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라고 아이들이 왔다. 초등학교 오학년인 큰손녀와 일곱 살배기 작은손녀는 볼 때마다 성큼 자라있는 것 같다. 넙죽 절을 하고서는 작은아이가 대뜸 자전거를 태워 달란다. 지난번에 왔을 때 자전거를 태워 주었더니 신이 났던 모양이다. 큰아이는 운동용 자전거를 저 혼자 타게 하고, 작은아이는 짐받이 자전거에 태워 들판을 달렸다. 큰아이가 앞서 신나게 달려 나갔다. 누렇게 황금빛을 띄어가며 일렁이던 벼들이 우리가 지나는 것을 보고 일제히 손을 흔든다. “아이 재미있어!” 작은아이가 소리쳤다. “즐거워?” “예에!” “행복해?” “예에~!” “행복이 뭐야?” “뜻은 모르겠는데요, 좋은 말인 것 같아요!” 그래, 나도 잘 모르는데 네가 어찌 알겠니? 뜻은 잘 몰라도 너희들과 함께 이렇게 놀 수 있는 게 바로 행복 아니겠니! 벼들의 손짓이 따뜻한 밀물되어 가슴속으로 밀려들었다. 온갖 들꽃들과 함께 수풀이 우거져 있는 강둑 아래에 자전거를 세웠다. “우리 꽃 좀 구경하고 가자!” “예, 좋아요." 강둑을 오르는 길섶에 구절초며 쑥부쟁이가 하늘거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꽃인지 아니?” “들국화요.” 큰아이가 말했다. “요 하얀 것은 구절초고, 저 연자주색은 쑥부쟁이라는 거야.” “비슷해요.” 강둑으로 올랐다. 다홍빛 유홍초가 넝쿨을 따라 오밀조밀 소복소복 피어 있었다. “이건 무슨 꽃인지 알아?” “나팔꽃요.” “아니야, 이건 둥근잎유홍초라는 거야. 색깔이 예쁘지? 잎이 침처럼 생긴 것도 있는데, 이건 잎이 둥글어서 ‘둥근잎유홍초’라고 해.” “이건 뭐예요?” 작은아이가 며느리밑씻개를 가리키며 묻는다. 도돌도돌한 봉오리에 손가락 끝을 대어보더니 침이 있는 것 같다고 한다. “그래, 분홍빛이 곱지만 잔잔한 침이 나 있어. 며느리밑씻개라는 꽃인데…” “…밑씻개?!” “옛날에 며느리…, 아니야, ‘사광이아재비’라고도 하는 꽃이야” 꽃에 얽힌 전설을 아이들에게 이야기해 주기가 그다지 곱지 못한 것 같았다. 이 꽃에 누가 그리 고약한 전설을 얽어 놓았을까. “할아버지, 이것 좀 봐요. 애기똥풀 맞지요?” 큰아이가 소리치며 줄기 하나를 뚝 따더니, 끊어진 줄기 끝을 손톱에 대고 문지른다. 노란 물이 나와 손톱을 노랗게 물들인다. “이런 건 어떻게 알았니?!” 놀라운 일이었다. 늘 풀꽃을 대하고 사는 나도 몰랐던 걸 어떻게 알았을까. “책에서 봤어요. 그렇지만 꽃은 오늘 처음 봤어요.” “그래서 책도 열심히 읽어야겠구나.” “이게 뭐야?!” 작은아이가 놀란 듯 폴짝거렸다. 도깨비바늘 하나가 옷섶에 꽂혔다. “이건 도깨비바늘이란 건데, 꽃이 이런 바늘로 변해서 이처럼 무엇에 달라붙어서 씨를 퍼뜨리는 거야.” 하고서 몇 개를 제 옷에 붙여주니 “이게 고맙겠다고 하겠네요.” 억지로 붙으려 하지 않아도 붙여 주니 그러는 모양이다. 함께 웃었다. 제 옷에 묻은 걸 떼어 땅에 놓더니 흙을 다독여 덮어준다. “왜 그러니?” “내년에 새싹이 잘 나라고요.” 마음 예쁘기가 어떤 꽃보다도 더 예쁘다. 강둑 길섶 가장귀에 갈대와 억새가 어울려 흔들리고 있다. 하나씩을 꺾었다. “이게 같은 걸까, 다른 걸까? 비슷한 것 같지만, 이건 억새고, 이건 갈대야.” “억새가 갈대였으면 좋겠다. 언니, 그렇지?” 꽃은 억새가 예쁘고 이름은 갈대가 곱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이제 또 자전거 달릴까?” 작은아이가 들고 있던 억새꽃을 환삼덩굴 위에 얹어놓으며 말한다. “추억은 갖고 갈게~!” “추억? 그런 말은 어떻게 알았어?!” 아이는 나를 여러 번 놀라게 한다. “추억은 생각이잖아요. 아빠도 그러던데요?” 나중에 제 애비에게 들으니 어느 여행지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한 말을 제 머릿속에 넣어둔 것 같다며 웃었다. 그런 말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을까. 다시 자전거를 달려 나간다. 할아버지 한 분이 한껏 여물어가는 논들을 둘러보고 있다. “여기는 젊은 사람은 없어요?” 뒤에 앉은 아이가 물었다. “젊은 사람들은 도시에 많이들 나가 살고 있지. 너희들도 도시에 살고 있잖아.” “할아버지들은 풍경을 좋아하나 봐요.” “풍경? 그래 좋아하지. 그래서 할아버지도 여길 찾아와 살고 있잖아.” 아이는 들판이 있고 들꽃이 있는 시골을 ‘풍경’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저도 나중에 풍경을 좋아하고 싶어요.” 이렇게 자전거를 마음껏 달릴 수 있는 들길이 좋다고 했다. 추석을 쇠고, 다음 날 하루 자전거를 더 타고 저들이 사는 곳으로 떠나갔다. “추억은 가지고 가거라.” “네, 다음에 또 올게요.” 어린것들은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창밖으로 손을 내어 흔들었다. 추억은 다 가지고 갔을까? 아니다. 이 풍경 속에 그 추억 고스란히 남아있다. 아이들과의 추억이 물빛 고운 들꽃으로 오롯이 남았다.♣(2017.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