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당신 함께 가는 길

이청산 2020. 2. 3. 11:39

당신 함께 가는 길

 


처음으로 노랫말을 써보았다. 대한가수협회 회원으로 가수 활동을 하고 있는 윤 여사의 청을 받아서다. 윤 여사는 중앙 무대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노래할 기회는 못 얻었지만, 여러 가지 행사며 노래 봉사활동을 통해 지역에서는 널리 알려진 가수다.

가수로 활동해온 지도 여러 해가 되었건만, 아직 자기 노래를 갖지 못했다며 나에게 노랫말을 하나 만들어 달라 했다. 수필만 써온 내가 어찌 노랫말을 지을 수 있겠느냐며 사양했지만, 나만큼 자기를 잘 알고 있는 사람도 없다며 볼 때마다 부탁했다.

윤 여사와 나는, 시 낭송을 좋아하여 십 년 전쯤부터 낭송 모임을 함께하면서 알게 되었다. 어느 도서관에 나의 수필 강좌가 개설되었을 때 자기도 수필 공부를 하고 싶다 하여 함께 공부하고 있다. 그 세월 사이의 대화 속에서 윤 여사는 이따금 자기의 지나온 생애를 나에게 풀어놓기도 했다.

윤 여사는 시낭송지도자자격증을 비롯하여 수지침, 레크리에이션강사, 웃음치료사, 실버건강운동지도사, 시니어여가문화지도사, 독거노인생활관리사 등 십여 가지가 넘는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얼마나 의욕과 활기가 넘치게 살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일이지만, 윤 여사가 살아온 이력을 보면 모든 일에 활발할 수 있을 만큼 그리 순탄하지는 못했다.

기억도 잘 못 할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넉넉지 못한 환경 속에서 학교에도 많이 못 다니고, 일찍부터 온갖 직업 전선을 드나들었다. 그 직업들이 어떤 시련이라도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의지를 준 것 같았다. 그런 젊은 날이 준 선물이었을까, 믿음직스럽고 이해심 많은 사람을 만나 아들딸 사 남매를 두면서 다복하게 살았다. 자기를 봐봐~!”라 나직이 불러주는 남편을 볼 때면, 세상의 어떤 이도 부럽지 않을 것 같았다. ‘봐봐자기를 봐달라는 뜻이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에게 폐암 말기라는 청천벽력 진단과 함께 6개월 시한부 생명 선고가 떨어졌다. 절망할 겨를도 없이 어떻게 하든 고치고야 말리라 입술을 깨물고, 화장품 외판으로 생계를 꾸리며 백방으로 뛰었다. 좋은 약, 좋은 병원을 찾는 것은 물론, 한시도 놓지 않고 치성으로 병시중하는 사이에 6개월이 일 년이 되고, 삼 년, 오 년도 무사히 넘어갔다. 이 소문이 널리 퍼져 나가 어느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그 간병기를 순애보처럼 방송하기도 했다.

남편은 발병한 지 십 년 만에 윤 여사의 손을 놓았다. 그간의 살아온 내력들이 서러운 응어리 되어 가슴을 쳤지만, 좌절은 그녀의 몫이 아니었다. 생계를 일구어나가는 일과 더불어 틈틈이 마른 목을 틔우기 위한 투지를 불사르며 자기도 남도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일들을 섭렵해 나갔다. 그것만이 남편과의 행복을 이어나갈 수 있는 일이라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의 수필 공부 시간에 이런 글을 써냈다.

오늘도 남편의 휴대폰이 날짜와 시간을 알려 준다. 남편이 내 곁을 떠난 지 10여 년이 되었어도 아직도 눈물이 난다. 그래서 남편이 쓰던 휴대폰을 늘 머리맡에 두고 잔다. 배터리가 다 닳으면 다시 충전해 놓는다. …… 충전만 하면 남편은 살아난다. 그 남편과 지금도 알콩달콩 살고 있다.”

그랬다. 윤 여사는 슬픔을 모르는 게 아니라, 이겨내며 살았다. 그 힘은, 남편에게 있었다. 남편이 두고 간 휴대폰을 아직도 충전하는 마음속에 있었다. 시 낭송이며, 노래, 봉사활동 등으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재었다. 그녀를 보면 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의 생애가 떠오르기도 하고, 안동 원이 엄마의 사백여 년 전 편지가 뇌어지기도 한다.

청을 받은 지 한 해도 넘는 노랫말이 이제야 어렴풋이 보이는 듯했다. 그녀가 살아온 세월과 살아갈 세월을 오롯이 담아 볼 수는 없을까. 며칠 궁리 끝에 노랫말을 써나갔다. ‘당신 함께 가는 길이라는 제목이 먼저 떠올랐다.

 

구름처럼 살아온 길 서리서리 사연 많아도

당신과 손잡고 함께 온 길이라 행복했어요

긴긴 세월 길도 눈앞인 듯 가깝기만 했던 길

고마워요세월 길 모두 행복이 되게 하는 당신

 

바람처럼 살아갈 길 굽이굽이 멀고 험해도

당신과 손잡고 가붓이 정답게 갈 수 있다면

먼먼 인생길도 꽃보라 사랑이 피어나는 길

고마워요, 인생길 모두 꽃길이 되게 하는 당신

 

1절 첫머리에 구름을 말한 것은, 구름에는 흰 구름 먹구름도 있고, 꽃구름 매지구름도 있고, 뭉게구름 소나기구름도 있음을 떠올려서다. 윤 여사의 삶 속에서 겪어온 희로애락을 응축하는 소재로 삼았다. 모든 것을 포근하게 안아주는 당신이 있기에 그 사연 많은 세월도 하루같이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그녀의 삶을 새겨보려 했다.

2절의 바람이란 형체가 없어 볼 수는 없지만, 안을 수 있고 안길 수도 있고, 불리어올 수 있고 불리어갈 수도 있는 그 무엇, 말하자면 지금 이 세상에 없는 남편과의 사랑을 그려 보려 한 것이다. 저승 남편이 이승 아내의 앞길을 꽃길이 되게 해주기를 비는 마음을 담았다.

처음에는 얼떨해 하던 윤 여사도 그 뜻을 헤아리고는 자기의 심정과 처지가 고스란히 새겨진 것 같다며 감격스러워했다. 마침, 낭송 회원 중에 실용음악을 전공하고 대중음악가로 활동하며 곡을 쓰는 분이 있어 작곡을 부탁했다. 골똘한 정성을 기울인 끝에 노래가 되어 나왔다.

시 낭송 정기회가 있던 날, 작곡자 스스로 기타를 치며 부르는 노래로 작사 작곡 발표를 했다. 가볍지도 않고 무겁지도 않았다.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았다. 노랫말, 그 말 하나하나의 정감과 이미지에 맞는 가락을 붙이려 애쓴 것 같았다.

노래가 끝났을 때, 회원들의 탄성과 갈채가 쏟아졌다. 가사도 곡도 모두 가슴을 울컥하게 한다 했다. 윤 여사의 눈가에 소곳한 이슬이 맺혔다. 앞으로 자기의 삶을 자기 노래로 부를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떨린다고 했다. 작곡자는 편곡도 하고 반주도 붙여 무대에 올릴 날을 기대해 달라 했다. 회원들은 축복의 박수를 다시 모았다.

노래가 세상에 나오던 날, 윤 여사와 나는 회심 어린 눈빛만 주고받으며 말없이 헤어졌다. 감회에 찬 가슴속에 말이 들어앉을 자리가 없을 것 같았다.

윤 여사도 나도 이 노래로 무대에 선 가수의 모습을 조용히 그리기만 했다.(202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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