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일기

못자리 밥

이청산 2015. 4. 27. 15:32

못자리 밥
-청우헌일기·35

 

어제는 조 씨 집에서 점심을 먹고, 오늘은 이 씨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요즈음 한촌 사람들은 바쁘다. 마을회관에서 함께 추위를 나던 긴 겨울이 지나고, 초봄의 찬기운도 서서히 걷혀 가면서 바야흐로 일 철이 찾아온 것이다. 회관에 문이 닫히고 사람들은 들로 산으로 나섰다.

들판에는 논을 가는 트랙터 소리가 우렁차게 들리면서 흙이 하늘 향해 속살을 드러내고, 겨우내 잠겨 있던 수문이 열리면서 봇도랑에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논 한 자락에 두렁을 쌓고 줄을 쳐서 물을 넣어 못자리를 만든다.

조 씨는 경운기를 몰고 나섰다. 남들은 트랙터에 논갈이를 맡길 때 조 씨는 해마다 경운기를 부려 손수 논을 간다. 내 논 내가 가는 것이 속 편하고 좋다고 했다. 며칠을 두고 갈았다. 땅에 대한 사랑일 것이다.

조 씨의 못자리는 집 마당이다. 마당에 육묘상을 설치하고 묘판에 상토를 뿌려 볍씨를 넣는다. 모를 빠르고 실하게 키우기 위해서다. 어제 동네 몇 남정네들이 조 씨 집에 모여 함께 손을 모아 묘판에 볍씨를 넣었다. 때가 되면 논으로 내어 갈 참이다.

조 씨 집에서 못자리 밥을 먹으러 오라고 했다. 나는 한 일도 없는데 어찌 함께 먹을 거냐며 웃으니, 원래 못자리 밥은 동네가 함께 먹는 것이라 했다. 모두들 맛있게 먹으며 내일은 이 씨 집 못자리 일을 하자고 했다.

오늘은 이 씨 논에 사람들이 다 모였다. 볍씨를 뿌린 묘판을 못자리에 넣기 위해서다. 모두 일렬로 늘어서서 묘판을 하나하나 주고받으면서 못자리에 가지런히 넣었다. 다 넣고는 모야! 잘 자라라.’하면서 하얀 부직포를 묘판 위에 덮어나갔다. 못자리가 제법 넓었지만 여러 사람이 힘을 모은 탓에 한나절이 못되어 일이 끝났다.

손 모아 일을 하고 있는 중에 마을 누구네 집에서는 술을 내오고, 또 누구네 집에서는 음료를 내왔다. 남정네들이 논에서 분주한 일손을 모을 때 몇 부인네들은 이 씨 집으로 모였다. 어제는 조 씨 집에서 분주하던 부인네들의 손길이 오늘은 이 씨 집에서 바빴다. 못자리 밥을 차리기 위해서다.

일을 마친 남정네들이 이 씨 집으로 모이는데 부슬부슬 비가 뿌렸다. 풍년 들 징조라며 모두들 기뻐했다. 향긋한 봄나물에 걸쭉한 육개장으로 차린 상을 앞에 놓고 모두 모여 앉았다.

, 모두 수고 했습니다.”

수고는 무슨, 다음은 누구 차례지?”

모두 으레 해야 할 자기 일을 했다는 듯이 말했다.

술이 한 잔씩 돌면서 누구 못자리는 언제 치고, 볍씨를 언제 넣고, 볍씨는 어떻게 넣어야 가장 좋고……. 화제가 만발해져 갔다.

작년에는 도열병 때문에 애를 먹었는데 올해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할 거라며, 약도 제 때 치고 물도 잘 대야 할 것이라 했다.

그렇게 공을 들여 남는 게 있어야지!”

맞아, 갈고 삶고 심고 거두고 하는 기계 삯이며 비료 값 다 제하면 남는 게 뭐 있어?”

그러면 우째여, 농사 안 짓고 살 수 있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푸념 삼아 말해 보는 것이다.

우쨌든 농사가 잘 돼야 할 낀데.”

그래도 우리 마을 얼매나 좋노! 땅 좋지 물 좋지 이렇게 물 좋은 데가 어딨어?”

그러니까 살지, 하하하

막걸리 잔을 들면서 함께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지만 속에서는 겸연쩍고 민망한 마음이 살며시 솟아올랐다. 이 한촌에 내 삶을 묻은 지도 대여섯 해가 되어 가지만, 나는 저들과 삶을 함께 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나는 갈고 가꾸는 일을 위해 이 한촌에 삶의 터를 잡은 건 아니다. 그저 푸르고 맑은 산이며 물이 좋고, 깨끗하고 정겨운 바람소리 새소리가 좋아 이 한촌을 찾아들었다. 경작을 위한 귀농이 아니라 자연을 찾아온 귀촌이라 할까. 앞으로도 저들과 같은 삶을 살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 그래도 사람들은 다 같은 마을사람으로 여겨주었다. 조금도 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오늘 같은 못자리 밥에도 빠뜨리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것을 나누어주려 했다. 산과 물만이 자연이 아니었다. 사람들도 내가 사랑하는 무위의 자연이었다.

비록 나에게는 밭 한 뙈기 논 한 마지기 없을지라도 나도 못자리 밥을 한 번 지어야겠다. 일손의 밥이 아니라 마음 손의 밥을, 인정의 못자리 밥을 지어야겠다. 삼겹살이라도 지글지글 좀 구워야겠다.

못자리 밥을 맛나게 먹고 이 씨 집을 나설 때, 물 맑게 흐르는 봇도랑 가에 노란 꽃다지며 자줏빛 제비꽃이 익어가는 봄을 노래하고 있었다.(2015.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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