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살고 보니

이청산 2018. 1. 7. 19:53

살고 보니

 

해가 바뀌었다세월이 또 한 켜 쌓였다쌓이는 세월 위로 예부터 드물다는 나이의 한 고개를 넘어선다지금 세상에야 그 무슨 드문 나이일까이 나이쯤은 당연한 듯 살고 있는 세상 사람들 속을 나도 살아가고 있다.

97세에 백년을 살아 보니라는 인생론을 펴낸 김형석 교수는 인생의 황금기는 60에서 75세 사이라 했다그 말씀대로라면 나는 지금 그 황금기의 후반쯤을 살고 있는 셈이다세상의 짐에서 조금은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것만 해도 황금기를 누리고 있는 것도 같다.

조금은 홀가분하게 살지언정그래서 지금 내 삶이 황금기라고 할 수 있을지언정마음이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은 것이 무슨 까닭일까육신의 모든 것이 차츰 여려져 가고숨 쉴 날의 수가 자꾸 줄어들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육신이 쇠잔해져 가는 것이야저쪽 세상이 조금씩 가까워 오는 것이야 차라리 자연이 아니던가그 자연의 흐름을 누가 거스를 수가 있는가.흐르는 물처럼 기력도 흘러가고 그 흐름의 끝에서 담담히 새 세상으로 들어야 하리라그러함에도 무엇이 마음을 짐스럽게 하는 걸까.

살아가는 이력을 따라 온갖 일들이 쌓여가고그 일들을 따라 수많은 기억이 자꾸 쟁여져 간다나이가 쌓일수록 내다볼 일보다는 돌아볼 일이 자꾸 많아지는 까닭이다돌아보지를 말잔들 돌아 보이지 않을 것도 아니다시시로 새겨지는 회억들이야 하릴없는 일이다.

돌아보아 아름다운 기억만 있다면새겨보아 따사로운 일들만 있다면 얼마나 복된 일일까물론 사람이 사는 일에 행불행 호불호며 고락 희비가 어찌 얽히고설키지 않으랴만나에겐 유독 얼굴 붉힐 일이 많은 것 같아 송연해질 때가 있다.

내 살아온 행보를 돌아보아 덩둘하지 아니했던 일이 별로 없지만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잇고 엮어 나가는 일에 유달리 우둔했던 것 같다가족 사이에서도벗 사이에서도사회의 상하 사이에서도 민연했던 일들만이 기억을 온통 꿰고 있는 것 같다.

세상에 태어나 철부지였을 적에 앙증한 귀염으로 아버지 어머니에게 즐거움을 드린 것 같지도 않고철을 알만 했을 때에도 동기들에게어버이께 정성스런 붙이도 못 되었던 것 같다불화는 일으킬지언정나로 하여 화목을 돋우었던 기억이 별로 없다.

슬하를 떠나 내 가정을 이루고서도 가솔들을 지극한 자애로 싸안으며 살아오지도 못했던 것 같고벗과도 술 한 잔 혼혼히 나누었던 적이 그리 흔치 않았던 같다오히려 그들에게 마음의 가탈을 일게 했던 일들이 기억의 언저리를 아리게 맴돈다.

업을 살면서도 깊은 도량으로 처무에 민완했던 것 같지도 않고윗사람 아랫사람에 대한 도리를 가려 도타움을 새기기에 지성을 다하지도 못했던 것 같다그 때 그 사람들은 나를 얼마나 실답지 않아 했을까.

그때는 최선이라 여겨서 했던 일들이었을지라도돌이켜보면 한갓 실수에 지나지 않고어설픈 시행착오에 불과했던 것 같다돌아볼수록 홍조만이 낯빛을 달게 할 뿐이다.

누가 말했던가. “지금 알고 있는 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더 즐겁게 살고덜 고민했으리라라고지난 것들을 돌리려 한들 돌아올 수 있을까속절없는 지난 일들이 아린 기억으로 뇌리를 돈다.

살고 보니물은 흐르고 무딘 돌들만 쳐져 있는 강바닥처럼 민연한 일들만이 기억의 바닥을 깔고 있다흘러버린 일을 어쩌랴 하고머리를 흔들어 지우고 비워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만마음대로 지워지고 비워질 수 있는 일이던가.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들이지만내 민망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앞으로 내가 살아갈 일도 지나온 날들과 별로 다를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삶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고 있는 지금까지도 나의 결심이나 판단이란 늘 그리 적확하거나 온당하지를 못했다.

바를 것이라 여겨 한 매듭 겯고 나서 보면 무언가 비어 있거나 어딘가 엇나 있기 마련이다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도 가치롭고 실속스런 무언가를 이루어놓은 게 별로 없다그러면서도 입때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이 실로 용하게 여겨질 때가 있다.

또 무슨 실수를 하고어떤 착오 속을 살아야 할까얼마를 더 살아야 제 일을 제대로 건사할 줄 아는 삶이 이루어질까스스로 안타까운 마음에나는야 무위로 무사로 사는 사람이라며 낯을 가려 보지만이 또한 얼마나 미안하고도 민망한 일인가.

백세 노철학자는 인간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며늙는다는 것은 꽃피었다가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익어가는 것과 같은 과정이라 했다그 기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지혜라고도 했다. 이 말씀이 나를 찌르듯 아리게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어찌 살아야 할까생애의 어디쯤에서면 걸림도 욕념도 다 넘어설 수 있을까나의 행보란 언제나 어쭙잖기 그지없지만구차한 대로 덜고 덜어 무위에 이르면[爲]이 없어져 안 되는 일이 없다.(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矣)”고 한 노자(老子)의 말씀을 종착지 삼아 간고한 심신을 기대어 본다.

우둔에 우둔을 더하다 보면 바랄 것도 잃을 것도 없이 되어마침내 무위의 조용한 새 세상을 맞을 날이 올까언제일지도 모를 그때에 이르면살고 보니 이리 아늑한 날도 오누나.’며 맑은 웃음을 머금을 수 있을까.

오늘도 덜고 덜며 우둔의 또 하루를 새긴다.(20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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