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곡원림답사기

구곡원림을 찾아서·9 <산양구곡>

이청산 2014. 4. 28. 11:57

구곡원림을 찾아서·9
-산양구곡을 가다

 

올해 문경구곡원림보존회의 첫 구곡원림 답사로 산양구곡(山陽九曲)을 찾아가기 위해 회원들이 문경 산양면을 흐르는 금천의 금양교에 모였다. 강둑의 원두막 소래정(笑來亭)’에 앉아 산양이 태생 고향인 이만유 회장으로부터 먼저 산양의 지세와 내력에 관한 안내를 듣는다. 산양은 일제강점기에 큰 홍수가 나서 마을이 다 쓸려간 것을 계기로 신문물을 도입한 바둑판식 계획도시가 조성되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이 회장은 태어날 때부터 다른 곳에는 없는 전기불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고 자랑삼아 소개하며, 월방산의 남쪽에 자리 잡은 산양은 좋은 지세의 영향으로 명문 석학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그 석학의 발자취를 밟아나간다.

오늘의 산양구곡 답사 길은 손해붕 연구분과위원장이 안내하기로 했다. 4월의 따사로운 봄볕을 안고, 금양교로부터 금천의 물줄기를 거슬러 오르며 산양구곡을 찾아간다.

산양구곡은 석문구곡(石門九曲)을 경영하여 석문정구곡가(石門亭九曲歌)’를 남긴 근품재(近品齋) 채헌(蔡瀗 1715~1795)이 스승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 1679~1760)의 청대구곡(淸臺九曲)을 계승하여 경영한 구곡이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산양구곡을 먼저 설정하여 경영하다가, 석문정(石門亭)이 완성되자 산양구곡 중의 일부를 포함한 석문구곡을 새로이 설정하여 경영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산양구곡과 석문구곡은 몇 굽이가 중복되어 나타나게 된다.

1곡은 금양교 다리 아래 자리 잡고 있는 창주(滄洲)’라는 곳이다. 이 회장의 회고에 의하면 강둑이 없던 옛날에는 강폭도 아주 넓고 양쪽 강가에는 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강 가운데에 있는 모래섬이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이 섬을 창주라 부르고 산양구곡의 제1곡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별로 넓지 않은 강의 가운데에 섬은 없고 무심한 풀들만 자욱하여 풍광의 아름다움은 상상으로나 새길 수 있을 뿐, 물풀 우거진 예사로운 내[]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어찌 하였거나 채헌은 일곡창주학해선(一曲滄洲學海船)이라 하여 이곳을 구도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깊은 금석지감(今昔之感)을 안고 금양교를 건너 500m쯤 물길을 거슬러 오르니 내 건너 쪽에 정자 하나를 안고 있는 야트막한 야산이 보인다. 2곡 존도봉(尊道峯)이다. 안겨 있는 정자는 농청정(弄淸亭)이고 그 아래에 있는 바위가 석문구곡의 제1곡이기도 한 농청대(弄淸臺). 농청대는 권상일이 책을 읽고 학문에 힘쓰던 곳으로, 그 앞을 맑게 흐르는 금천의 물과 어울려 산 매화 시내 버들 아름다운 봄 정경[山梅溪柳媚春容]’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의 변전을 따라 금천의 꽃도 물도 예 같지 않고, 찾는 이 별로 없는 정자만이 고즈넉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을 뿐이다.

다시 물길을 거스른다. 포장길을 따라 400m 쯤 오르니 내 건너 굽이지는 물가에 높다란 바위가 신록에 싸여 있다. 3곡 창병(蒼屛)이다. 권상일은 그 형상이 참으로 아름다워 가암(佳巖)’이라 하였다는데, 지금은 푸른 잎들이 바위를 덮고 있어 얼핏 보면 바위인지 숲인지 분간할 수 없다. 채헌도 푸른 병풍 같은 창병 주위의 풍광을 두고 해 저문 강촌은 절로 어여쁘기만 할 뿐[暮江村只自憐]’이라 노래하였으나, 옛 사람들의 고아한 정취도 쌓이는 세월 속에 덧없이 묻혀버린 듯, 지금은 퇴비장이며 건축물 폐기장이 창병의 좌우에 들어앉아 아름다운 풍광도 문명의 그늘 속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만 더하게 한다.

1Km 정도를 다시 올라 금천 가 부벽(浮壁) 위에 서있는 경체정(景棣亭)에 이른다. 경체정 앞으로 깊은 물이 푸르게 흐르는데. 4곡 형제암(兄弟巖)은 그 물 속에 두 개의 바위로 앉아 있다고 한다. 채헌 당시에만 해도 바위의 모양이 물 위로 뚜렷했던 듯, 그의 석문정구곡가에서 水中의 누은 바희 兄弟 모양 긔이ᄒᆞᆯ샤 周濂溪의 사던 덴가 염바희 더욱 귀타하여 그가 존숭하는 염계 주돈이(周敦頥)가 살던 곳으로 만들고 싶어 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물의 깊이도, 물길도 예 같지 않아 바위가 있는 자리라고 잠작만 할 뿐, 물은 세월도 바위도 깊숙이 덮어버리고 사연들도 모두 몰각한 듯 덤덤하고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다.

물속에 있는 바위의 형체를 상상으로 새기며 건너로 주암이 바라보이는 부벽 바위 위에 앉았다. 이 마을(현리)에 삶의 터를 두고 있다는 이현자 회원이 정성 들여 준비해온 떡이며 약밥이며 갖은 간식거리로 덧없는 세월의 허전함을 달래며 공허한 마음들을 채웠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물길을 또 거스른다. 500여 미터 올라간 내 건너편 바위 위에 우암정(友巖亭)이 두터운 세월의 더께를 쓰고 앉아있다. 5곡 암대(巖臺). 우암정은 순조 1(1801) 채덕동(蔡德東)이 선조인 채유부(蔡有孚)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채헌은 오곡이라 암대에서 길이 돌아 깊으니[五曲巖臺路轉深] 시냇가의 화주는 절로 숲이 되었어라[溪邊華柱自成林]’하며 그 아름다운 풍광을 노래하였으나 지금은 물길마저 돌려져 금천이 떨어져 나가 정자를 곁눈질하며 흐르고, 무성한 수풀들만이 정자를 에워싸고 있을 뿐이다.

암대를 바라보며 금산교를 건너 제6곡 상주(桑洲)를 찾아 간다. 그러나 상주는 없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가 아니라 상주광야(桑洲廣野)가 된 듯, 채 갈지 않아 잡풀 무성한 널따란 들판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채헌의 시절에는 물길이 이 들판을 감돌고 그 물속에 뽕나무 숲 우거진 모래섬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 섬에서 풍광을 즐기고 있으면 뒤쪽 근암재(近嵒齋)에서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낭랑히 들려와 그윽한 운치를 더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운치는 암재의 글 읽는 소리 귀에 가득 들리니[嵒齋絃誦盈人耳] 마음 산란하여 한가로이 나가지 못하네[意馬心猿不出閑]’라고 한 구곡시에나 남아 있을 뿐, 지금은 빈 들판만이 하늘을 바라며 하릴없이 누워있다.

상주를 뒤에 두고 금산교 난간에 기대서서 눈앞으로 다가서는 산을 바라본다. 7곡 근품산(近品山)이다. 채헌은 금천에서 근품산의 정경을 즐기며 칠곡이라 도가 소리 금탄에 들리니[七曲棹歌倚錦灘] 근품산에 뜬 달을 멀리서 바라보네[月方近品更遙看]’라며 노래하고 있다. 근품산 줄기에서 흘러내린 벼랑이 봄이면 붉게 피어난 꽃들과 함께 금천 맑은 물에 비치어 아름다운 풍광을 이루었다는데, 이 벼랑이 벽입암(壁立岩)으로 석문구곡의 제4곡으로 설정되기도 했다. 이 벼랑이 두꺼비 형상을 하고 있어 두꺼비바위라 부른다고도 하며, 맞은편에는 두꺼비를 노리는 뱀산이 있고, 그 중간에는 뱀산을 노려보는 황새바위가 있어 흥미로운 풍수를 이룬다고 한다.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금천의 넉넉한 물과 함께 주변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아름다운 풍광을 이루고 있었다고 하나, 농지정리 과정에서 많은 바위들이 제거되어 아름다운 경관도 많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세월의 흐름 속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만, 그 변전이 아름다운 것을 삼켜가고 있는 것 같아 아쉽고 안타까운 심정만 더해질 뿐이다.

벽입암 앞에 서서 금천 둑을 따라 북동쪽으로 먼 마을을 바라본다. 석문구곡 제5곡이기도 한 제8곡 구룡판(九龍坂)이다. 아홉 마리의 용이 서로 다투어 승천하려는 형상을 한 산의 기슭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 구룡판이라 하였다는데, 산은 그런 전설답잖게 야트막하고 정겨운 산세를 지니고 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이 마을을 지나며 산세를 보니 큰 인물이 날 지세인 것 같아 산혈을 끊어버리니 산 고개가 잘록해지면서 흙의 색깔이 붉게 변했다는 전설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오늘날엔 어떻게 되어 있을까. 다리를 건너 찾아드니, 마을 어귀에 구룡판표지석을 세워 두고, 용이 다투며 뿜는 불길을 잡기라도 하려는 듯 문경소방서 산북119지구대가 자리 잡고 있다. 채헌이 팔곡이라 안개 노을에 노안이 열리니[八曲烟霞老眼開] 구룡판 아래에 새들이 날아 빙빙 도네[九龍坂下鳥飛回]’라 노래했던 풍경은 어디에 있는지, 돌이 많이 나는 동네인 듯 조경용으로 엄청나게 큰 바윗돌을 수집해놓고 있는 곳도 보이고, 바윗돌을 포개어 탑을 지어 놓기도 했다.

채헌의 시절을 돌이켜 상상하며 구룡판표지석을 다시 한 번 어루만지고 다리를 다시 건너 제9곡 반정(潘亭)을 찾아간다. 석문구곡의 제6곡이기도 한 반정은 오늘날의 산북면 대하리 어디쯤에 있었을 것이라 하나, 길도 지형도 예 같지 않아 학자들의 현지조사와 문헌조사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지점을 찾을 수 없는 곳이다. ‘구곡이라 동남으로 길이 확 트이고[九曲東南路豁然] 비파산 황새바위 개인 내에 비치네[琵琶鸛岳映晴川]’라고 한 채헌의 구곡시로 보아 지금 비파산 발치에 서있는 비파정이 반정이 아니었을까 짐작하며 큰 바위 위 노송 옆에 홀연히 서있는 정자를 고개 들어 쳐다보다가 발길을 돌린다.

그리 까마득한 역사 속의 일도 아닌데 그 자취 이리 막막할까 싶어 광란으로 흘러간 세월의 무상감을 느껍게 새기며 산양구곡 탐방의 발길을 마감하고, 오석윤 국장이 점심으로 예약해 놓았다는 맛좋기로 소문난 산북 삼거리 손자장면 집으로 향한다. 탐방의 발자국에 함께 묻었던 마음들을 다시 모아 쟁반 자장면을 함께 나누어 먹으며 오늘의 구곡 탐방 길을 돌아본다.

산양구곡은 있고도 없었다. 노래는 남았지만 자취는 희미했다. 세월이 그 자취를 싸안고 가버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영 사라지지는 않아 오늘 우리의 발길을 부르기도 했다. 이제 우리의 할 일은 무엇인가. 없어져 가고 희미해져 가는 것을 있게 하고 뚜렷하게 하는 것이 아니랴. 그 옛날의 그윽한 지취(旨趣)를 온전히 살려내지는 못할지언정, 구곡으로 마음을 살지게 하며 살았던 옛사람의 그 정취만은 오늘날 우리의 것이 되게 할 일이다.

없는 것이 없는 인터넷의 바다에 지금 산양구곡은 없다. 이 답사기를 그 바다에 띄울 것이다. 없는 것이 없는 그 바다에 산양구곡도 살게 하는 첫 걸음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산양구곡이 세상에 있는 것이 되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구곡의 노래들이며 그 노래하는 마음들이 오늘 날 세상의 것이 되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함께 나누어 먹는 쟁반 자장면 그릇을 비우며 우리는 일어선다. 함께 하는 발길을 위하여 다시 일어선다. 없어져 가는 것들을 있게 하는 우리의 발길은 아직도 멀다. 다음 길은 청대구곡이라 하였던가.(2014.4.24.)

 

채헌의 「山陽九曲詩」 전문을 붙여 산양구곡을 다시 새긴다.

 

序詩

중후한 명산은 성령에게 알맞으니       厚重名山適性靈

원두에 솟는 물이 본래 맑고 맑네        源頭活水本澄淸

인지를 알려거든 산수를 좋아하여       欲知仁智樂山水

뱃사공의 도가 소리를 들어야 하리      須聽篙師欸乃聲

 

1곡 창주(滄洲)

일곡이라 창주서 학해선에 오르니        一曲滄洲學海船

소천 건너에는 구의의 시름 끊기네       九疑愁絶隔蘇川

한낮에도 산중 동내는 어두컴컴하니     日中山市戎戎暗

물가 고을 오랜 세월 안개 덮혔네         澤國空含萬古烟

 

2곡 존도봉(尊道峯)

이곡이라 푸르고 푸르른 존도봉은        二曲蒼蒼尊道峯

산 매화 시내 버들 아름다운 봄일세      山梅溪柳媚春容

선생이 떠나신 뒤 청대 남아 있으니      先生去後淸臺古

푸른 절벽 한 겹 구름 한 겹일세           翠壁一重雲一重

 

3곡 창병(蒼屛)

삼곡이라 시내 머리에 배를 매지 못하니 三曲溪頭不繫船

창병 붉은 골짜기에 몇 년이나 있었던가 蒼屛丹壑幾多年

얕은 물가 갈대꽃에 바람 스쳐 지나가니 蘆花淺水風吹去

해 저문 강촌은 절로 어여쁘기만 할 뿐   日暮江村只自憐

 

4곡 형제암(兄弟巖)

사곡이라 물속에 형제암이 자리하고      四曲波心兄弟巖

죽림사의 성근 대 그림자 드리웠네        竹林疎影摠毿毿

어여쁘다 만취정가로 흐르는 물이         可憐晩翠亭邊水

백세토록 부들 못에 꽃향기 전하네        百世流芳蒲碧潭

 

5곡 암대(巖臺)

오곡이라 암대에서 길이 돌아 깊으니     五曲巖臺路轉深

시냇가의 화주는 절로 숲이 되었어라     溪邊華柱自成林

그중에 그윽한 의취 그 누가 알리오       箇中幽趣人誰會

맑은 물결에 길손의 마음 상쾌하네        一帶淸流爽客心

 

6곡 상주(桑洲)

육곡이라 상주에 푸른 버들이 굽이지고  六曲桑洲碧柳灣

마을 문 깊은 곳은 흰 구름이 관문일세  洞門深處白雲關

암재의 글 읽는 소리 귀에 가득 들리니   嵒齋絃誦盈人耳

마음 산란하여 한가로이 나가지 못하네  意馬心猿不出閑

 

7곡 근품산(近品山)

칠곡이라 도가 소리 금탄에 들리니        七曲棹歌倚錦灘

근품산에 뜬 달을 멀리서 바라보네        月方近品更遙看

어여쁘다 밤비 내린 강촌의 길에는        却憐夜雨江村路

이슬 젖은 연꽃이 새벽빛에 차갑네        露濕芙蓉曙色寒

 

8곡 구룡판(九龍坂)

팔곡이라 안개 노을에 노안이 열리니    八曲烟霞老眼開

구룡판 아래에 새들이 날아 빙빙도네    九龍坂下鳥飛回

무심히 산과 시내 진면목 알고 나니      等閒識得溪山面

달과 함께 찾아오는 풍광이 좋아라       好是光風和月來

 

9곡 반정(潘亭)

구곡이라 동남으로 길이 확 트이고       九曲東南路豁然

비파산 황새바위 개인 내에 비치네       琵琶鸛岳映晴川

연비어약이 가경이 될 뿐만 아니라       鳶魚不但爲佳景

수많은 붉은 꽃도 동천에 가득하네       萬紫千紅滿洞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