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아버지의 전기 문집을 펴내며

이청산 2018. 9. 8. 12:42

아버지의 전기 문집을 펴내며

 

아버지의 생애를 정리한 문집을 펴냈다아버지의 일생을 담은 글 뒤에 가족사를 이야기한 수필 몇 편을 함께 실었다원고를 쓴 것은 아버지가 영면에 드신 지 십 주기가 되어 갈 무렵이었다원고는 어머니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어머니는 이십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지만그 때는 성성한 세월을 안으신 채로 눈물어린 이야기를 들려주고 계셨다.

아버지가 세상을 살고 계실 때는 그런 글을 쓸 생각을 못했다아버지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처럼 그렇게 살고 계실 거라고만 여겼다아니그런 상념조차 없었는지도 모른다아버지가 돌아가시고내 사는 이력이 쌓이면서 세상의 풍진을 겪어가는 사이에 숱한 난관을 투지로 헤쳐 오셨던 아버지의 생애가 돌아보일 때가 많았다.

아버지는 경술국치(庚戌國恥, 1910) 이듬해 태어나셨다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공간의 혼란상이며 6.25전쟁과 더불어 숨 가쁘게 요동쳐온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오롯이 겪으며 10.26사태(대통령 서거, 1979)를 만 하루 지난 다음날 새벽에 운명하시기까지 집안의 갖은 골곡과 함께 참담한 시대고(時代苦)를 온몸으로 부딪쳐내며 살아오셨다.

아버지는 독립운동가도 아니고역사가 새겨줄 사회활동을 하신 것도 아니다이 땅의 평범한 백성으로한 집안의 아들로한 가정의 가장으로 살아오셨을 뿐이지만아버지의 평생에는 늘 시대의 그림자가 따라다녔고그것은 아버지에게 갖은 시련과 고난을 안겨주었다그 시대의 사람들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겪었을 시련들이 아버지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15세 때 기차가 다니는 곳으로 성취(成娶)하는 바람에 신문물에 눈을 떠 일본으로 만주로 거친 발걸음을 들놓으셔야 했고그 걸음은 곧 아버지의 꿈과 삶을 찾아가는 고행의 발길이었다해방 공간 속에서는 <10.1사건>의 여파로 참혹한 고초를 겪으시다가이어서 발발한 동족상잔 전쟁으로 피란살이의 참혹한 고난을 안으셔야 했고그 세월과 더불어 얻은 신양(身恙)으로 말할 수 없는 신고를 겪으시기도 했다.

아버지는 그 어려움에 결코 굴하지 않았다기꺼이 도전하며 투지를 다하여 헤쳐 나가셨다그리고 아버지가 못 이룬 꿈을 아들로 하여금 이룰 수 있게 하기 위해 만난을 무릅쓰셨다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뒤 어느 날어머니에게 아버지의 생애를 물었다어머니는 함께 겪어온 풍파의 세월을 눈물겨워도 하시면서 곡진한 사연으로 풀어냈다.

아버지가 삶의 준령(峻嶺)을 넘으실 때마다 어머니인들 고초가 왜 없었을까아버지의 고난과 고초는 곧 어머니의 것이기도 했다어쩌면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더 모진 삶을 살아오셨는지도 모른다우리 자식들은 아버지 어머니의 그 고초를 머금으며 나고 크고 살아왔다어느 집인들 그렇지 않으랴만원고에 담긴 두 분의 생애를 보면 그 고초가 여느 집보다 더욱 컸을 것 같다.

그 절절한 사연들을 머릿속에만 넣어둘 수 없어 원고지에 적었다아버지를 그리워하며 그 원고를 고이 품고 있는 사이에 30여 년이 어느새 흘러갔다그 세월 속에서 어머니는 한()도 남았을 세상을 떠나시고,나도 굽이진 삶의 곡절과 사연들을 넘어 한 생애를 마감하고 노을빛과 더불어 살게 되기에 이르렀다.

그 원고를 이대로 껴안고만 있다가는 두 분 삶의 내력이 그대로 묻혀버리고 말 것 같았다생명을 존재하게 한 생명의 사연들을 무심한 망각 속에 묻어버리는 건 두려운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늦으나마 실물적인 기록으로 남기기로 마음먹었다피붙이들에게만이라도 전해주어 부모님에게서 받은 삶이 나를 거쳐 어떻게 저들에게로 갔는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동기간이며 아이들과 함께 갈라볼 수 있을 만큼만 만들었다이 책을 아이들에게 주려는 것은 나의 오늘을 저들에게 주는 것이고저들의 오늘을 다시 새겨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임은 물론이다오늘이란 하고많은 어제가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오늘은 어제의 내일이었고내일의 어제가 될 것이 아닌가어제 없는 오늘이 어찌 있을 수 있으며오늘 없는 내일이 어떻게 올 수 있는가.

추석이 며칠 남지 않았다아이들이 아비 어미를 찾아 올 것이다이 책을 안겨주면 아이는 거기에 저의 오늘과 내일이 담겨 있음을 알까이 책을 안겨주는 아비의 마음을 알까비록 모른다 할지라도 나는 저들의 어제였고 저들이 맞고 있는 오늘의 근거임은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다.

조용히 새겨보면 민연(憫然)한 일이기도 하다저들의 오늘을 위해 나는 무엇을 했던가아버지 어머니의 가족을 위한 파란으로 굽이진 삶을 돌아보면나는 저들을 위해 그리 노심한 일이 없는 것 같다이때 반면교사(反面敎師)’라는 말이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조그만 위안이다.

오는 추석 차례 상에는 아버지 어머니를 그리는 문집을 올리고 간곡한 배례(拜禮)를 드려야겠다어떤 심사로 내려다보실까가난한 나의 오늘이 또 흘러가고 있다어제의 내일이 또 어제가 될 내일로 가고 있다.(2018.9.2. 양력 생일날에)

                                                                      

 


'청우헌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풀꽃의 천적  (0) 2018.09.30
살아보지 못한 과거 속으로  (0) 2018.09.23
나의 한촌살이(2)  (0) 2018.08.30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1)  (0) 2018.07.31
낙망의 길이 희망의 길로  (0) 2018.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