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아이들과의 어울림 학교(1)

이청산 2017. 6. 21. 13:05

아이들과의 어울림 학교(1)

 

아이들이 통학차를 타고 다리를 건너왔다. 내가 기다리고 있는 다리 어귀의 동네 정자 앞에 내렸다. 5, 6학년을 통 털어 14명이 왔다. 가뭄에 빗물처럼 귀한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마저 없다면 학교가 문을 닫아야 할 판이다.

지역 사회 단체에서 이 아이들을 위해 할배·할매와 손주들의 어울림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조손 세대가 함께 어울려 지역 사람들이 살아온 모습과 전통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한다며, 세대 간의 소통과 바람직한 인성 기르기를 목적한 프로그램이라 했다.

나에게도 한 부분을 맡아 달라고 했다. 내가 이 한촌을 산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그래서 지역민들의 삶을 얼마나 안다고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느냐며 사양했지만, 내 살아온 이력으로 보아 아이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가 없지 않을 거라며 거듭 권했다.

나의 이력이란 아이들과 더불어 평생을 살아온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 권을 못 이겨 우리 마을의 고갯길과 유래라는 소주제에 참여하기로 했다. 불과 몇 해지만 마을을 살아오는 동안에 듣고 보고 느낀 것을 이야기해 보리라 했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 했던가. 그 간의 우리 마을에 대한 견문을 다시 새기면서 주변의 여러 가지 자료를 찾아보았다. 아이들 덕분에 미처 모르고 있었던 사실도 새로이 알게도 되었다. ‘못고개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부터 풀어나가기로 했다.

아이들을 정자에 앉혔다. 반갑다는 인사말과 함께 아이들이 건너온 다리를 가리켰다. 26년 전에만 해도 저 다리가 없었다고 했다. 그 전에는 마을 출신의 어느 독지가가 놓아준 작은 잠수교로 다녔고, 그것도 없을 땐 마을사람들이 울력으로 섶 다리를 놓아 다녔다고 했다.

옛날에는 댐도 저수지도 없어서 늘 물이 많이 흐르고, 조금만 큰비가 와도 홍수가 났단다. 강둑도 없던 때라 큰물은 들판과 마을을 휩쓸고, 다리도 떠내려 가버려 물이 잦아 질 때까지는 저 강 건너 마을은 까마득히 먼 곳이 되었다고 해.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의 얼굴은 그늘과 빛이 엇바뀌는 것 같았다. 큰물 지면 학교에도 못 갔을 아이들을 상상하며 안타까움과 함께 살짝 부러움(?)에도 젖는 것 같았다. 함께 웃었다. 이 다리를 건너기만 하면 바로 나오는 학교 앞의 큰길은 옛날부터 아주 번성한 길이었다고 했다. 그 유명한 영남대로였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이야기 속으로 점점 빠져드는 듯했다.

그런 길도 마음대로 걸을 수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했을까? 아이들의 눈동자들이 반짝거렸다. 어떤 아이는 내 말을 담으려는 듯 핸드폰을 받쳐 들었다. 마을 뒷산을 가리켰다. 사람들은 저 산을 넘어서 먼 길을 돌아 바깥세상으로 나갔다고 했다.

고개 이름이 왜 못고개예요? 그 건 말이야, 임진왜란 알지? 그 때 우리나라를 돕겠다며 온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고개를 지나다가 마을을 굽어보니 자기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날 형상이더래. 그런 사람 못 나게 하려고, 고개에다 큰 못을 박아 혈()을 끊으려 했다는 거야.그 후로 이 마을을 못고개라 부르게 되었는데, 그 걸 한자로 적어 정현(釘峴)’마을이라 했대.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 사람이 왜 그런 짓을 했을까?’하며 의아해 했다.

그래도 이 마을에서 아주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태어났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주에 살던 김 아무개란 사람이 이곳에 피난 와 살게 되면서 비로소 마을을 이루게 되었는데, 그 후손 중에 한 사람이 가선대부(嘉善大夫)라는 아주 높은 벼슬에 올랐대. 그래서 그 윗대 4대조까지 그 벼슬의 명예를 받았대요.자손이 훌륭하게 되어 조상을 빛낸 셈이지. 아이들의 얼굴에 초여름 반짝이는 신록 같은 볕살이 내려앉았다.

고갯길 이야기가 난 김에 하나 물어볼게. 우리나라 최초의 고갯길과 우리나라에서 제일 아름다운 고갯길이 우리 고장에 있다는 것 알아? 그래, 바로 하늘재와 문경새재야.

계립령이라고도 하는 하늘재는 신라 아달라왕 3(156)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개통된 고갯길로 신라 김춘추가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러 넘기도 하고, 신라가 망하자 마의태자가 눈물을 뿌리며 이 고개를 넘어갔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영남대로가 뚫리면서 조선 태종14(1414)에 열린 문경새재는, 우리 고장이 문희경서(聞喜慶瑞), 곧 기쁘고 경사스러운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곳이라 해서 과거 보러가는 선비들이 즐겨 드나들던 곳이라 했다. 그 지명 유래들도 곁들여 들려주었다. 아이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 빛을 더해갔다.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는 사이에 아이들과 약속한 시간이 다 되어갔다.아이들을 데리고 강둑을 잠시 걸으며, 옛날에는 물이 하도 범람해서 이 바로 앞의 강가에 살던 사람들이 저 산 기슭으로 옮겨가기도 하고, 마을 뒤의 팬 듯 들어가 있는 능선이 바로 고개였다는 것을 다시 일러주었다.그래서 지금은 마을 뒤쪽이 되어 있는 저 고개 밑을 앞골이라 부른다는 것도 말해주었다.

그렇게 어렵게 살았지만 사람들의 마음씨는 착해서 서로 돕고 사는 인심 좋은 마을이 되었다고 했다. 앞에는 강 뒤에는 산으로 경치도 좋아, 몇 해 전 농촌진흥청에서 전국 살고 싶고 가보고 싶은 100대 마을의 한 곳으로 지정했다며, 강둑 아래 마을회관으로 데려가 출입문 위에 걸려있는 지정 패를 보여주었다. 아이들은 조그만 손들을 모아 박수를 쳤다.

인솔 선생님이 말했다. 오늘 할아버지로부터 좋은 말씀 들었지요? 이 좋은 고장에 살면서 우리도 착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해요. 다 같이,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이들이 다시 손뼉을 모았다.

멀리 보이는 고갯길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아이들은 차에 올랐다창을 열고 손을 흔들었다할아버지안녕히 계세요그래잘 가내 손주들한테 말고는 할아버지 소리를 들어본 적 없고들을 일도 별로 없었는데오늘은 뜻밖에 많은 손주들이 생겼다.

모처럼 할아비가 되었구나. 그래, 이 할아비에게서 무어 들을 만한 얘기라도 있었느냐? 사실은 너희들에게 해줄 이야깃거리를 찾다보니, 나도 내 사는 마을이며 고장에 대해 좀 더 이해하게 되었어. 고맙다. 내 사는 곳을 더 아끼면서 살아가도록 할게. 너희들도 우리 고장을 더욱 사랑하고, 한층 빛낼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여라. 잘 가거라. 손주들아!(2017.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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