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바이러스의 파고(波高)를 넘어

이청산 2020. 3. 4. 14:46

바이러스의 파고(波高)를 넘어

 


성난 파도처럼 몰아치고 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코로나바이러스라는 것이 무슨 저주처럼 세상을 덮쳐오고 있다. 하루에도 수백 명씩 연일 많은 사람이 쓰러지고, 쓰러져 죽어 나가고 있다. 이러다가는 온 천지를 뒤엎을 팬데믹(pandemic 세계적 대유행)으로 가지 않을까 염려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공포스런 바이러스의 발원지가 된 나라며, 그곳에서 번져오는 병원균을 막아내지도 못하고 방역이며 의료 행정을 갈팡질팡하고 있는 나라의 책임자들이며, 병의 창궐에 빌미를 제공한 집단을 향한 원망과 분노를 참아내기가 어렵지만, 그 분노도 무섭게 몰려오는 있는 병균 앞에서는 무력해지는 것이 참담할 뿐이다.

쓰러진 사람들이 가야 할 병원이 만원이 되어버렸다. 병실에 누워야 할 사람이 누울 곳을 얻지 못해 헤매다가 혼란스런 세상에 원망을 묻은 채 스러져 가기도 한다. 감염자가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지역의 책임자는 공공 기관을 이용한 치료 자리라도 마련해 달라고 목메어 호소하고 있다.

감염 방지에 필수적이라고 하는 마스크도 제대로 공급을 못 해주고 있는 정책 담당자들은 안절부절 우왕좌왕하며, 손 씻기를 비롯한 예방 수칙 준수를 진군의 나팔처럼 외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사회적 거리 두기(social distancing)’가 긴급하다며 사람과 사람끼리 대면하지 말기를 묘방으로 외치고 있다.

옛날에도 전염병이 횡행하는 일은 없지 않았다. 조선 시대 어느 시기에 수십만 명이 죽어 나가는 전염병이 온 나라를 덮쳤는데, 마땅한 치료 방법을 알지 못하던 그때 조정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여제(癘祭)를 지내는 일뿐이었다고 한다. 죽은 사람의 영혼인 여귀(癘鬼)에게 제사 지내어 좋은 곳에 가기를 빌기만 했다고 한다. 제사라도 지내주는 것이 차라리 위안이라 할까.

위정자들은 국민을 힘들게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힘들게 하고도 그렇게 한 줄을 모르는 사람들만 바라보고 있을 수만 없어, 뜻있는 많은 사람들이 쓰러진 이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을 모으고 있다. 의료인들은 고유의 일손을 놓고 바이러스로 몸부림치고 있는 병실로 속속 모여들고 있다고 한다. 그 마음, 그 뜻이 큰 힘이 되어 언젠가는 바이러스의 파고를 넘어설 수 있기를 간절히 빌 뿐이다.

바이러스는 날로 기승을 더해 가고 있다. 기세를 숙이지 않고 있는 바이러스에 못 이기어 각급 학교의 개학도 몇 주일이나 늦춘다고 한다. 학교뿐만 아니다. 모든 사회 행사를 중지하고 사적인 모임도 금해 줄 것을 강권하고 있다. 서로 모여 바이러스가 번져나지 못하게 하는 일을 최선의 정책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쓰러진 사람들의 고통이야 이루 말할 수 있는 일이지만, 모두 그 아비규환에서 어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기를 비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격리 아닌 격리 상태에서 바이러스의 노도(怒濤)를 지켜보는 것 또한 고통스럽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집 안에 가만하게 있는 일밖에 없다. 거리를 나다기에도, 누구를 만나기에도, 차를 타기도 겁이 나니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당국에서도 사람 사이의 거리를 단단히 두라 하지 않는가. 산 사람이 좁은 공간에 가만히만 있으려니 여간 갑갑한 노릇이 아니다.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도 없고, 앞일을 기약할 수도 없는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우울증이며 공황장애에라도 걸릴 것만 같다. 집합을 막기 위해 모든 마을 경로당도 폐쇄되었는데, 홀로 사는 노인들이 몰래 들어가 노는 일이 있다고 한다. 전염병보다는 외로움이 더 두렵기 때문은 아닐까?

이때, “사람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작은 방에 혼자 머무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라는 파스칼의 말이라도 상기해야 할까. 불교에서는 밖에서 잠겨진 작은 방에서 오직 화두 하나를 들고 수행 정진하는 수행법이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아무나 파스칼이 되고 불법 수행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1313~1375)데카메론(Decameron)을 떠올린다. 14세기 중반 페스트(흑사병)’가 전 유럽을 강타하던 시기에, 피렌체 시민의 목숨 4분의 3을 앗아간 끔찍한 사태를 겪은 작자가 일곱 여인과 세 남자가 근교로 피신해 지내면서 한 사람이 하루 한 가지씩 열흘 동안 100개 이야기를 하는 내용으로 엮은 소설이다.

보카치오는 이 책을 쓴 이유를 사람은 아무리 고통스러운 일을 겪더라도 즐거운 일을 찾기 마련이다. 그보다 더 효과적인 약은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는데, 후세 사람들은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꿈과 행복을 보여주는 데카메론이 전염병 확산보다 더 걱정한 건 인간성의 상실이라는 평가를 하고 있다.

그렇다.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도, 그 병을 지켜보며 암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도 지녀야 할 것은 꿈과 행복에 대한 믿음이고, 잃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성이다. 마스크를 사재기할 것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들을 쟁일 일이다. 마음만으로라도 즐거운 일을 찾아볼 일이다.

병이 더 퍼지지 않게 지켜야 할 일을 지키면서, 서로를 위해 빌어주고 위로하면서 바이러스의 노도(怒濤)를 힘차게, 슬기롭게 넘어서기를 애쓸 일이다. 나라의 책임자들이 제 노릇을 못 하고 있을수록 우리는 더욱 따뜻해져야 한다.

성난 파도, 그 파고를 넘어 희망의 푸른 파도가 밀려올 때까지, 사랑의 잔물결이 세상을 어루만질 때까지-.(20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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