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곡원림답사기

구곡원림을 찾아서·8 <곡운구곡>

이청산 2013. 10. 23. 08:03

구곡원림을 찾아서·8
-화천 곡운구곡을 가다

 

 찾아 나서기

20131014일 오전 7, 문경구곡원림보존회는 시민운동장 주차장을 나섰다. 강원도 화천의 곡운구곡(谷雲九曲)을 찾아간다. 처음으로 문경이 아닌 다른 지방의 구곡원림을 찾아나서는 길인만큼 기대도 작지 않았다.

차창 밖의 안개는 모든 풍경을 지워놓고 있었지만, 아침 안개가 많이 낀 날은 낮이 들면 매우 맑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맑게 살았던 선비가 경영한 구곡을 찾아 가는 마음도 가을날의 푸른 하늘만큼이나 맑았다.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가 충주에서 영동고속도로로 갈아타고 다시 여주에서 중앙고속도로로 바꾸어 춘천을 향해 달린다. 달리는 사이에 안개가 걷히면서 눈이 시리게 푸른 하늘이 드러났다.

 

홍천강 휴게소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내쳐 달려 춘천을 지나 기암 사이로 물 맑게 흐르는 시내를 끼고 화천으로 드는 경계를 넘어선 것은 1050분경, 장장 4시간 가까이를 숨 가쁘게 달려왔다. 춘천시와 화천군의 경계를 넘어서려는 순간 뒤쪽에서 비명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1곡을 지났어요!”

차는 이미 한참을 달려 나갔고, 편도 1차로뿐인 좁은 길은 차를 세우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은 차를 세울 수 있는 곳까지 내쳐 올라갔다가 되돌아 내려와 차를 세운 곳은 제3곡 신녀협 부근이었다. 결국 제321곡 순으로 보는 수밖에 없었다. 차례를 제대로 찾지 못했던 곳은 또 있다. 7곡 명월계에 이르러, 8,9곡으로 가기 위해서는 영당교를 건너 사창리 방향으로 올라가야 했는데, 그 걸 모르고 다리를 건너지 않고 계속 지존천을 따라 올라가다가 고삽교로 사창천을 건너고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일광교로 지존천을 건너 영당교 방향으로 다시 내려오면서 제98곡 순으로 보아야 했다. 걸음 순서대로 답사기를 서술하기는 오히려 혼란스러울 것 같아 구곡의 순서대로 답사 행보를 정리해 나가려 한다.

곡운구곡은 모두 용담계곡 지존천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화천 사람들은 곡운구곡용담계곡을 동의어쯤으로 알고 있으며, 군청 홈페이지에서조차 용담계곡은 흔히 곡운구곡이라 불리기도 한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곡운구곡과 김수증

곡운구곡은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이 설정하여 경영한 구곡원림이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장손으로 태어난 김수증은 효종 임금이 죽자(1659) 일어난 예송논쟁으로 권력의 부침을 겪으면서 벼슬에 대한 욕심을 버린다.

아버지 김광찬(金光燦1597~1668)이 세상을 떠나고 3년 상을 치른 뒤 47(1670) 되던 봄날 은둔지를 찾아 화천 땅을 밟게 된다. 지금 화천군 사내면 사창리의 당시 땅 이름은 사탄(史呑)이었는데, 이곳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잠시 은둔했던 곳이기도 하다.

북한강의 지류인 사내천(史內川)이 흐르는 골짜기를 은둔지로 삼아 그 이름을 주자(朱子)가 은둔했던 운곡(雲谷)을 거꾸로 써서 곡운(谷雲)으로 정했다. 1673, 김수증은 곡운을 다시 찾아와 주자가 무이산에 무이구곡(武夷九曲)을 정하여 노래한 것처럼 곡운구곡을 설정하여 노래하며 자연을 즐겼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 영의정을 지낸 아우 김수항(金壽恒, 1629~1689) 등이 유배된 1675년 겨울에는 온 가족을 데려와 살면서 곡운정사(谷雲精舍)라는 현판을 내걸고, 농수정(籠水亭)을 짓고 가묘도 세웠다. 서인이 세력을 회복한 1681(신유)에는 병이 나서 산을 나갔다가, 우암과 아우 수항이 사사된 기사환국(1689)에는 홀로 다시 들어와 화악산 북쪽에 화음동정사(華陰洞精舍) 짓고 권력무상을 처절하게 느끼며 곡운에 철저히 은둔하다가 1701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는 곡운구곡을 매우 사랑하여 자신은 물론 아들 창국, 창직이며, 영의정에 오른 창집을 비롯한 창협, 창흡. 창읍 등의 조카들에게 곡운구곡 시를 짓게 하고, 당대 최고의 화가 패천(浿川) 조세걸(曹世傑, 1635-1705)을 불러 그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게 했다. 그것이 바로 <곡운구곡도>

김수증의 조카 김창협이 지은 <곡운구곡도발(曲雲九曲挑跋)>에 의하면, <곡운구곡도>를 그리게 된 경위에 대하여 내 두 다리가 때때로 산에서 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구곡을 늘 내 눈 안에 머물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생각날 때 가끔씩 보려고 한 것일 뿐이다.”하였으니 그가 곡운구곡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짐작케 한다.

이제 김수증의 자취를 따라 순서대로 곡운구곡의 모습을 담아보기로 한다. 용담계곡 지존천 하류에서부터 물길을 거슬러 오르며 구곡이 펼쳐진다.

 

곡운구곡을 따라

1곡은 춘천에서 화천으로 드는 경계지점에 위치한 방화계다. 화천군 사내면 용담리와 춘천시 사북면 오탄리에 걸쳐 위치하고 있다. 봄철에는 바위마다 꽃이 만발한 곳이라 하여 방화계(傍花溪)’라 하였다는 곳이다. 용담계곡이 다 그렇듯 산 사이의 바위 골짜기로 맑은 물이 흐르고 있는데, 물가의 바위는 도로 구축 공사로 인해 많이 파괴되었을 것 같다. 방화계를 지나는 물이 완만히 흐르다가 너럭바위에 이르러 격한 소용돌이를 이루는데, 김수증이 무이도가의 운을 차운하여 직접 지은 시에 일곡이라 세찬 여울 배 들이기 어려운 곳(一曲難容入洞船) / 복사꽃 피고 지는 속세와 동떨어진 시내(挑花開落隔雲川)/ 깊은 숲에 길 끊어져 찾는 이 드무니(林深路絶來人少) / 어느 곳 산골 집에 개가 짖고 연기 나랴.(何處山家有吠煙 )”라고 한 걸 보면 당시에는 근접하기 어려운 심산유곡이었던 같다. 그 깊은 계곡의 맑은 물과 만발한 꽃이 은둔의 뜻을 새기기 좋게 하여 구곡의 으뜸인 제1곡으로 삼았던 듯하나, 지금은 차도가 뚫리어 사람과 차들이 빈번히 내왕하는 곳이니 격세지감이 크다 할 것이다.

2곡 청옥협은 방화계에서 500m 정도를 거슬러 올라가 있다. 우측에는 바위가 높이 솟아 있고 좌측에는 사내천이 흐르고 있는데, 맑고 깊은 물이 옥색처럼 푸른 골짜기라 하여 청옥협(靑玉峽)’이라 하였다고 한다. 곡운기(谷雲記)계림을 따라 석림(石林) 가운데를 지나니 높고 낮은 큰 돌들이 많고 산봉우리는 연결되어 하늘을 막은 듯하며 길은 다한 듯하나 다시 통한다. 또 십 여리를 가니 석잔(石棧)이 물 사이에 있고 점차로 전망이 트여가는 것 같았다.”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우측에는 산을 깎아 도로를 넓히는 공사를 하고 있고, 시내에는 물은 맑았지만 깨어진 바위들이 뒹굴고 있었다.

3곡 신녀협(神女峽)은 청옥협으로부터 2.5Km 정도 상류의 물안교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사내천로 길옆에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공원 가장자리에 청은대(淸隱臺)’라는 정자가 서 있다. 신녀협의 정경이 신비스러워 강의 신 하백(河伯)의 딸인 신녀에 비유한 계곡으로 곡운구곡 중에 경관이 가장 뛰어난 곳이라 한다. 김수증은 평소 흠모하던 김시습이 노닐었다는 신녀협의 수운대(水雲臺)를 김시습의 법명인 벽산청은(碧山淸隱)을 따 청은대(淸隱臺)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지금의 청은대는 2006년에 복원한 것이라 한다.

신녀협은 부드러운 곡선의 너럭바위가 물길 양쪽으로 길게 누워 절경을 이루고 있는데, 사람들이 영험이 있는 곳이라 여긴 탓인지 소원을 빌며 굿을 올린 흔적이 보이기도 했다. 곡운구곡을 답사한 정약용은 협곡이 아닌데도 협곡이라고 한 것은 웅덩이의 형상이 마치 마주 서 있는 듯 두 벼랑이 협을 이룬 것 같기 때문이라고 신녀협을 묘사하였으며 김수증의 조카 김창집(金昌集)맑고 서늘한 정취를 초연히 깨쳤나니(超然會得淸寒趣) / 흰 바위에 튀는 여울 너무도 아름답네(素石飛湍絶可憐).”라며 절경을 노래하고 있다. 3곡 신녀협은 훼손이 덜 된 듯하여 옛사람들이 보고 느꼈을 정념을 가늠할 수 있게 했다.

청은대 옆에는 하늘 향해 세운 기다란 철판에 투각으로 고은, 김지하, 박경리, 김용택, 정호승 시인 등의 시를 새긴 조형물을 말씀의 기둥이라는 이름으로 둥글게 세워 놓아 지나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게 했다. 공중에 걸려 있는 몇 편의 시를 감상하며 발길을 돌린다.

앞서 말했다시피 제3곡을 먼저 보고 제2곡으로 내려가 제1곡까지 보고는 차를 타고 다시 거슬러 올라와 사내천로를 따라 사내면 소재지인 사창리로 들었다. 점심 요기를 위해서다. ‘사창리는 전방 군대생활을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많이 듣던 마을 이름이다. 군부대 주둔지인 탓인지 면 소재지치고는 매우 번창해 보였다. 시가지 가운데 들어서자 제일 눈에 띄는 것이 谷雲九谷의 고장 史內面이라는 커다란 표지석이었다. 이 고장 사람들도 곡운구곡을 매우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오늘 답사 길에 맛있는 호박죽을 쑤어 왔던 윤숙녀 부회장은 부군이 여기서 군대생활을 할 때 잠시 살았던 곳이라며 감회에 젖기도 했다.

어느 식당에 들어 산채비빔밥에 화천 막걸리 한 잔을 곁들여 점심 요기를 한다. 이만유 회장은 소찬이라 하면서 우리는 선비들이 자연을 즐기던 구곡원림을 찾아온 사람들이 아니냐며 빈한을 자랑 삼던 선비 정신을 본받아 소찬이라도 맛있게 들자고 했지만, 깊은 산중의 음식이어서인지 인공이 별로 들지 않은 듯한 자연의 담백한 맛이 느껴지는 차림이었다.

점심을 먹고 다시 차를 달려 제4곡부터 찾아 나선다. 4곡부터는 사내천로에서 송정교를 지나 김수증로로 든다. 김수증이 남긴 자취가 얼마나 뚜렷했으면 그의 이름으로 길 이름을 삼았을까. 송정교에서 삼일리 쪽으로 가다가 보면 군부대가 나타나는데 그 부대 바로 앞에 제4곡 백운담(白雲潭)이 자리 잡고 있다. 백운담은 오랜 세월을 두고 물에 씻긴 기암괴석들이 정겨운 곡선을 이루며 온 시내를 무늬 놓듯 미려한 풍경을 이루고 있는데, 이를 두고, 김수증은 거북이와 용이 물을 먹고 있는 것 같다라고 하였다. 정약용은 또 반석이 넓게 깔려 1천여 명이 앉을 수 있고, 순청색 돌 빛이 아주 깨끗하다. 구렁으로 쏟아져 흐르는 물이 기괴하고 웅덩이에서 솟아 넘치는 기운이 언제나 흰 구름 같다고 묘사하여 곡운구곡 중에서 가장 기이한 풍경이라고 하였다. 곡운구곡 중에서 가장 물살이 센 곳이며 물살이 바위에 부딪쳐 흩어지는 것을 보고 김수증은 설운(雪雲)이라 하고, 정약용은 백운(白雲)이라 하였다. 김수증의 조카 김창협(金昌協)쏟아지는 물거품은 잠시도 그침 없고(奔潨濺沫無時歇) / 뿌연 안개 언제나 연못 위에 피어나네(雲氣尋常漲一潭)”라며 정경을 읊기도 했다.

맑고 푸른 물이 하도 좋아 여회원 몇 사람이 바위를 건너 뛰어 물빛을 즐기다가 다시 뛰쳐나오지 못해 곤경에 처하게 되자 이만유 회장이 기사도를 발휘하여 구출하려다가 함께 물살에 휩쓸리는 광경을 보고 모두 박장대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아름다운 정경과 재미있는 추억을 남겨두고 제5,6곡으로 향하는데, 몇 백 미터를 사이에 두고 이웃하고 있어 모두 가벼운 걸음으로 이들을 찾아갔다.

백옥담에서 300m 정도 위에 있는 제5곡 명옥뢰에는 낮게 깔린 바위를 타고 맑게 흐르는 물가로 크고 작은 바위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어 물살의 완급을 조절해주고 있다. 바위를 흐르며 부딪치는 물의 소리가 옥이 부서지는 소리 같다 하여 명옥뢰(鳴玉瀨)’라 하였다고 한다. 곡운기에 기이한 장관을 이루기는 백운담보다 못하나 맑고 온화하기는 백운담보다 낫다고 하듯이 바위 장관은 못할지도 물의 맑기는 백운담에 못지않은 것 같았다.

명옥뢰를 뒤로 하고 잠시 걸어 삼일1리 휴양소 앞에 있는 제6곡 와룡담에 이른다. 김수증은 주자(朱子)가 여산에 와룡암(臥龍菴)을 지어 제갈량의 위폐를 봉안하였다는 고사를 상기하며 자신의 곡운정사를 주자의 와룡암에 비유하여 이곳을 와룡담(臥龍潭)으로 불렀다고 한다. 와룡담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물이 고여 못을 이루고 있어 흐르는 물이 잠시 쉬었다가 가는 곳으로 가뭄이 들 때는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경작하고 거처할 환경을 갖추고 있어 김수증은 이곳에 농수정사(籠水精舍)를 짓고 여울물 소리로 세속의 번거로움을 피하며 살았다고 한다. 김수증의 아들 창직(昌直)시끄러운 세상일 숨은 용은 모르니(潛龍不管風雲事)/ 물속에 드러누워 한가히 사누나.(長臥波心自在閒)” 라고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와룡담은 옛일을 아는 듯 모르는 듯 물가의 산 그림자를 담고 요란한 소리를 끌며 내닫는 자동차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발길을 옮겨 김수증로를 따라 제7곡 명월계로 간다. 명월계 표지석은 사창리로 가는 영당교 난간 앞에 서 있는데, 평탄한 지형에 잔잔히 흐르는 물 위로 밝은 달 비치는 곳이라 하여 명월계(明月溪)’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강심 얕은 물 위로 다리가 놓이고 물 에는 자갈돌이 굴러다니고 있어 그 옛날의 달빛 정취는 느끼기 어려울 것 같다.

일행은 영당교를 건너지 않고 좁은 둑길을 따라 갈릴리유원지를 지나갔지만 제8곡과 제9곡은 영당교를 건너 화악산로를 따라 사창리 쪽으로 가는 도로변에 있었다.

8곡 융의연(隆義淵)은 제갈량과 김시습의 절의를 기려 지은 이름이라 하는데, 김수증은 거처하는 곳마다 초상을 걸어놓고 숭모할 정도로 두 사람을 매우 우러렀다고 한다. 융의연은 사내면 삼일1리 개인이 경영하는 펜션, 캠핑장, 카페가 있는 농장 경내의 물가에 위치하고 있는데, 건너편으로는 유원지 횟집이 보이고 흐름이 완만한 물 옆으로 길게 누워 있는 바위들이 마치 바다에서 여러 마리가 함께 헤엄치는 고래의 등같이 보였다. 건너편 시냇가 둑에 네모난 대리석으로 차곡차곡 축대를 쌓은 것이 인공미가 너무 불거져 보여 주위의 정경과 어울리지 않아 어색한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사창리 쪽으로 몇 걸음 옮기지 않아 제9곡 첩석대를 만날 수 있다. 곡운기에 기이한 바위가 여기저기 나열되어 있고 물은 그 사이를 일사천리로 흘러간다. 이름 하여 첩석대라고 하니 수석(水石)의 빼어난 곳이 이곳에 이르러 다한다.”고 묘사하고, 계곡에 층층이 쌓여 있는 바위들이 있어 첩석대(疊石臺)라 한다 하였으나, 표지석 옆에 서서 물가를 내려다보아도 첩첩히 쌓인 바위는 보이지 않아 정경을 헤아릴 수 없었다. 물가로 내려가 보려 하였으나 커다란 그물 철문이 앞을 막았다. 그 안도 제8곡 융의연을 싸고 있는 농장의 터인 것 같았다.

그런데 정약용이 곡운구곡을 둘러보고 쓴 <산행일기>에 의하면 첩석대는 서원 서쪽 1리 너머에 있다. 물속에 서너 개의 선돌이 있어 크기가 비석만 한데…… 위에는 사람이 앉을 수 없다…… 융의연은 그 하류 수백 보 떨어진 곳에 있다…… 그저 시냇물이 흐르다가 고여 있는 곳일 뿐인데, 무엇 때문에 9곡에 끼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명월계는 서원마을 앞에 있다. 소와 말 개와 돼지가 건너다니고…… 이곳 역시 9곡에 넣기는 부족하다. 와룡담 위로는 산세가 시원찮고 물의 흐름도 세차지 못하다…… 이 노인이 늘 멀리 노닐 수 없어 여기에 발걸음이 잦았기에 이상의 3곡이 외람되이 9곡의 수를 채우게 된 것인 듯하다.”라고 하여 7,8,9곡의 가치를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고 있다.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나마 곡운구곡을 다 둘러본 셈이다. 곡운구곡은 모두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할까. 물론 김수증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도로가 나있지 않고 심산유곡이었을 것이다. 정자를 지어놓고 벗들을 기다렸지만, 너무 불편한 곳이라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한탄할 정도로 수려한 자연의 깊은 골짜기였을 터이다. 그런데 이곳에 차들이 빈번히 내왕하는 도로가 뚫렸으니, 길이 열리는 과정에서 자연의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그 정취 또한 옛날 같지 않을 것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와 남긴 시문으로 그 때의 그 정취며 의취를 헤아려 짐작할 수 있을 뿐이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그러함에도 구곡의 위치를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리지 않고 자리마다 표지석을 세워 뒷사람들이 지난날의 정경과 정취를 그려볼 수 있게 한 것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전국에 수많은 구곡들이 설정되어 있지만, 지금은 그 자취며 흔적을 알 수 없는 곳도 적지 않을 것이다. 관계 기관에서 앞으로 더 개발하여 관광자원화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한다니, 기대를 걸어볼만 하지만. 자연미를 파괴하는 개발은 삼가야할 것이다.

아쉬움 하나를 남겨놓고 곡운구곡을 떠난다. 오석윤 사무국장이 준비한 탐방자료에 들어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무심히 화음동정사지(華陰洞精舍址)를 지나쳐버린 것이다. 화음동정사는 김수증이 기사환국으로 인해 다시 곡운구곡으로 들어올 때 지었는데, 정사가 있는 곳이 화악산 북쪽이라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화음동(華陰洞)이라 일컬었다. 김수증은 이 정사에서 성리학에 침잠하며 만년을 보내다가 일생을 마치게 된다. 지금은 정사의 대부분 사라졌지만, 너럭바위에 새긴 하도낙서(河圖洛書), 선천후천팔괘(先天後天八卦), 태극도(太極圖) 등 글씨와 그림은 남아 있다고 한다. 그것이라도 둘러봤다면 곡운구곡과 김수증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데 좀 더 많은 도움을 얻었을는지, 우리의 답사 길이 색독에 치우쳤던 것 같아 이번 답사 행로의 아릿한 후회로 남았다.

 

답사 길의 뒤풀이

화음동정사지를 지나쳤던 것도 뒤풀이에 마음이 바빴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답사의 뒤풀이는 관광으로 시작되었다. 기왕 화천에 온 김에 조성 과정에서 말도 많았던 평화의 댐을 둘러보자고 했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잡기라도 하겠다는 듯 굽이굽이 산길을 분주히 달려 아흔아홉굽잇길을 돌고 돌아 평화의 댐에 이른 것은 4시 반경이었다.

1986년 북한 금강산댐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국민성금을 포함한 막대한 사업비를 들여 공사를 진행하다가 그 위협이 부풀려졌다고 알려지면서 공사가 중단되는 과정을 거쳐 최대 저수량 263,000만 톤의 대규모 댐으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 규모에 놀라며 댐 전경을 조망하고,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 각국의 분쟁 지역에서 보내온 총알과 포탄의 탄피로 만들었다는 평화의 종을 보고, 6.25 참전국 에티오피아 아동을 돕기 위한 성금을 내면서 그 종을 쳐 보기도 하고, 비목(碑木)이 서있고, <비목> 노래비가 있는 비목공원을 둘러보는 사이에 해는 겨우 작은 꼬리를 남겨 놓았을 뿐이다.

점심때의 소찬을 그 유명한 춘천 닭갈비로 보태어 채우자며 양구선사박물관 앞을 달리고 5.6Km 배후령터널을 가쁘게 지나 춘천 시내의 어느 닭갈비집에 도착한 것은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을 때였다. 몇 번의 건배주도 들면서 닭갈비볶음과 막국수로 즐거운 만찬 자리를 가졌다.

드디어 귀로를 달린다. 오늘의 뜻 깊은 여정을 차분히 정리하며 조용히 달리고 싶다. 그러나 굉음으로 차 안을 뒤흔드는 노래 소리와 그 흥에 겨운 몇 사람들은 조용한 귀로를 허락하지 않는다. 흥도 한 순간이겠거니 하며 함께 박자를 맞추기도 했지만, 펄펄 끓는 흥은 좀처럼 가라앉을 줄 모른다. 휴게소에 잠시 쉬었다가 다시 달릴 때에도 흥은 풀이 꺾이지 않는다. 그렇게 흥에 겨운 사람들은 얼마나 좋으랴.

빈한과 청렴의 선비정신을 이야기하던 이만유 회장의 말씀이 떠오르면서, 구곡원림보존회는 세속의 친목모임과는 무언가 좀 달라야 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생각마저도 폭발음처럼 터져 나오는 굉음들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린다. 이 굉음 속으로 오늘의 아름다운 풍광의 기억들도 모두 빨려들면 어쩌나 하는 군걱정도 없지 않았다. 모처럼의 이런 흥을 삶의 생기로운 활력소로 삼을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돌아볼 수 있을 때 더욱 정겹고 따뜻한 흥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찌하였든 자연을 사랑하며 자연이 되어 살았던 선비의 고아한 삶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는 아름다운 계기가 된 것으로 이번 답사 길의 뜻을 새기고 싶다. 그 뜻을 가슴 속에 보듬고 다음의 더 아름답고 편안한 구곡원림 답사 여행을 기대하며 어둠 속을 달려 나가는 차 안 자리 속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2013.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