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포근한 봄날의 산을 오른다. 어귀에 앙증맞게 핀 노란 양지꽃으로부터 시작한 산의 봄이 오를수록 상쾌해진다. 땅에는 풀싹이 파릇파릇 솟고, 하늘에는 솔잎이 더욱 새뜻해지고 있다. 한참을 오르다가 꽃그늘에 누워있는 고사목 둥치에 앉아 숲이 펼치고 있는 색깔의 향연에 젖는다. 생강나무 노란 꽃망울과 진달래 붉은 꽃이 산의 봄을 찬연하게 수놓고 있다. 아직 한 가지 색깔이 보이지 않는다. 저 산벚나무는 언제 해사한 꽃들을 피워낼까.
주머니 속의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린다. “지금 어디요?” 권 선생이다.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산만 봄이요?, 얼른 이리 오시오, 꽃이 하도 좋아서…!” 동네 강둑에 벚꽃이 만발했다는 것이다. 우리 동네 앞을 지나다가 꽃을 보고 길을 멈추지 않을 수가 없다고 했다. 꽃이 어떻게 피었길래 여든 노객 권 선생의 마음을 잡았을까. 강둑은 나의 아침 산책길이다. 몽우리들이 곧 터질 것 같기는 했지만,아침녘에는 그리 만발하지 않았다. 성급한 몇 송이가 꽃술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었다. ‘꽃이 하도 좋아서…!’라는 말씀의 여운이 산꽃 사이를 날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내려가지요!” 내리막길을 뛰듯이 줄달음을 쳐 동네로 내려와 강둑으로 내달았다. 권 선생은 차를 멀찌막이 세워두고, 줄지어 흐드러진 벚꽃 가지들에 넋을 빼앗기고 있었다. 저 꽃무리들이 창졸간에 이리도 세상을 바꿀 수가 있는가. 깜짝 사이에 저리 열혈로 터져버린 꽃이 올해도 권 선생의 가슴을 달게 했구나. 권 선생의 가슴처럼 햇살도 달아 있는 것 같았다. “이런 날 한 잔 안 할 수가 있소!?” 급히 소박한 주찬을 구해 꽃길 가운데의 강둑 정자에 앉았다. 마른 갈대숲 사이로 하늘빛을 안은 파란 물이 맑게 흐르고, 정자를 좌우하고 도열해 있는 꽃들은 술잔 속으로 제 그림자를 밀어 넣었다. “올해도 이 활짝 핀 꽃을 볼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요.” “아직이야 마음 놓고 더 기다려도 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권 선생은 잠시 눈을 감았다. 언젠가 들려준 적이 있던, 화약 기술자로 발파 현장을 찾아다니던 젊은 시절을 다시 회상했다. 책임 자리를 맡겨주려고 하면 그 날로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고 했다. 광산이며 건설 현장 들을 찾아다니면서 필요한 자리에 화약을 설치하고 발파를 할 때, 굉음을 내며 치솟던 불꽃들의 기억이 아직도 선연하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남은 명예도 일궈 놓은 재산도 없지만, 해마다 봄 되어 마치 불꽃처럼 피어나는 이 꽃들을 보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술이 어느 새 한 병이 비어 버렸다. 늙어가면서 할 일이 뭐 있겠느냐며, 이 한촌에 문화의 꽃을 저 꽃들처럼 피워 볼 수 없겠느냐고 했다. 문화의 꽃? 그랬다. 그는 문화진흥회를 만들어 타방의 문화 답사도 주선하고, 가끔씩 사계의 전문 인사들을 초청하여 강연회를 열게 하는 일들에 앞장을 서고 있다. 당신은 붓을 잡지 않을지라도 서예교실을 열어 많은 사람들에게 서도를 즐기게 했다. 그는 지역 문화 운동가라 할까. “이 꽃나무들 사이사이에 아름다운 시를 새긴 비석을 놓으면 오죽 좋을까. 그 뭐 관에다가 해달라고 매달릴 게 아니라 우리가 팔 걷고 해볼 수가 없을까!” 저 꽃들보다 권 선생의 열망이 더욱 활짝 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화약의 불꽃이 어떻게 해서 이런 불꽃으로 변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열정만은 한 결로 흘러오고 있는 것 같았다. 나고 자라 정겨운 향촌이지만 대처를 따르지 못하는 문화가 안타까울 때가 많다고 했다. 불꽃 타관을 떠돌던 생애도 보내고 고향을 지키며 살다 보니, 처져 있는 문화적인 환경에 대한 갈증이 날이 갈수록 더해지더라고 했다. 
“회장님 같은 분이 우리 고장에 계신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회장님이 계시는 한 저 꽃들처럼 고장 문화도 피어나겠지요.” “그럼 나 죽고 나면 어쩌게? 우리 같이 한 번 해봅시다. 어, 술이 다 비었네. 하하하” 꽃은 하늘로 번져가고 있었다. 서쪽하늘이 붉은 꽃빛으로 물들어갔다.하늘빛은 다시 꽃으로 번져 꽃길은 은은한 다홍빛에 젖어갔다. 우리도 무언가 꽃을 한 번 피워 보자며 다시 꽃길로 나섰다. ‘꽃이 하도 좋아서’ 이 꽃 지기 전에 몇 사람 모여서 술잔에 꽃잎을 띄우고, 이 봄꽃 같은 우리의 꽃 피울 이야기를 나눠보자 했다. 내년에도 이 꽃자리에 앉아 꽃 술잔 다시 들자고도 하면서-.♣(2017.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