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도덕경 한 구절

이청산 2017. 12. 3. 20:25

도덕경 한 구절

 

무엇을 읽으면서 바로 내 심정내 생각을 말한 것 같다.’, ‘내 처지를 그대로 그려놓은 것 같다.’라고 느껴질 때또는 나도 이런 심정이런 생각을 가지고 싶다.’,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라고 여겨질 때그것은 짜릿한 인상혹은 특별한 감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추체험이나 공감의 경험들은 시나 소설 같은 문학작품을 통해 비교적 쉽게 접해볼 수 있지만논리나 이념에 관한 글이라든지 경전 등에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이를테면나는 도덕경(道德經)’의 한 구절을 읽는 순간내 시선은 얼어붙듯이 그 구절에 고착되어 한 동안 눈길을 뗄 수 없었다어쩌면 내 처지를 그토록 명료하게 드러내고 있는가마치 내 삶의 궤적을 속속들이 꿰뚫어본 것 같은 충격이 솟았다.

 

衆人皆有餘而我獨若遺 我愚人之心也哉純純兮衆人昭昭 我獨若昏衆人察察我獨悶悶 <道德經 第20> (세상 사람들은 다 남아돌 듯 넉넉히 살아가는데 나만 홀로 팽개쳐진 듯하다나는 어리석은 이의 마음 같아 아는 것이 없어 순진할 뿐이다세상 사람들은 시비 분별에 밝지만 나만 홀로 혼미하고세상 사람들은 꼼꼼 치밀하지만 나만 홀로 모자란다.)

 

물론 노자(老子)의 이 말씀에 얽힌 상념과 지금 내 심경이 똑같을 수는 없다말씀의 의도는 따로 있을 수 있지만받아들이는 마음에는 내 처지와 너무 닮았다 싶어 몹시 송연해진다.

말씀에서 중인(衆人)’이란 유가(儒家), 명가(名家), 법가(法家등 세상에 내로라하는 자들을 뜻한다지만나는 내 주위에서 흔히 대할 수 있거나 관계 짓고 있는 많은 사람들말 그대로 뭇 사람들로 새기고 싶다.

그 뭇 사람들은 저마다의 능력과 여유를 가지고 재물도 명성도 적절히 누려가면서 잘들 살아가는데나는 그런 것들과는 별 인연을 못 맺고 살아온 것 같다돌아보면 나는 물건을 들여도 남들이 저버린 것만 거둔 것 같고이름 하나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 채 산 것 같다.

작게는 옷을 하나 사 입는 일에도크게는 집을 하나 장만하는 일에도 나는 너무나 덩둘했다사고장만해 놓고 보면 마땅히 쓸 만한 게 못 되고,가치를 지녀갈 수 없는 것들이 되곤 했다내 이름이란 것도 그랬다삶의 일에 이르러 딴은 부지런히 해내고자 했을지라도이름을 세우는 데는 별로 관심을 갖지 못했다.

세상의 물질에 초연하고 명리에 초탈하여 그러했던가아니다유족한 물질로 떵떵거리지는 못할지언정 부족은 덜 느끼며 살고 싶고빛나는 이름으로 거들먹일 일은 없을지언정 남의 심중에 조금은 곱게 새겨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왜 없었겠는가.

그러한 것들은 소박한 바람만일 뿐이었다한 생애를 덧없이 보내고 또 한 세상을 깊숙이 살아가고 있는 지금도 나에게는 쌓아놓은 재물도 그리 없고누릴 만한 명예는 더욱 없다노자의 말씀대로 오직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이어서 그럴 것이겠다노자는 그런 사람을 두고 지극히 순수하다[純純]’했지만나에게는 바보스러움’ 혹은 등신 같음에 다름 아닐 뿐이다.

그러니 오죽했겠는가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마다 영리한 시비 분별로세상일에 밝게[昭昭]’ 살고 있을 터이지만나의 시비 분별이란 가려놓고 보면 늘 실수요시행착오일 뿐이었다그래서 내 일신이며 내 권솔에 대해서도나아가 세상 모든 것에 대해서도 그들의 행복과 화평을 위해 나는 조금도 기여하지 못했다질척이는 자괴감으로 남을 뿐인 일이다.

뭇 사람들은 찰찰(察察)하여 총명하고도 치밀한데나만 홀로 어찌 민민(悶悶)하여 어둡고도 아둔한가 싶어 밤을 뒤척일 때도 없지 않지만,모두가 나의 덩둘 탓인 것을 누구를 원망하고 무엇을 허물할 수 있을까.하물며 영리하고도 밝은 사람을치밀하고도 똑똑한 사람을 어찌 시샘하고 시비할 수 있을까.

오히려 내가 못 해내는 일들을 능히 하며 사는 사람들을 새겨볼 일이다그런 사람들이 있어 사람살이가 진전을 거듭해 오지 않았던가.어쩌면 내가 세상의 일들을 이만큼 누리고 사는 것도 그런 사람들 덕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시비도 않아야할 일이지만탐도 말아야 할 일이다마치 나를 두고 한 듯한 노자의 말씀들이 절절이 폐부를 찌른다.

노자는 사모(食母)를 귀히 여기라하고 이 장()의 말씀을 맺고 있다. ‘먹여주는 어미’ 자연을 귀하게 여기라는 뜻의 말씀이라 했다도덕경의 일깨움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당신의 삶이 중인들과 다르다 할지라도 시비 없이 어미 품의 젖먹이처럼 자연으로 살듯억지 부리지 말고 자연의 분수대로 살란 말이겠다무욕 무념 무사로매달리지 말고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란 뜻이겠다.

물론 노자는 누구에게도 어떻게 살아가기를 주장하지는 않는다자신이 그렇게 살 뿐이다나도 그렇게 살고 싶은 심경일 뿐이다내가 행복을 지켜주어야 함에도 그리 해주지 못한 이들에게는 참으로 민연한 일이지만어쩌랴그 또한 자연의 분수로 품어주기를 바랄 밖에.

도덕경의 한 구절은 오늘도 나를 산으로 오르라 한다꽃이며 나무를 보고새소리며 바람소리를 들으라 한다그 말씀 녘을 따라 쌍지팡이 가볍게 짚고 해거름 산을 향해 걸음을 옮겨 나간다.(2017.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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