잊어버렸다. 내가 무슨 일을 하려 했더라? 한참을 궁리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욕실에 가서 무엇을 하리라 하고 방에서 욕실로 갔는데, 순간 내가 왜 여기 왔지? 어처구니없는 의문에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어떤 글을 읽다가 ‘엄살’. ‘다혈질’이라는 말을 떠올려야 하는데, ‘응석’ ‘어리광’, ‘고혈질’, ‘고혈압’과 같은 얼토당토않은 말만 맴돌고, 그 말이 도무지 기억..

청우헌수필 2025.11.30

희망에 대하여

희망에 대하여 오늘도 강둑길을 걷는다. 날마다 걷는 나의 산책길이다. 강둑 바깥쪽으로는 들판과 마을이 펼쳐지고, 마을 주위로는 산이 새 날개처럼 둘러 서 있다. 강둑 안쪽으로는 길을 따라 벚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강에는 윤슬을 실은 강물이 흐른다. 사시장철 변함없는 풍경들이다. 아니다. 그 풍경이 한 시도 같은 적이 없다. 들판도 산도 달마다 철마다 모양이며 빛깔을 바꾸어 나가고 있다. 강둑 벚나무도 철을 맞추어 쉼 없이 몸을 고쳐 가고, 물도 흐르는 자리 따라 몸짓을 달리해 간다. 이렇게 피고 지고 흘러가는 것이라고, 그저 무심히 흐르는 것이기만 하랴. 사나운 폭풍우를 만나기라도 하면 지녔던 모습들이 일거에 깨어지는 상처와 고통 앞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것을 다시 다스리지 않으면 안 ..

청우헌수필 2025.11.12

길은 살아있었다

길은 살아있었다 이태 만이다. 그리워하던 주지봉에 올랐다. 별다른 사정이 있는 날 말고는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오르내리던 길이었다. 그 길의 풀이며 나무 하나 눈길 주지 않은 게 없고 그 산의 흙이며 돌덩이에 발길 대지 않은 곳이 없으리만큼 오르고 내렸다. 그 길과 산을 내 글 속에 고스란히 담아 책 한 권 엮기도 했다. 그 나무며 그 산이 품고 있는 숨결은 곧 나의 호흡이고 맥박이었고. 내뿜는 정기는 곧 내 삶의 살이 되고 근육이 되곤 했다. 그러던 산을 이태나 버려두어야 했다. 방안에서 혼절하여 쓰러졌다. 옆 사람이 가뭇없는 길을 떠나고 난 뒤 고적하게 지내던 어느 겨울날이었다. 가물가물하는 의식 속에서 겨우 핸드폰을 잡아 119를 불러 응급실로 실려 갔다. 급기야는 대처 큰 병원 병실에 ..

청우헌수필 2025.10.26

댑싸리 전설(4)

댑싸리 전설(4) 가을이 여물어가는가 싶더니 올해도 댑싸리가 발갛게 물들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렸을지도 모르는, 그렇지만 볼 수 없었던 빛깔이지요. 당신이 씨 뿌렸던 그 댑싸리의 후예들입니다. 가을비가 살포시 내리더니 빗물의 무게 때문인지 드러누운 것도 있네요. 그때 당신이 씨를 뿌린 건 당신이 떠나던 해의 봄이었지요. 그것이 움이 터서 싹이 올라와 잔잔한 이파리들을 피워낼 무렵 초여름에 당신은 환우를 안고 아이들에게로 떠났지요. 아이들 집에 있던 어느 날, 한데 몰려 있게 하지 말고 고샅에 한 줄로 옮겨 심어 달라 했지요. 당신이 댑싸리 씨를 뿌린 것도 처음이었고, 나도 당신이 뿌린 씨로 댑싸리를 처음 알았지요. 어디서 복슬복슬 이쁘게 자라는 댑싸리를 보고 가까이 두고 싶었던지, 가을에 발갛게 ..

청우헌수필 2025.10.12

종이부시終而復始

종이부시終而復始 친구는 우리 네 사람 모임에서 총무 역할을 했다.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는 그날 이른 아침에도 저녁 아무 시에 모일 것이니 그때 보자는 문자를 보내왔다. 그러던 사람이 그날 늦은 오후 무렵, 걷기가 힘들어 외출이 어려우니 셋이서 즐거운 자리를 가지라며 더 이상 참석이 어려울 것 같다는 문자를 다시 보내왔다. 무슨 오해가 있는 건지, 홀연 무슨 일인가 싶어 전화하니 꺼져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속이 뒤틀리면서 전신에 힘이 빠지고 말도 잘 안 나온다며 온 가족이 다 모여 있다 했다. 무슨 변인가 싶어 달려 가보겠다 하니, 부담된다며 오지는 말고 차도 소식을 기다려 달라 했다. 친구와 나눈 마지막 목소리였다. 소식은 아들이 보낸 모바일 부고장으로 왔다.나 말고 세 사람은 서로..

청우헌수필 2025.09.27

의사의 동화

의사의 동화 손목에 손가락을 얹어 맥박을 짚으며, 뛰는 소리를 듣고 보기라도 하려는 듯 온 감각 기능을 다 모으는 것 같다. 옷을 살짝 걷어 복부 곳곳을 꼭꼭 눌러본다. 그러고는 혈을 찾아 발가락부터 배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침을 놓는다. 전기 자극까지 얹어 자르르한 진동이 느껴지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간호사가 와서 침을 뽑고는 엎드리라 하여 허리에 물리치료를 시작한다. 치료가 끝나면 다시 의사가 와서 등판에 부항을 붙이고 허리 곳곳을 지그시 누르면서 침을 놓는다. 급소를 찌를 때는 비명이 터져 나올 만큼 아프기도 하지만, 굳은 몸이 풀어지면서 뭔가 트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요통으로 고통받으며 몇 곳 병원을 전전했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통증 치료’라는 한 ..

청우헌수필 2025.09.17

고독사가 아니라 고립사다

고독사가 아니라 고립사다 외롭지 않은 사람은 없다. 외로움이란 인간의 실존적 본질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인이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고 한 것도 외로움이 인간이 지닌 숙명으로서의 본질을 형상화한 말일 것이다. 외로움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주관적인 감정의 세계이기도 하다. 지금 세상에서는 외로움을 두고 누구나 지닌 개인적,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공적인 문제로 풀어나가야 할 것이라는 인식이 고조되어 가고 있다. 사회 구조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도 보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세계 최초로 ‘외로움부(Minister for Loneliness)’를 만들고, 일본도 내각부 산하에 ‘고립·고독 대책 담당실’을 설치하고, 우리나라 서울시에서도 ‘외로움 없는 서울’ 사업을 추진하여 ‘외로움’에 대처하..

청우헌수필 2025.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