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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진달래

먼 진달래   꽃 피고 잎 돋는 봄은 왔다. 그렇지만 내 몸은 아직도 봄을 저만치 밀쳐 내두고 있다. 한 해여 전부터 높은 곳, 비탈진 곳은 걷지 말라는 의사의 지시를 받은 터였다. 해거름이면 늘 오르던 산을 못 오르게 된 게 아쉽긴 했지만, 다시 힘찬 걸음으로 오를 날을 위하여 의사의 말을 따라 편한 길로만 걷고 있다.  잠시 혼절하여 쓰러지면서 벽에 부딪혀 척추에 골절이 난 것은 의사의 시술로 치료가 되었지만, 그 후로도 허리는 계속 저리고 아팠다. 시술의 후유증으로 알고 약을 먹으면서 낫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다시 검사를 해보니 그사이에 척주관 협착증이 왔단다.  사는 일, 행하는 일에 몸과 마음을 넓게 가지지 못해 허리도 협착해진 건가. 무릎도 말을 잘 안 들을 때가 있다..

청우헌수필 2025.04.03

어느 날 날씨를 보며

어느 날 날씨를 보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뜬금없이 철 아닌 눈이 내려 창밖의 산야를 하얗게 칠해 놓았다. 어느새 비가 뿌리면서 그 순백 세상의 민낯을 여지없이 드러나게 한다. 검은 흙은 검은 흙이고, 마른 풀은 마른 풀이다.  그런가 싶더니 비는 문득 그치고 우중충한 하늘빛이 맑게 흐르는 물도 흐려 보이게 한다. 그것도 잠시다. 세상을 보고 싶어 몸살이라도 난 듯 구름 사이를 어렵게 비집고 햇살이 살포시 내려앉고 있다.  햇살이 힘겹게 뚫어놓은 구름의 문이 스르르 닫히면서 성근 눈발이 날린다. 눈발이 점차 굵어지더니 급기야는 아기 주먹만 한 크기로 내려앉는다. 한겨울에도 만나기가 쉽지 않은 눈 입자들이다.  언제 그런 눈이 내렸는가 싶다. 다시 하늘 문이 열리면서 맑은 햇살이 산과 들을 어루만진다. ..

청우헌수필 2025.03.23

인디언 십계명

인디언 십계명   책상에 앉아 책을 읽다가 눈에 피로감이 느껴지는 듯해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본다. 살벌하다. 눈이 더 뻑뻑해지는 것 같다. 산이 온통 상처투성이다. 산의 맨살에서 선혈이 낭자하게 흘러내리고 있는 것 같다. 애목 성목 가릴 것 없이 모두 잘려나갔다. 그야말로 인정사정 볼 것이 무차별로 베어버렸다.   그뿐만 아니다. 흉한이 휘두른 흉기에 죽죽 그어진 자상刺傷처럼 비탈을 가로질러 가며 여기저기 파헤쳐져 있다. 베어낸 나무들을 실어내기 위해 파헤친 길 자국이다. 살을 찢는 아수라의 비명이 몸서리치게 들려오고 있는 것 같다. 차라리 눈을 감는다. 창문에 암막이라도 치고 싶다.  크고 작은 것들이 서로 어울려 이루어진 울창한 소나무 숲이었다. 간혹 밤나무며 상수리나무 들도 섞여 있어 밤도 도토리도..

청우헌수필 2025.03.11

협착증을 지고

협착증을 지고   허리가 자꾸 아픈 것은 금이 간 척추를 시술한 후유증인 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척주관 협착증이었다. 시술 의사도 처음엔 그렇게 알았던 것 같다. 협착증 치료를 위해 너덧 주에 한 번씩 아들이 사는 대처 시술 병원을 몇 달을 두고 오르내려야 했다. 노화 탓이라 했다.  통증은 이어지면서 좀처럼 낫지 않았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척추 시술 이후부터 그랬다. 척추 시술과 척주관 협착증이 관계가 있는 건 아니라지만, 척추에 일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이리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그런 가정假定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아내가 저 먼 나라로 가출한 지 너덧 달쯤 되던 겨울 어느 날이었다. 방을 나서다가 갑자기 혼절하고 쓰러졌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일어나려 했으나 등이..

청우헌수필 2025.02.23

역귀성

역귀성   설날이 내일이다. 아내를 만나러 간다. 아이들을 보러 간다. 눈발이 날린다. 차는 날리는 눈발을 다시 날리며 달려나간다. 잘 달리는 차가 오히려 서럽다. 아이들이 전화하여 핸드폰의 내비를 켜보라 했다. 몇 시에 도착할지가 나온다 했다. 내비를 켠다. 아무 시에 도착할 거라고 알려 준다. 그렇게 아이들이 나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말인가.이렇게 글을 쓸 때가 있었다. “……명절이며 무슨 새길 날이면 한촌 늙은 아비 어미를 찾아 달려올 아이들이 기다려진다. 그저 잘 살기만을 바라는 아이들이 의젓하고 정겨운 모습을 하고 안겨 오면 어찌 살갑지 않으랴. 무슨 정성을 들고 올까. 저들의 환한 얼굴이 으뜸 치성이 아니던가.……”(「기다림에 대하여(5)」, 한국수필, 2023.9.)  옛날이야기다. 이..

청우헌수필 2025.02.01

이웃집 할머니 영희, 박-파안

이웃집 할머니 영희, 박-파안   어느 날 밤,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재독 한국인 작곡가를 만났다. 늘 대하는 이웃집 할머니인 줄 알았다. 검은 머리보다 백발이 더 성한 단발머리, 적당히 주름진 얼굴에 짓는 맑은 미소. 우리 동네 할머니들도 즐겨 입을 듯한 스웨터에 조금 헐렁한 바지, 크지 않은 키에 등마저 굽었다. 파킨슨병 때문에 거동이 불편해 보행보조기에 의지해 걷고 있다. 내 사는 마을 어느 할머니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이 할머니의 생애는 범상하지 않았다. 반세기 세월을 독일에 살면서 독일 음악계를 이끌고 있는 한국인 ‘영희, 박-파안 Younghi Pagh-Paan’ 작곡가. 오랜 세월을 남의 나라에서 살아오고 있지만, 잠시도 고국을 잊어 본 적이 없는 우리나라 사람, 그의..

청우헌수필 2025.01.14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한 해도 얼마 남지 않은 십이월 어느 날, 연간으로 펴내는 회지 출판기념회 겸 송년회가 열렸다. 회원들이 한 해 동안 수필 공부를 하면서 써온 글을 모아 내는 책이다. 그 성과의 보람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면서, 그렇게 보낸 한 해의 의의를 기려보자며 마련하는 자리다.  회무를 맡은 몇 사람은 그 행사를 어떻게 재미있고도 뜻깊게 꾸며 볼까 하고 궁리를 거듭하고 있었다. 드디어 그날 그 시간이 왔다. 사무국장은 행사 시작 전에 회원들에게 주머니 하나를 내밀면서, 까닭을 묻지 말고 주머니 속 접힌 쪽지 하나 집어서 펴보지도 말고 호주머니 속에 잘 넣어두라 했다. 펴보지 말라니 더 궁금했다.  의식이 진행되었다. 축시 낭송에 이어, 회장이 회지 발간 의의와 그 성과를 자축하는 인..

청우헌수필 2025.01.03

창밖의 벌목

창밖의 벌목   둔탁하면서도 날이 선 기계톱 소리가 마을 안까지 요란하게 들려온다. 마을 남쪽 산에서 나무를 베고 있는 소리다. 그 산 앞에 작은 산이 하나 더 있어 함께 골짜기를 이루고 있는데, 산의 벌목은 산허리 넘게 올라와 앞산의 능선을 올라섰다. 산마루에 이르도록 모두 베어낼 기세다. 나무를 베어내는 잔인한 톱질 소리와 함께 처절한 산의 비명이 마을을 흔들고 있다. 마치 동물이 제 가죽이 벗겨질 때 지르는 비명 같은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 소리는 나에게 더욱 참혹하게 들려오는 것 같다. 저 산을 정면으로 비추어 주고 있는 내 방의 창이 그 소리를 적나라하게 전해주고 있다. 굴착기는 산허리를 가로질러 그 허리를 꺾을 듯이 파내고 있다. 베어낸 통나무를 쌓기 위한 자리며 실어낼 길을 만들려는 ..

청우헌수필 2024.12.26

전동 스쿠터를 타다

전동 스쿠터를 타다.   내 힘을 별로 들이지 않고 내 뜻대로 길을 달려 보기는 평생 처음이다. 지금까지는 가쁜 숨에 땀을 닦아가며 달리거나, 달려주는 기기를 위해 상당한 비용을 치르면서 달려야 했지만, 지금 나는 힘도 비용도 아주 적게 들이면서 내 뜻을 따라서 가는 길을 달리고 있다.  흘러가는 세월이 내 땀으로 내달을 수 있는 길을 거두어갔다. 한 발 한 발 디뎌 걸을 수 있는 길을 내어주는 것만으로 만족해하고 감사해하며 걸어야 할 처지가 되었다. 그것도 힘닿는 데까지다. 그 한계를 넘어서면 다른 것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  가장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자전거다. 자전거는 걷는 것보다는 적은 힘으로, 걸어서 갈 때보다는 더 먼 길을 갈 수 있게 주는 이기다. 그렇지만 자전거도 내 힘을 적지 ..

청우헌수필 2024.12.11

수필이 고맙다

수필이 고맙다   수필이 고맙다. 수필로 인연한 사람들이 고맙다.  내가 사랑하는 수필로 좋은 글을 남기지도 못하고, 빛나는 이름도 얻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내 속에 흐르고 있는 문학의 피는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학창 시절에는 시에 관심을 가지고 교과서 읽기보다는 시집 읽기를 좋아하고, 시를 좋아하는 마음이 시를 쓰게 만들었다. 시를 열심히 쓰면서 문예반장으로 활동도 하고, 문학 동아리 활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로 나왔다. 바쁘게 사회생활을 하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시는 나에게서 시들해져 갔다. 모든 걸 비유와 상징으로 응축해야 하는 시에는 별 재주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글에 대한 향수는 가시지 않았던지, 몇몇 지면에 잡문을 가끔씩 내밀곤 했었다. 상사며 상부 기관으..

청우헌수필 2024.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