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일기

병에게 전하는 말

이청산 2016. 2. 27. 14:30

병에게 전하는 말
-청우헌일기·37

 

오늘은 아침 강둑 산책길도 나서지 않았고, 해거름 산길도 오르지 않았다. 집에 가만히 있으면서 그 길을 걷지 않은 것은 대여섯 해째 이 한촌을 살면서 처음이다. 나에게는 이보다 더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 없을 것 같다.

내가 산책길을 걷고 저녁 산길을 오르는 것은 날마다 보아도 싫지 않는 강과 산이 빚어내는 자연의 풍광이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심신을 담금질하는 나름의 운동법이기도 하다. 그 운동을 하루도 안 빠지고 한다는 것은 나에게 즐거운 일이기도 하고 자랑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 즐거움과 자랑스러움은 내 건강에 대한 자신감이 되기도 한다.

그 운동과 더불어 해마다 가을이면 나라에서 접종해 주는 독감 예방주사도 거르지 않고 맞는다. 밖에 나갔다 오면 보건기관에서 권장하고 있는 손 씻기 방법에 따라 손도 열심히 씻는다. 이제 나에게 어떤 병이 침노할 수 있을 것인가. 가볍고 가뿐한 마음으로 아침 산책길도, 해거름 산길도 더욱 열심히 걷는다.

어느 날 목이 칼칼하면서 기침이 심하게 났다. 약국에 가서 증상을 말하니 3일쯤 복용하면 나을 거라며 캡슐 감기약 2통을 주었다. 약사가 시키는 대로 잘 먹었더니 좀 낫는가 싶었는데, 하루 이틀 지나니 또 온몸에 한기가 들면서 콧물까지 흐르고 목이 따갑도록 기침이 잇달아 솟구쳤다.

견디기가 어렵다 싶어 읍내 의원으로 달려가서 의사에게 진찰을 받으니 뜻밖에 독감이라 진단했다. 예방주사도 맞고 손도 잘 씻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고 했더니, 의사는 예방 백신을 맞았다고 해서 100% 안전한 것도 아니고, 올해는 백신을 맞은 사람도 독감에 많이 걸리고 있다며, 나에게는 새롭고도 안타까운 사실을 하나 일러주었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 그 해에 유행할 것으로 예상되는 바이러스 종류를 선정하는데, 백신 기업에서는 그 예보에 따라 백신을 제조하여 공급한다는 것이다. 현재 생산되고 있는 백신은 A2종과 B2종 중 1종을 포함하는 3가 독감 백신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B2종을 다 포함하는 4가 백신이 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지금 예방 접종을 한 사람도 독감을 많이 앓고 있는 까닭은 세계보건기구의 예보가 빗나갔을 수도 있지만, 나라에서 4가보다 값이 싼 3가를 공급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AB형이니, 34가니 하는 것에 대한 의학적 지식이 나에게는 없어 사태를 바르게 짚어볼 수는 없지만, 나라의 시책 때문에 앓아누워야 한다는 것이 마냥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오늘도 뉴스는 독감의 창궐로 많은 사람들이 앓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할까, 하는 절망감이 병증을 더욱 깊어지게 하는 것 같았다.

독감의 병통은 사람을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피폐의 수렁을 헤매게 한다. 의사는 따뜻한 물을 많이 마시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라며 약을 처방해 주었다. 아침마다 늘 나서던 산책길도 나서지 않고, 증상이 다스려지기 바라며 계속 누워 있었다. 온몸이 찌뿌듯하고 욱신거린다. 병통으로 누워보기는 십여 년 전 뜻밖의 사고로 병상 신세를 져본 이래 처음이다. 문득 병에게부치는 어느 시인의 말씀이 떠오른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삶의 외경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게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직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 없이 흐뭇하네”(조지훈, ‘병에게’)

그랬다. 병이 나에게 휴식을 권했다. 누워 쉬면서 생각한다. 몸이 병들면 몸만 아픈 게 아니다. 꼭 마음의 병까지 데리고 온다. 그 게 병이 속삭이는 허무일까. 몸의 병을 이겨내려는 의지 강한 마음은 가질 수 있을지라도,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는 몸의 병이란 없을 것 같다. 마음의 그릇인 몸이 바르지 않고서야 마음인들 몸에 옳게 자리할 수 있을까. 병과 함께 누워있는 시간은 마음이 바르려면 몸부터 발라야 할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스레 일깨워 준다.

병의 그 나직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 없이 흐뭇하게 느껴지는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해서일까, 나는 죽음보다 병이 더 싫다. 죽음이야 언제 찾아와도 기꺼이 맞이해야 할 자연의 흐름이 아닌가. 죽음이란 기뻐할 일도 아니지만, 슬퍼할 일도 결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병은 모든 것을 지치게 하고 황폐하게 만든다. 스스로의 병통도 병통이지만, 지켜보는 사람들 또한 얼마나 고통스럽게 만드는가.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만, 나도 병과는 친하고 싶지 않다.

육신에 쌓이는 세월의 두터운 더께 위에 절로 내려앉는 병이야 어쩔 수 있을까만, 기력이 있는 한은 병이 찾아오지 못하게, 병이 나를 친하려 들지 않게 애쓰며 살 일이다. “병은 연인처럼 와서 적처럼 깃든다.”는 말도 있지만, 그가 깃들 빈틈을 절대 만들지 말 일이다.

한 이틀 후면 쾌히 일어날 수 있을까. 연인처럼 오든, 적처럼 깃들든 이제 절대 그에게 몸이며 마음을 쉽게 내주지 않으리라. 더욱 가볍게 아침 산책길을 나서고, 더욱 가뿐하게 해거름 산길을 오르리라. 그 길들을 위하여 한촌을 찾아온 나의 삶이 아니던가. 그 길들 위에 노니는 바람소리 새소리와 더욱 친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병과는 영원히 등지고 싶다. 사랑하고 싶은 것들을 알뜰히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그리운 것들을 온전히 그리워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끝내 병과 친하고 싶지 않다.

병이여, 내 사랑하고 그리운 것들은 따로 있노니, 함부로 나를 친하려 들지 마시기를!

진실로 나는 그대를 생각 저 멀리 두고 있노니!

결단코 생애의 벗으로 삼고 싶지 않노니!(2016.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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