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근 시인의 ‘어쩌다 나는’을 읽는다. 김광석이 노래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의 노랫말을 쓴 시인, ‘세상이 아름다워서, 슬퍼서, 외로워서, 부끄러워서 시도 때도 없이 울었고, 낮밤 가리지 않고 술을 마셨다는 시인’의 시다. 이 시가 근원적인 자아성찰의 시일지, 애상적인 연시일지, 또 다른 정념을 담은 시일지는 시인 자신만이 알 수 있겠지만, 이 시를 내가 음미하고 싶은 대로 읽어본다.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명랑한 햇빛 속에서도 눈물이 나는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깊은 바람결 안에서도 앞섶이 마르지 않는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무수한 슬픔 안에서 당신 이름 씻으며 사는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가득 찬 목숨 안에서 당신 하나 여의며 사는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삶 이토록 아무것도 아닌 건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어디로든 아낌없이 소멸해버리고 싶은 건가// -시집 『어떻게든 이별』에서 이 시를 읽다가 보면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라는 구절에서 ‘당신’의 자리에 다른 어휘를 넣어서 음미해 보고 싶어진다. 사람은 물론 나무며 풀꽃 같은 사물을 넣어도 좋겠지만, 시를 쓰는 사람은 ‘시’를, 수필을 쓰는 사람은 ‘수필’을 넣어서 읽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쩌다 나는 시(수필)가 좋아서/ 이 명랑한 햇빛 속에서도 눈물이 나는가// 어쩌다 나는 시(수필)가 좋아서/ 이 깊은 바람결 안에서도 앞섶이 마르지 않는가 ‘시(수필)’를 좋아하는데, 왜 눈물이 나는 걸까. 깊은 바람결에도 앞섶이 마르지 않을 만큼 많은 눈물을 흘려야 하는 걸까. 그 눈물은 곧 ‘대상(소재)’에 대한 감동이다.모든 예술작품의 창작이 다 그러하겠지만 시(수필)를 쓰자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 대상이다. ‘대상’이 곧 ‘시(수필)’라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지만, 물론 대상이 곧 시가 되고 수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대상이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한 ‘감동’이 있어야 하고 형상화 과정이 있어야 한다. 감동을 느끼지 못할 때는 ‘대상’이 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형상화는 더욱 이루어질 수 없다. 대상을 보면서 많은 눈물(감동)을 흘릴 수 있을 때 감동적인 작품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다음 구절을 본다.
“어쩌다 나는 시(수필)가 좋아서/ 이 무수한 슬픔 안에서 당신 이름 씻으며 사는가// 어쩌다 나는 시(수필)가 좋아서/ 이 가득 찬 목숨 안에서 당신 하나 여의며 사는가” 슬픔으로 씻는 이름이란 얼마나 애틋하고도 달콤한 이름일까. 얼마나 아리고도 가슴 깊숙이 새겨진 이름일까. 그런 애틋하고 아린 마음 없이,달콤하면서도 깊게 각인된 사념의 결정체가 없이 우리는 어찌 한 편의 시(수필)를 바랄 수 있을까. 세상에는 수많은 목숨들이 있지만, 내가 특별히 사랑하는 목숨은 ‘시(수필)’다. 그 사랑을 나는 늘 여의며 산다. ‘여읨’은 그리움이다. 늘 그리워하며 사는 것이다. 그 사무치는 그리움 속에서 시가 태어나고 수필이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그 슬픔으로 씻는 이름이며, 여읨으로 그리는 목숨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궁극의 대상이 아닐까. 이제 류근의 시는 절정을 넘어서 모든 것을 소진해 가고 있다. “어쩌다 나는 시(수필)가 좋아서/ 이 삶 이토록 아무것도 아닌 건가// 어쩌다 나는 시(수필)가 좋아서/ 어디로든 아낌없이 소멸해버리고 싶은 건가” 우리가 한 편의 시(수필)를 쓸 수 있는 것은 대상에 대한 감동 때문이라 했다. 그 감동은 대상에 대한 겸허와 겸손에서 올 수 있다. 내가 ‘아무것’이 되어 대상을 섣부르게 대할 때, 그것은 나에게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어느 시인은 자기 시론을 이렇게 설파한다. “어떤 이유로든 시인은 대상에게 군림하여서는 안 되며 멋대로 대상을 왜곡해서도 안 되지요. 시인에게 대상은 언제나 주인입니다. 더 낮고 누추한 곳에서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듣고 말해야 하는 것이 시인의 역할일 것입니다. 그러할 때 대상은 자신의 내부를 열어주고 우리는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대상의 본질에 다가서게 되지요.(이규리)”라고 했다. 나를 철저하게 소멸시켜 버릴 수 있을 때 감동은 더욱 깊어질 것이란 담론이겠다. 그토록 우리는 대상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어야 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는 ‘대상의 본질’에 다가설 수 있다. 앞섶이 마르지 않는 눈물을 흘릴 수 있다. 비로소 한 편의 시(수필)를 쓸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과연 어떻게 수필을 쓰고 있는가. 내가 늘 걷는 강둑길은 우거진 수풀로 온갖 풀꽃 천지를 이루고 있던 곳이었다. 그것이 좋아 아침마다 늘 걸었다. 어느 날 그 길에 육중한 기계가 와서 모든 풀꽃들을 짓뭉개버리고 그 자리를 회반죽으로 휘덮어버렸다. 그 날로부터 나는 참 많이 울었다. 앞섶을 얼마나 흥건히 적셨는지 모른다. 떠나간 그것들을 속 깊이 그리워하며 얼마나 애태웠는지 모른다.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것 말고는 아낌없이 나를 소진해버릴 길이 없을 것 같았다.
그 눈물, 그 그리움, 그 소진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에 꼭 맞는 글 한 편을 보듬을 수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직도 더 소멸해야 할 것이 남았기 때문일까.♣(2018.7.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