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댑싸리 전설(2)

댑싸리 전설(2)   댑싸리는 올가을에도 더는 붉을 수 없을 것 같은 짙붉은 물이 들었다. 아내는 올해도 그 붉은빛을 볼 수가 없다. 그런 채로 저 붉은빛은 씨를 남기면서 하얗게 바래 갈 것이다.  지난해 초여름 가료를 위해 아이들 집에 가 있던 아내가 당부한 말을 따라 그렇게 심었던 대로 올 초여름에도 어린 댑싸리를 문간 어름에 한 줄로 나란히 심었다. 그 댑싸리가 여름을 보내고 가을이 흘러가는 사이에 연두색에서 초록으로 빛을 바꾸어 가며 무럭무럭 자라다가 이제 그 푸른 고비도 넘어 새빨갛게 물이 들었다.  아내는 자기가 씨 뿌려서 난 모종을 한 줄로 보기 좋게 심어 달라 해놓고 초록으로 제법 북슬북슬한 자태를 이룬 한여름 어느 날, 그 모습을 영영 볼 수 없는 나라로 가버렸다. 지금처럼 가을이 이슥해..

청우헌수필 2024.10.27

세월의 자국을 넘어서

세월의 자국을 넘어서   커다란 거울이 터미널 화장실 입구 옆벽을 가득 채우고 있다. 화장실을 가도 무심히 그냥 지나칠 수도 있고, 차에 오를 시각이 임박하여 급히 가다 보면 눈 돌릴 겨를이 없어 거울을 지나치기도 한다.  어느 날 차 탈 대비로 화장실을 들면서 우연히 거울 쪽을 곁눈질하게 되었다. 허리 구부정한 웬 늙은이 하나가 중절모를 쓰고 한 손에는 가방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가는 모습이 언뜻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 싶어 다시 고개를 돌려보니, 바로 나였다.  낯선 모습이다. 내 언제 저리 허리가 굽어졌으며, 모자 아래로 드러나 있는 머리카락은 왜 저리 허옇게 보이는가. 집에서 반듯하게 서서 거울을 볼 때와는 영 딴판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런 모습이 되어 있었구나.  점점 늙어가는 줄이야 모를 ..

청우헌수필 2024.10.13

댑싸리 전설(1)

댑싸리 전설(1)   담장 옆 연녹색 댑싸리가 무성하다. 크고 작은 것이 섞여 있지만, 이웃하고 있는 밭의 들깨며 고춧대를 바라보며 저도 그만큼 크고 싶었는지 성큼 자라 우거져 있다. 키만 큰 것이 아니라, 줄기에서 올라와 크고 작게 벋어나온 수많은 잔가지가 사방으로 벌어 둥그스름한 모양을 이루기도 했다.  아내가 봤다면 맑은 미소를 지으며 기뻐했을 것이다. 아내는 청초하고도 복슬복슬한 모습을 탐스럽게 여겼던지 댑싸리를 이뻐했다. 지난해 봄, 어디서 구했는지 댑싸리 씨를 가져와 골목 밭 가에 뿌렸다. 따뜻한 햇볕이 내려앉고 때로는 비가 내리기도 하는 사이에 조그만 싹이 흙을 뚫고 솟더니 소록소록 자라 올랐다.  댑싸리 싹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 무렵 아내는 자주 자리에 눕기 시작했다. 병원을 드나들기도 ..

청우헌수필 2024.09.22

쓸쓸함에 대하여

쓸쓸함에 대하여 누군들 쓸쓸할 때가 왜 없을까? 살기에 바빠 쓸쓸할 틈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바쁜 걸 강조해서 하는 말일 것이다. 정녕 쓸쓸할 틈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아무리 바쁜 사람일지라도 문득 쓸쓸함이 밀려올 때가 어찌 없을까.  나는 덜 바빠서 그런지 쓸쓸함을 느낄 때가 더러 있다. 가끔씩 끙끙 앓기도 해야 하는 쓸쓸함에 잠길 때도 없지 않다. 바쁘게 살던 시절이 훌쩍 흘러가 버렸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바쁠 수 있는 기력도 별로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 별로 없는 기력이 가끔은 쓸쓸함을 가져오기도 한다. 어쨌든 이따금 쓸쓸함이 찾아오지만, 그중에서도 혼자 읽기 아까운 시가 있어도 같이 읽거나 들려주면서 마음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을 때 쓸쓸함이 느껴지기도 한..

청우헌수필 2024.09.11

위대한 정령

위대한 정령   밭에 나는 풀이 너무도 성가시다. 베어내도 나고. 뽑아도 나고 깊숙이 캐내어도 또 난다. 난 풀들은 쑥쑥 잘도 자란다. 아침저녁이 다르고 하루하루가 놀랍다. 신기하다. 이 풀들은 누가 씨를 뿌리고 누가 가꾸는 것일까. 돌보는 이가 없다면 이토록 끈질긴 생명력으로 나고 살고 무성해질 수 있을까. 심어서 가꾸려 하는 작물은 뜻대로 잘 나지도 않고 자라지도 않는다. 잘 나라고 씨뿌리기 전에 땅에다 거름을 묻고, 나면 비료를 주고 병 들지 말라고 약을 쳐주고 해도 바라는 대로 키우기는 쉽지 않다. 원하는 결실을 거두기는 더 어렵다. 저 풀을 가꾸는 손길에 비하면 작물을 가꾸는 사람의 손길이며 그 힘이란 보잘것없는 것 같다.  누가 가꾸든 모든 식물에는 꽃이며 열매가 다 피고 열리기 마련이다. 단..

청우헌수필 2024.08.25

기다림에 대하여(6)

기다림에 대하여(6)   오늘 아침에도 내 귀는 현관문 쪽을 향해 있다. 그가 여는 문소리가 곧장 들릴 것 같다. 그는 나의 요양을 도와주는 분이다. 어쩌다 보니 홀로서기가 어렵게 되었다. 곁에 아무도 없는 지경이 된 데다 질고까지 겹쳤다. 관계 기관에서 내 처지를 헤아려 보내준 분이다.  정해진 시각 무렵에 어김없이 문이 열린다. 밤새 안녕을 묻는 인사와 함께 나의 하루에 필요한 일들을 챙겨나간다. 이내 몇 가지 찬이 어우러진 아침상이 들어온다. 텃밭 남새로 마련한 찬과 함께 집에서 보듬어온 정성도 곁들였다.   그가 여는 문소리는 요즘 내 삶의 고즈넉한 동력이고 희망의 시그널이다. 나는 그를 편안하고도 고마운 눈길로 바라지만, 그는 나의 눈길을 여밀 틈도 없이 바쁘다. 길지 않은 시간 안에 내 하루 ..

청우헌수필 2024.08.08

침대 위에서

침대 위에서   침대가 편안하다. 아늑하다. 지난날에는 침대 위에서 자는 잠이 어쩐지 편치를 못하고, 어떨 때는 허리가 저리기도 하던 때가 있었다. 그저 따뜻한 방바닥에 이부자리를 깔고 이리저리 뒹굴며 자는 것이 제일이라 여겼었다.  뭐가 잘못되었던지 기력을 잃고 쓰러지면서 척추에 금이 가는 환란을 당했다. 두어 주일 병원 신세를 지다가 나왔다. 허리가 몹시 아파 마음대로 드러누울 수도 없고, 누우면 일어나기도 힘들었다. 눕고 일어나는 일이 세상을 바꾸고 싶을 만큼 괴로웠다.  먼데 있는 아이들이 알고 사방 알아보고는 전동 침대를 들어오게 해주었다. 리모컨만 작동하면 앉은 사람을 눕게도 해주고, 누운 사람을 일어나게도 해주었다. 누우면 허리가 불편할 때 상체와 하체 부분을 약간씩 들어 올리면 허리가 편안..

청우헌수필 2024.07.28

그냥 둘 걸

그냥 둘 걸   두렁길을 걷다 보니, 쇠뜨기 방동사니 깨풀 괭이밥 개갓냉이 돌나물 등 온갖 풀들이 자욱한 곳에 홀로 우뚝 서서 분홍색 꽃을 뿜어내듯이 피우고 있는 풀꽃 하나가 보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청춘의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진 ‘끈끈이대나물’이라는 풀꽃이었다. 가늘게 뻗어 올린 꽃가지가 마주 난 잎을 사이에 두고 갈래가 지면서 다시 뻗어 올라 다섯 잎의 아기 새끼손가락 같은 꽃잎을 피워내고 있다.들꽃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분홍빛이 시리게 고와 눈에 얼른 들 뿐만 아니라, 키도 다른 풀보다 유달리 커 끌리지 않을 수 없다. 저 꽃이 어찌 저 자리에서 피어났을까. 다른 풀보다 높이 솟기도 했지만, 꽃 빛도 주위의 풀들을 압도하고 있다. 풀씨가 하늘을 날다가 자리를 잘못 짚고 떨어져 피어난 꽃인 ..

청우헌수필 2024.07.10

인간과 사람

인간과 사람   ‘인간’과 ‘사람’은 한뜻을 지닌 같은 말일까? 인간이 곧 사람이고, 사람이 곧 인간일까? 국어사전의 풀이대로라면 그렇게 볼 수도 있다. 사전에서 제일의로 풀이하는 말은 “인간 : 생각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고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 =사람.”, “사람 : “생각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고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 ≒인간”이라 하여 동의어로 새기고 있다.  철학적, 윤리적인 정의를 내리려는 게 아니다. 내 삶에 화두를 두고 그 뜻을 새겨보고 싶을 뿐이다. 어떻게 정의해도, 내가 생각하는 ‘인간’, ‘사람’의 개념일 뿐이다. 그 개념으로 사전의 그 풀이를 인용認容할지라도, 사람은 ‘생각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고’에 방점을 두고 ..

청우헌수필 2024.06.23

어머니 제삿날

어머니 제삿날   설날, 형님이 의논을 좀 하자며 어렵게 운을 뗀다. 나이 자꾸 더해가다 보니 기력들이 전 같지 않아 형수 혼잣손으로 제상을 차리기도 쉽지 않다고 했다. 어머니 제사를 아버지 제사와 합치고, 설은 간소히 쇠고, 추석 차례는 성묘 겸해서 산소에서 모시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속이 아릿하게 저며오는 듯했지만, 다른 말을 하기 어려웠다. 형님 내외 모두 여든을 훨씬 넘어 구순을 바라보고 있는 데다가 일손도 마땅치 않은 처지고, 나도 멀리 떨어져 살아 도움이 되지 못할 지경이어서 묵묵히 들으면서 가는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제수를 진설한 제상 앞에서 강신례에 이어 헌작하며 형님은 나에게 글을 하나 읽으라며 주었다. 아들딸 잘 키워주셔서 고맙다는 말씀에 이어 ‘세상의 변화에 어려움이 많아 제사..

청우헌수필 2024.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