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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병원 길(2)

즐거운 병원 길(2) 봄이 가고 여름이 왔다. 계절이 바뀌어 간다는 것은 삶이 흘러간다는 말이다. 계절들은 저마다 다른 나의 삶을 안고 있었다. 지난봄은 나에게 아쉬움을 남겨놓고 흘러갔다. 그런가 하면 소망과 기쁨도 남겨놓았다. 무엇이 잘못된 탓인지 해를 바꾸어 가며 요통을 계속 앓고 있다. 지난해 벽두부터 일기 시작한 통증이 계절이 바뀌고 바뀌어 같은 계절이 돌아와도 잦아들지 않는다. 큰 병원 작은 병원을 가리지 않고 치료에 유용할 만한 곳을 찾아다녔지만, 쉽게 치유되지 않았다. 해가 바뀌어 봄이 왔다. 내 처지와는 상관없이 봄은 제 할 노릇을 잘해나갔다. 마른 나무에 움을 틔우기 시작하고, 검은 땅이 조금씩 푸른 빛을 띠어갔다. 이맘때쯤이면 늘 오르던 집 뒷산에는 생강나무며 올괴불나무도 눈을 ..

청우헌수필 2025.05.25

육신과 정신

육신과 정신 큰일 났다. 강의실에서 나와 차를 몇 번 갈아 타고 집에 이르러 하루를 정리하려고 보니, 유에스비(USB)가 없다. 가방이며 주머니를 아무리 뒤져도 나타나지 않는다. 어디에서 흘려 버린 걸까. 예사 큰일이 아니다. 그 속에 들어있는 수많은 자료를 어찌해야 하는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내 정신이 텅 비어버린 것 같다. 그게 뭐길래 나를 이리 무력하게 만드는가. 강의실에서 컴퓨터에 꽂아서 쓰면서 강의를 마치고 난 뒤, 집으로 돌아온 길을 되짚어 봐도 길에서 흘린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컴퓨터에 꽂아 쓰고는 그냥 두고 온 게 분명하다. 그렇게 여기면서도 마음은 몹시 불안했다. 내 짐작이 틀릴 수도 있고. 누가 보고 가만두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몸에 진땀이 나면서 경련이 이는 것..

청우헌수필 2025.05.18

댑싸리 전설(3)

댑싸리 전설(3) 댑싸리가 이제 새로운 생애를 시작한다. 지난가을 붉게 타오른 뒤 겨울 들면서 씨를 담뿍 떨어트려 놓고는 그대로 말라 갔다. 한생을 다해가는 모습이다. 마른 채로 눈이 오면 눈을 맞고 바람이 불면 흔들리다가 봄을 맞았다. 새로운 생명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난 생애의 자리를 비켜나게 해야 한다. 아내가 씨 뿌려 나게 한 그 생명체들을 다시 맞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마른 것들을 들어내었다. 그 자리에는 씨앗들이 소복이 내려앉아 있었다. 씨앗들이 앉은 자리를 다치지 않게 천천히 힘주어 살며시 들어냈다. 봄이 익어갔다. 강둑의 왕벚나무며 뒷산의 산벚나무가 피고 지고 할 무렵 제 전생이 비켜난 그 자리에 새로운 생명들이 꼬물꼬물 솟아났다. 아내가 뿌렸던 그 씨앗, 그 생명..

청우헌수필 2025.05.11

즐거운 병원 길

즐거운 병원 길 세 곳째 병원을 다니고 있다. 병원이든 의원이든 날 치료하는 곳은 나에겐 다 병원이다. 견디기 쉽지 않은 요통을 얻게 되었다. 시시로 통증이 올 때는 참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의욕마저 사라지는 것 같다. 허리가 편치 않으니, 앉고 서고 걷는 일이며, 무얼 들고 내리는 일이며, 몸 굽혀 땅이라도 파고 묻고 해야 할 일 같은 것들을 제대로 해낼 수가 없다. 노화 현상 중의 하나라 하지만, 어쩌랴. 사는 날까지는 불편을 없이 하거나 줄여서 살기라도 해야 할 게 아닌가. 척추센터가 따로 있는 큰 병원이며, 재활 치료를 잘한다는 정형외과에 해를 넘겨 가며 다녔지만, 별 효험을 보지 못했다. 통증을 겪고 있던 어느 날, 차를 타고 가는데 문득 어느 빌딩에 붙은 ‘통증 치료’라는 광..

청우헌수필 2025.04.23

먼 진달래

먼 진달래   꽃 피고 잎 돋는 봄은 왔다. 그렇지만 내 몸은 아직도 봄을 저만치 밀쳐 내두고 있다. 한 해여 전부터 높은 곳, 비탈진 곳은 걷지 말라는 의사의 지시를 받은 터였다. 해거름이면 늘 오르던 산을 못 오르게 된 게 아쉽긴 했지만, 다시 힘찬 걸음으로 오를 날을 위하여 의사의 말을 따라 편한 길로만 걷고 있다.  잠시 혼절하여 쓰러지면서 벽에 부딪혀 척추에 골절이 난 것은 의사의 시술로 치료가 되었지만, 그 후로도 허리는 계속 저리고 아팠다. 시술의 후유증으로 알고 약을 먹으면서 낫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다시 검사를 해보니 그사이에 척주관 협착증이 왔단다.  사는 일, 행하는 일에 몸과 마음을 넓게 가지지 못해 허리도 협착해진 건가. 무릎도 말을 잘 안 들을 때가 있다..

청우헌수필 2025.04.03

어느 날 날씨를 보며

어느 날 날씨를 보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뜬금없이 철 아닌 눈이 내려 창밖의 산야를 하얗게 칠해 놓았다. 어느새 비가 뿌리면서 그 순백 세상의 민낯을 여지없이 드러나게 한다. 검은 흙은 검은 흙이고, 마른 풀은 마른 풀이다.  그런가 싶더니 비는 문득 그치고 우중충한 하늘빛이 맑게 흐르는 물도 흐려 보이게 한다. 그것도 잠시다. 세상을 보고 싶어 몸살이라도 난 듯 구름 사이를 어렵게 비집고 햇살이 살포시 내려앉고 있다.  햇살이 힘겹게 뚫어놓은 구름의 문이 스르르 닫히면서 성근 눈발이 날린다. 눈발이 점차 굵어지더니 급기야는 아기 주먹만 한 크기로 내려앉는다. 한겨울에도 만나기가 쉽지 않은 눈 입자들이다.  언제 그런 눈이 내렸는가 싶다. 다시 하늘 문이 열리면서 맑은 햇살이 산과 들을 어루만진다. ..

청우헌수필 2025.03.23

인디언 십계명

인디언 십계명   책상에 앉아 책을 읽다가 눈에 피로감이 느껴지는 듯해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본다. 살벌하다. 눈이 더 뻑뻑해지는 것 같다. 산이 온통 상처투성이다. 산의 맨살에서 선혈이 낭자하게 흘러내리고 있는 것 같다. 애목 성목 가릴 것 없이 모두 잘려나갔다. 그야말로 인정사정 볼 것이 무차별로 베어버렸다.   그뿐만 아니다. 흉한이 휘두른 흉기에 죽죽 그어진 자상刺傷처럼 비탈을 가로질러 가며 여기저기 파헤쳐져 있다. 베어낸 나무들을 실어내기 위해 파헤친 길 자국이다. 살을 찢는 아수라의 비명이 몸서리치게 들려오고 있는 것 같다. 차라리 눈을 감는다. 창문에 암막이라도 치고 싶다.  크고 작은 것들이 서로 어울려 이루어진 울창한 소나무 숲이었다. 간혹 밤나무며 상수리나무 들도 섞여 있어 밤도 도토리도..

청우헌수필 2025.03.11

협착증을 지고

협착증을 지고   허리가 자꾸 아픈 것은 금이 간 척추를 시술한 후유증인 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척주관 협착증이었다. 시술 의사도 처음엔 그렇게 알았던 것 같다. 협착증 치료를 위해 너덧 주에 한 번씩 아들이 사는 대처 시술 병원을 몇 달을 두고 오르내려야 했다. 노화 탓이라 했다.  통증은 이어지면서 좀처럼 낫지 않았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척추 시술 이후부터 그랬다. 척추 시술과 척주관 협착증이 관계가 있는 건 아니라지만, 척추에 일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이리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그런 가정假定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아내가 저 먼 나라로 가출한 지 너덧 달쯤 되던 겨울 어느 날이었다. 방을 나서다가 갑자기 혼절하고 쓰러졌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일어나려 했으나 등이..

청우헌수필 2025.02.23

역귀성

역귀성   설날이 내일이다. 아내를 만나러 간다. 아이들을 보러 간다. 눈발이 날린다. 차는 날리는 눈발을 다시 날리며 달려나간다. 잘 달리는 차가 오히려 서럽다. 아이들이 전화하여 핸드폰의 내비를 켜보라 했다. 몇 시에 도착할지가 나온다 했다. 내비를 켠다. 아무 시에 도착할 거라고 알려 준다. 그렇게 아이들이 나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말인가.이렇게 글을 쓸 때가 있었다. “……명절이며 무슨 새길 날이면 한촌 늙은 아비 어미를 찾아 달려올 아이들이 기다려진다. 그저 잘 살기만을 바라는 아이들이 의젓하고 정겨운 모습을 하고 안겨 오면 어찌 살갑지 않으랴. 무슨 정성을 들고 올까. 저들의 환한 얼굴이 으뜸 치성이 아니던가.……”(「기다림에 대하여(5)」, 한국수필, 2023.9.)  옛날이야기다. 이..

청우헌수필 2025.02.01

이웃집 할머니 영희, 박-파안

이웃집 할머니 영희, 박-파안   어느 날 밤,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재독 한국인 작곡가를 만났다. 늘 대하는 이웃집 할머니인 줄 알았다. 검은 머리보다 백발이 더 성한 단발머리, 적당히 주름진 얼굴에 짓는 맑은 미소. 우리 동네 할머니들도 즐겨 입을 듯한 스웨터에 조금 헐렁한 바지, 크지 않은 키에 등마저 굽었다. 파킨슨병 때문에 거동이 불편해 보행보조기에 의지해 걷고 있다. 내 사는 마을 어느 할머니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이 할머니의 생애는 범상하지 않았다. 반세기 세월을 독일에 살면서 독일 음악계를 이끌고 있는 한국인 ‘영희, 박-파안 Younghi Pagh-Paan’ 작곡가. 오랜 세월을 남의 나라에서 살아오고 있지만, 잠시도 고국을 잊어 본 적이 없는 우리나라 사람, 그의..

청우헌수필 2025.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