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한촌 비애

이청산 2017. 5. 11. 14:59

한촌 비애

 

자전거를 달려 나간다신문을 가지러 가는 길이다강둑길을 거쳐 들길을 지나 보급소에 다다르면 십리 길이 넘는다되돌아 왕복 이십여 리를 내처 달려서야 집에 이른다제 날짜의 신문을 보려면 어쩔 수가 없다.

한촌을 살아온 지도 예닐곱 해가 지나가고 있다산이 있고 물이 있고,봄이면 울긋불긋 꽃 대궐도 차려지는 곳을 찾아오다 보니 예까지 이르렀다아침이면 함초롬히 피어있는 풀꽃들과 눈인사를 나누며 들길을 걷고해거름이면 푸나무가 싱그러운 산길을 오르는 즐거움으로 한촌을 살고 있다.

낮이면 간혹 경운기며 농기계의 역동하는 소리가 마을의 고요를 깨우고봇도랑을 흐르는 물소리며 숲정이를 날아다니는 바람소리 새소리가 마을을 고즈넉이 감싼다어쩌다가 마실을 다니는 이웃의 기척 소리가 정겹다.

무엇을 더 바라랴이 살가운 소리들이며 아늑한 산수 정취와 더불어 살면서 무엇을 더 구하려 하랴그러나 나는 이 자연과 함께 세상을 울고 웃는 이웃들과 더불어 살고 있다세상의 일이 궁금하고정다운 이가 그리워지는 마음은 하릴없는 일이다.

수도승이 아닌 다음에야 저 세속의 일들을 어찌 다 떨칠 수 있다 하랴그래서 가끔씩은 이웃과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고대처로 가는 차를 달려 나가 세상이 돌아가는 일에 젖다가 오기도 한다.

세상 돌아가는 일이며 그 이치가 궁금할 때는 역시 신문이다여러 가지 매체들이 세상 소식들을 긴요히 전해준다 해도 신문만큼은 살뜰하지가 않다세상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세상이 돌아가는 이치까지도 차근히 일러주기로는 신문만 한 게 있을까.

한촌을 살면서도 신문은 언제나 친구가 되고 안내자가 되고 조언자가 되어 왔다어쩌다 한 번쯤 그 신문의 필자가 되기도 하고출연자가 되기도 한다이래저래 신문과 뗄 수 없는 인연을 나누며 살아오고 있다.

참 미안한 일이다삼십여 호가 모여 마을을 이룬 동네에 신문을 받는 집이 내 한 집뿐이다배달원은 나 한 사람을 위해 날마다 십여 킬로미터 길 오가기를 마다지 않아야 한다그에게는 힘든 나날이고나에게는 고맙고도 불안한 나날이 아닐 수 없다.

그 불안이 눈앞의 일로 나타나고 말았다어느 날 배달된 신문 속에다음 달부터 여러 사정으로 인하여 우편으로만 배송됩니다구독료는 종전과 같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구독 중지를 원하면 알려 달라며 전화번호를 적은 쪽지를 넣어놓았다.

난감한 일이었다집배원이 마을을 도는 때는 빨라도 점심나절이 넘어서인데상큼한 잉크 냄새와 함께 새로운 소식신기한 정보의 재미에 젖던 아침의 상쾌한 시간은 어쩌란 말인가더욱이 우편배달이 없는 공휴일에는 또 어쩌란 말인가.

보급소에 물어보니 토요일을 비롯한 공휴일 신문은 다음날에 이틀 치를 함께 배달한다는 것이다절벽이 앞을 가로 막고 있는 듯했다일요일은 그러려니 하더라도신문 없는 날을 하루라도 어떻게 지낼 수가 있단 말인가아득하기만 했다.

결심했다배달이 되지 않는 날은 신문을 가지러 가기로 했다그 시간을 자전거타기 운동의 기회로 삼기로 했다가져 와서라도 신문을 읽어야 하루를 온전하게 보낼 수가 있을 것 같았다한촌 살이의 비애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신문이 우편 배송되는 날로부터 내 하루 일의 순서가 달라져야 했다.신문을 읽던 아침의 두어 시간과 오후에 하던 일들을 서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집배원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점심나절을 넘기기도새로운 생활 주기에 적응해 나가기도 쉽지 않았다.

이 궁벽한 한촌을 살지 않았다면모든 것이 잘 갖추어져 있는 도회지에서 살았더라면이런 불편이런 비애가 없을 것을-. 이런 불편을 겪고도 나의 한촌은 살만한 곳인가이 한촌에 내 삶의 최후까지 묻겠다던 결심은 계속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인가.

오래 할 고뇌거리는 아니었다그것도 한촌의 일이었다한촌은 나에게세상살이의 새로운 소식들이며 세상 돌아가는 이법이 담긴 논설들을 간곡한 기다림의 끝에서혹은 힘든 달림길의 끝자락에서 더욱 반갑게 맞이할 수 있는 즐거움을 주려고 하는 것 같았다.

기다릴 일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생기로운 일인가때를 기다려 오는 신문을 읽고날을 기다려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차를 타는 한촌 살이가 내 살아있음을 명확히 증명해주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면한촌의 비애는 곧 한촌의 즐거움이 되어간다.

신문을 가져다 줄 집배원이 올 때를 기다리며 창밖을 보노라니 숲정이의 무성한 푸름이 싱그러운 바람을 안고 일렁인다곧 푸른 소식이 새처럼 가볍게 날아올 것 같다저 푸른 새소리에 세상의 아름다운 소식들이 오롯이 얹혀 올 것 같다.

내일은 쉬는 날신문은 쉬지 않는 공휴일그 쉼 없는 신문을 향하여 나도 쉼 없이 자전거를 달릴 것이다나를 기다리고 있는 새 소식을 맞으러 갈 것이다생기로운 기다림의 길을 반갑게 달려 나갈 것이다.

내 살아있음의 기쁜 확인을 위하여비애가 즐거움이 되는 생기로운 한촌 살이를 위하여-.(20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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