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길이 어떤 이들에게는 희열의 길이 될지 몰라도 나에게는 슬픔의 길, 낙망의 길이 되었다. 이 슬픔과 낙망이 기쁨과 희망의 길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나는 이 한촌을 떠나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까지 했다. 내가 늘 아침 산책길로 걷는 그 강둑은 온갖 풀들이 우거진 풀숲 길이었다. 그 풀들을 헤치고 다니려면 힘도 들고 성가시기도 했다. 아침으로는 풀잎에 맺힌 이슬에 바짓가랑이가 다 젖기도 하고, 도깨비바늘 같은 마른 풀씨가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고, 덩굴풀들은 발목을 감아 잡기도 했다. 그래도 아름다운 길이었다. 풀숲이 형형하게 우거져 있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웠지만, 철이면 철마다 노랗고 붉고 파랗고 하얀 풀꽃들이 앙증맞고 의젓하고 귀엽고 음전한 형형색색의 모습으로 피어나 때로는 기쁨과 환희를 주고, 때로는 위로와 안식을 주었다. 사람들은 그 즐거움과 위안보다는 편리한 길을 바랐다. 그 사람들의 바람대로 풀꽃들은 무참히 짓이겨지고, 검붉은 맨살이 드러난 흙 위로 회반죽이 덮였다. 걷기에 아주 편한 길이 되었다. 바짓가랑이를 적시는 이슬도, 발목을 감는 넝쿨도 사라지게 되었다. 길섶은 폐허였다. 허무였다. 나무는 뿌리째 뽑혀 허옇게 드러눕고 풀은 흔적도 없이 뭉개져 흙 속으로 들어버렸다. 잔돌이며 자갈돌들이 전장의 주검마냥 흙과 뒤섞여 나뒹굴었다. 온갖 꽃들이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반겨주던 꽃길은 아득한 전설 속의 일 같았다. 그 전설 속으로 아린 그리움이 는개처럼 내려앉는다. 그 길에 회반죽을 부은 사람들이 길 양쪽으로 흙을 그러모아 붙였다.길 덮기의 마무리 순서라 했다. 그 때가 모든 풀들이 돋으려고 하는 사월 초순의 새봄이었다. 메마른 길에 흙을 붙여주는 건 좋지만 흙보다 돌이 더 많았다. 어디에 숨어 있던 돌들이 이리 많이 나왔을까. 이 돌 틈에서도 풀이 돋고 꽃이 필 수 있을까. 아침 산책길을 나서며 쇠갈고리 하나를 들고 나섰다. 늘 하던 대로 마을 숲에서 운동을 하고 강둑을 걸었다. 흙을 붙여 놓은 회반죽 길섶에 섰다. 갈고리로 돌을 빼내어 둑 아래로 굴러 내리기 시작했다. 큰 돌은 큰 돌대로 들어내기에 힘이 들고, 작은 돌은 작은 돌대로 손이 많이 가서 힘이 들었다. 바쁘다. 곧 풀이 돋을 철인데-. 며칠을 두고 나의 일은 계속되었다. 지나가던 누가 물었다. 거기다가 무얼 심으려느냐고? 소이부답, 말한들 마음을 알아주기나 할까. 주일여를 매일 아침 그렇게 하고나니 웬만한 돌들은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이‘잔인한 달’ 사월에 풀이 돋아줄까. 꽃이 피어나줄까. 초조한 시간들이 흘러 오월에 들어섰다. 신기했다. 풀씨들이 어디 있다가 저리 날아온 것일까. 무슨 힘으로 온통 폐허가 된 땅에서도,마르고 거친 흙 속에서도 풀이 돋는 것일까.생명력이 제일 강한 것이 쑥인 것 같다. 쑥이 먼저 파릇 솟는가 싶더니 명아주가 애잎을 내밀었다. 내 땀이 조금은 힘을 발휘한 건가 싶어 뿌듯한 미소가 명치에서 곰실거리는 것 같았다. 동글납작한 잎이 가녀린 넝쿨을 타고 펴나가는데, 붉게 피어날 ‘둥근잎유홍초’임에 틀림없다. 작은 나팔 같은 앙증한 꽃잎이 눈에 아른거린다. 억세게 쑥쑥 솟는 것은 갈대다. 강을 옆에 두고 있다고 자리를 놓치지 않는다. 억센 넝쿨을 뻗는 놈이 있다. 칡이다. 온갖 것들의 목을 죄는 저걸 얼마나 미워했던가. 그래도 반갑다. 지나노라면 슬며시 옷깃을 잡아끌던 환삼덩굴도 애기가 조막손을 내밀 듯 잎 덩굴을 뻗어나가고 있다. 곡식은 애써 가꾸려 해도 바라는 대로 잘 자라주지 않고, 게다가 잠시 돌보지 않으면 갖은 병충해로 속 태우기 십상인데, 저것들은 누가 심어주지 않고, 돌보아주지 않아도 저 척박한 땅을 뚫고 솟아나다니, 저 풀들을 저렇게 빚어내는 힘의 원천이 궁금하고 경이로울 뿐이다. 그렇게 봄이 흘러가고 햇살 따가운 여름이 되었다. 푸른 잎 무성한 아침 산책길을 걷는다. 유홍초. 도깨비바늘, 달개비, 푸른 갈대, 수크령, 강아지풀, 명아주, 한삼덩굴, 쑥대, 소리쟁이가 서로 어우르며 자욱이 우거지는데 간혹 개망초가 섞여 하얀 꽃잎을 내밀고 있고, 며느리밑씻개 꽃도 연지 찍은 얼굴을 살짝 내민다. 익모초며 비수리는 언제 저리 우거졌는가. 달맞이꽃대에 박주가리가 기어오르려 하고, 노란 새삼 넝쿨이 아무도 못 가룰 칡넝쿨을 감으려 한다. 조그맣고 하얀 꽃을 송송 단 큰까치수염이 무엇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 다닥냉이는 벌써 말라가는데, 저 노란 짚신나물은 어디 있다가 이제 나왔는가.아는 풀만 이름을 불러보아도 이리 숱한데, 미처 통성명을 못한 저들까지 치면 그 수효가 얼마일까. 나의 여름은 위안의 계절로 왔다. 절망의 팍팍한 회반죽 길의 저 무성한 길섶이 희망을 다시 심어주고, 기쁨의 길이 되게 해주었다. 저 회반죽이 없을 때의 길 같으랴만, 그래도 낙망과 슬픔이 조금은 다독여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길 양 옆을 무성히 누벼주고 있는 저 수풀들이 있어 나의 한촌은 그래도 살만한 곳이라 여기고 싶어진다. 요즈음 세상의 일이란 어느 것, 어떤 일 할 것 없이 모두 ‘편리’를 향해서만 치닫고 있다. 인공지능이란 것도, 그 무슨 몇 차 혁명이랄지 하는 것도 기계가 인간에게 베풀어줄 ‘편리’를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그 편리가 과연 인간의 행복을 바르게 지켜주고, 품성을 옳게 건사해줄 것인가. 그런 것들이 저 풀꽃 하나보다 나를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염두에 굳이 얹고 싶지 않다.♣(2018.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