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겨울 숲

이청산 2017. 12. 20. 15:05

겨울 숲

 

오늘도 산을 오른다. 계절이 언제 그리 달라져 갔는가. 늘 오르는 산이지만, 산의 계절은 무시로 새롭다. 잎이 새롭고 가지가 새롭고 바람이 새롭다. 내 걸음은 철이 따로 없어도, 숲은 시시로 무상한 철을 그려내고 있다. 난들 어찌 그 철을 모른 체할 수 있을까.

오늘은 겨울 숲이다. 겨울 숲은 맑고 청량하다. 세상의 무슨 영화며 탐욕도, 희비며 애증도 다 내려 앉히고, 이제 숲은 아무 가진 것 없이 서있다. 맨몸에 맨살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마냥 맨 것이 아니다.

그 속에는 소곳이 돋우어내던 움도 싹도 품고 있고, 화사하고 해사하게 피우던 꽃들도 새겨져 있고, 싱그러움을 자랑삼던 무성한 녹음도 깃들어 있고, 알알이 소담스레 빚어내던 열매들도 들어 있다. 그 이력들을 그윽이 보듬고 있다.

맨살 맨몸의 나무가 움을 틔우고 싹을 돋우기 위해 얼마나 깊고 짙은 생명 작용을 했을까. 자양을 빨아올리고, 볕을 거두어들이는 날밤을 얼마나 지새워야 했을까. 그 움이 꽃으로 잎으로 피고 열매를 맺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공력을 기울여야 했을까.

그러고도 이제는 다 떨어뜨렸다. 꽃도 잎도 열매도 다 지상으로 내려 보냈다. 어떻게 피우고 맺은 꽃이며 열매던가, 가물 때는 마른 목으로 몸부림도 쳐가며, 비바람이 칠 때는 호된 몸살도 앓아 가며 짓고 맺은 것들이 아닌가.

그런 것들을 차마 어찌 떨칠 수 있는가. 모른 체하고 떨어뜨려 땅 속에서 썩어가게 할 수가 있는가. 저것들을 이룰 때의 간난을 돌아보면 하나도 귀하지 않은 것이 없을 터이다. 모든 것들을 언제까지나 품에 품고 달고 있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나무는 알고 있었다. 떨어뜨려야 새로 날 게 있음을, 보내야 돌아올 게 있음을, 비워야 채워질 게 있음을. 그것이 제 몸을 감싸고 있는 자연의 이치임을 나무는 알고 있었다. ()가 곧 무(), 무가 곧 유임을 나무는 모르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 떨쳐버린 겨울 숲은 맑다. 그 무의 천지가 맑다. 그 맑음에서 또 새로운 생명의 움이 틀 것이 아닌가. 새 꽃이 피고 새 열매가 맺을 것이 아닌가. 이제 나무는 그 새로운 순간들을 그러안으며 조용히 사색하고 있다. 청량한 사색에 잠겨가고 있다.

겨울 숲은 바람의 집이다. 겨울에는 천지를 떠돌던 바람이 숲으로 다 모여든다. 바람은 둥치에도 안기고 가지에도 앉으면서 나무의 허파 깊숙이 파고든다. 나무는 기꺼이 바람의 자리를 내어준다.

혹 덜 보낸 잎이며 열매가 있으면 마다 않고 떨어뜨려 바람을 맞이한다. 바람이 곧 저의 숨결이기 때문이다. 요동할 수 있는 힘을 만들어주고 생기를 돋우어 주기 때문이다. 바람이 오면 가지를 흔들며 기쁨으로 반가이 맞는다.

나무는 그 바람으로 새 움을 틔울 채비를 하고, 새 꽃을 피울 힘을 쟁이고, 새 열매를 맺을 근기를 얻는다. 나무는 바람이 유무(有無)를 돌게 하고 생사를 하나가 되게 한다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을 법하다.

한 걸음 한 걸음 산을 오른다. 숲이 깊어지고 숲에 안겨오는 바람도 깊어진다. 그 깊어지는 숲과 바람 속으로 든다. 지금 나는 어느 계절을 살고 있는가. 어디를 걷고 있는가. 어디쯤 와 있는가.

움과 싹을 틔워 꽃을 피게 하던 시절도 흘러가고, 무성했던 녹엽의 철도 지나가고, 열매를 맺고 거두던 때도 등을 보이며 저만치로 가고 있다. 그러나 저 나무를 보고 있음에야, 이 숲에 서 있음에야 미련이 무엇이고, 아쉬움이 어디 있을까.

꽃 피고 잎 푸르던 나의 모든 시절이 흘러갔다는 것은 나도 저 나무 같은 모습이 되어 있다는 것이 아닌가모든 걸 다 떨친 저 나무에게서 거울을 대하듯 내 얼굴을 본다.

노자(老子) (=)는 곧 가는 것이요, 가는 것은 곧 멀어지는 것이요, 먼 것은 곧 돌아오는 것(大曰逝, 逝曰遠, 遠曰返)’이라며 생사는 원행(圓行)하는 것이라 했다. 저 맑은 나무에 다시 싹이 돋고 꽃이 피듯,나에게 다시 올 것도 새 삶이지 않은가.

겨울 숲속을 든다. 맑은 나무들 속으로 깊숙이 든다. 가지에 둥치에 깃들어 있는 바람이 청신하다. 바람이 내 폐부로도 깊이 든다. 내가 나무가 된다. 저 맨살의 나무가 바로 나다. 걸음이 가벼워진다. 이 바람에 날개돋이를 할 것 같다.

겨울 숲은 새로운 생명이다. 그 바람은 새 생명을 잉태하는 숨결이다.(2017.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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