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나의 한촌살이(1)

이청산 2017. 5. 20. 20:09

나의 한촌살이(1)

 

모처럼 온몸이 젖도록 땀을 좀 흘렸다아내가 지난해 가을 추수 이래 묵어 온 밭을 일구어 달라 했다겨울을 나고 봄이 익어가는 사이에 밭에는 지난해의 마른 풀 위로 잡초가 무성히 돋아 있었다.

잡초이라는 게 봄까치꽃이며 냉이지칭개망초 같은 들꽃들이지만밭을 위해서는 걷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었다낫으로 베고 갈퀴로 끌어 다 걷어내고는 무릎에 힘을 주며 흙을 한 삽 한 삽 파서 뒤엎어 나갔다.

기계를 써서 하면 잠시간의 일이지만산밭에 기계가 올라오기도 어렵거니와 기계의 힘을 빌려야 할 만큼 넓은 터도 아니다아내는 마당의 조그만 텃밭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일손 달리는 이웃의 조그만 밭뙈기 한쪽을 얻은 것이다.

대여섯 평은 됨직한 땅을 일일이 파서 흙을 뒤엎어 고르고모종을 심을 수 있도록 골을 타서 다듬고 나니 그것도 한나절 일이 되었고그 사이에 온몸이 땀으로 흠씬 젖었다땀을 씻기 전에 밭 가녘 몇 곳에 호박 구덩이 너덧 개를 팠다.

나의 할 일은 여기까지다땅을 파서 골을 지우는 일만 끝나면 심고 걸우고 가꾸는 일은 모두 아내의 몫이다그 건 자기 재미요 낙이라며 나의 손길을 허락하지 않는다아내는 내가 일구어놓은 이랑에 고추며 옥수수 모종을 심어나갔다.

이제 가을이 와야 고추를 따고 옥수수를 따는 일을 거들어줄까어쩌다 당근이나 고구마라도 추수할 게 있으면 그것도 캐줄까마당 텃밭의 마늘을 캐는 것은 나의 몫이지만부추를 베고 상추를 뜯는 것은 전혀 내 할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나의 한촌살이는 그리 한산한 것은 아니다아침에는 온갖 풀꽃들이 미소를 건네 오는 두렁길이며 강둑길을 걸어야 하고해거름이면 푸나무 무성한 숲정이 산길을 올라야 한다눈비가 내려도비바람이 몰려와도 거름 없이 걷고 오르는 나의 길이다.

날마다 철마다 다른 모습 새 자태로 피어나는 풀꽃들은 어느 날에 보아도 미소를 잃지 않는다.그 무구한 미소 앞에 서면 세상의 모든 일들이 미소로 변한다그 미소는 어느새 소곤소곤 조근조근 속삭이는 이야기가 된다.

지금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정다운 이와 주고받던 젊은 시절 사랑 이야기 같기도 하고세상을 분노하지 말고 미워하지도 말고 따뜻이 고즈넉이 살아가라고오직 미소로만 들려주는 정 깊은 속삼임 같기도 하다.

풀꽃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음을 받고 주다 보면 햇살이 퍼지면서 앞산 뒷산 숲정이의 푸름들이 더욱 싱그러워진다들판에는 농군들이 나와 논을 썰고 밭을 갈기도 하고커다란 통을 둘러메고 비료를 치기도 한다.

내 한가한 듯한 걸음이 저들에게 좀 민망스러워지기도 한다자기네들은 삶의 진땀을 흘리고 있는데저 사람은 속없는 걸음질이나 하고 있다 하지 않을까그래도 흔들어주는 손길이 고맙다어쩌면 저들이 풀꽃의 마음을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읽을거리쓸거리로 궁싯거리던 한나절을 보내고 고운 노을빛을 품으며 해거름 산을 오른다내 하루를 마무리 짓는 순서다내 노을 진 삶도 산을 오르는 걸음처럼 생동하게 엮어나가고 싶은 바람이라 할까언제나 제 자리 묵묵히 세상의 일들을 지키고 있는 산을 오른다.

산은 언제나 묵언 속의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산을 오를 때면 나는 산의 말들을 받아 적기에 바쁘다생명과 약동에 대하여그 풋풋한 생태에 대하여삶과 죽음에 대하여그 순정한 모습에 대하여 오늘도 산은 많은 계시록을 풀어낸다.

걸림 없이 뻗고 싶은 대로 뻗은 나무들을 묵묵히 지켜주고뿌리를 같이 하거나 가지를 서로 겯기도 하며 얽혀 사는 것들을 말없이 감싸주기도 하다가그것들이 명을 다했다 싶을 때는 포근히 눕혀 품어주는 산이다.

어미닭이 알을 품어 새 생명을 빚어내듯산은 제 품은 것을 다시 새로운 생명체로 태어나게 한다그 생명은 약동을 얻어 왕성한 삶을 살다가 다시 산의 품으로 돌아간다산은 아무 말 하지 않아도그 역사는 끊임없이 이어져간다.

나는 오늘도 그 풀꽃 길을 걷고 있고그 푸나무 산길을 오르고 있다.내가 이 길의 한 포기 풀꽃이 되고한 그루 나무가 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품어 보기도 한다아니다정직하게 말하면 그 소망을 위해 이 한촌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또 한 생애를 이 한촌에 의탁하지 않았는가말없이 살다가 고요히 이 흙 속으로 들어 풀이되고 나무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그 푸나무가 다시 흙이 되고 흙 속의 생명으로 새로이 태어날 수 있기를 바라며 살고 있지 않은가.

아내가 내일은 뒷골로 가서 쑥도 뜯고큰묏등에 올라 고사리도 꺾잔다아이들이 오면 떡도 해주고고사리 비빔밥도 해먹고 싶단다.

그래 그럽시다다 한촌 사는 재미 아니우-!(2017.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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