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곡원림답사기

구곡원림을 찾아서·5 <쌍용구곡>

이청산 2013. 6. 25. 07:25

구곡원림을 찾아서·5
-쌍용구곡의 난해를 따라가다

 

 네 번째의 구곡원림 답사 길이다. 유월의 셋째 월요일 아홉 시 반 회원들이 영강문화센터에 모였다. 이만유 회장은 구곡원림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지도 모른다는 반가운 소식과 함께 회원의 입·탈퇴 동정을 전했다. 구곡원림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가진 사람들로 회가 정비되어 가는 것 같다고 했다.

진정한 이해를 가진 사람들이 뜻을 모아 쌍용구곡 답사 길을 나선다. 열일곱 명의 회원이 4대의 차에 나누어 타고 농암을 향해 달린다. 농암의 대정 숲에 집결했다. 숲속 정자에 올라 사무차장이 준비해 온 수박을 쪼개며 숨을 고른다. 사람살이의 역사를 다 껴안고 있을 듯한 소나무 노거수들이 오래된 시간 속으로 나들이를 떠나려는 오늘의 사람들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화운(華雲) 민우식(閔禹植; 1885-1973)의 삶과 멋이 서려있는 쌍용구곡을 찾아 문경시 농암면 내서리를 향하여 달린다. 쌍용계곡에 이를 무렵 이만유 회장이 탄 차가 멈추어 선다. 내서천을 품고 흘러내리는 쌍용천 길섶이다. 회원들 모두 차를 내려 언덕바지 길로 내려가 냇가로 든다. 이즈음 어디에 제1곡 입문(入門)이 있을 것이라며 냇가에 서서 오늘의 안내를 맡은 이 회장이 쌍용구곡의 개요를 설명한다. 쌍용구곡은 평생을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자연에 은거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면서 학문에 전력하던 민우식이 경영했던 구곡원림이다. 민우식은 상산(商山;상주) 율리(栗里)에서 문희(聞喜;문경) 화산(華山) 아래에 옮겨와 살면서 일찍 세상을 떠난 부친 민영석(閔泳奭; 1868-1920)을 기려 쌍룡(雙龍)의 용강(龍崗) 위에 사우정(四友亭)을 세우고 내서천과 쌍룡천에 걸쳐 구곡을 설정하였다.

이 회장은 쌍용구곡에 대한 문헌자료는 섭렵했지만 찾아오기는 처음이라며 다 함께 더듬어 찾아가야 할 길이라고 했다. 이 회장은 제1곡 입문(入門)부터 제9곡 홍류동(紅流洞)에 이르기까지 차를 멈추는 틈틈이 설명을 풀어나가는데, 주역의 이치를 바탕으로 설정한 쌍용구곡은 매우 난해한 곳이라고 했다. 난해는 그 이치 속에도 있었지만, 계곡에 숨어 있다시피 하는 아홉 굽이의 위치를 찾아내는 것도 여간 난해한 일이 아니었다. 몇 명이 끝까지 남아 해 저물녘까지 분주한 다리품을 팔았지만 결국 못다 풀고 돌아서야 할 만큼 난해한 곳이었다.

우선 제1곡부터 막혔다. 쌍룡구곡을 경영했던 민우식(閔禹植)손자인 민성기(閔聖基) 씨의 안내를 받아 김문기 교수가 고증한 바에 의하면, 사우정(四友亭)이 자리하는 굽이에서 동북 방향으로 시내를 따라서 500m 정도 내려간 지점에 자리하고 있는 제1곡은 두 산이 양쪽에 솟아 마치 문을 이룬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시내 오른편에 표지석처럼 생긴 바위 위에 입문(入門)’이라 새겨놓았다고 하는데, 쌍용구곡을 오르내리는 첫걸음부터 마지막 걸음까지 그 바위를 찾아 시내 곳곳을 헤매었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두 산 사이를 무심히 흘러가는 맑은 물만 바라보고 돌아서야 했다. 도문(道門)에 들어간다는 입문(入門)’을 찾지 못하였으니, 오늘 쌍용구곡 답사는 그 문에 들지도 못한 것 같아 아쉽고 안타깝기 짝이 없게 되었다.

쌍용교 앞에 선다. 쌍용계곡이 시작되는 곳이요, 쌍용천과 내서천이 만나는 곳이다. 이 지점에 서 있는 우뚝 솟은 바위가 도에 뜻을 둔 형상을 하고 있어 지도(志道)라 명명하고 志道라는 글씨를 새겼다고 하는데, 1990년대 초 다리 공사 중에 파괴되어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공사 담당자의 문화적인 인식 부족을 원망하면서 둘러보는 주위의 풍경에는 음시점이며 모텔 같은 유흥시설이 즐비하여 민우식이 아름다운 경관으로 경영하며 도에 뜻을 두던 그 옛날의 풍경과는 금석지감이 너무도 컸다. 세월은 끊임없이 흐르는데, 그 세월들의 뒤 끝에 이 풍경은 다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래도 힘겹게나마 옛 모습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쌍용교에서 잠시 올라 만날 수 있는 제3곡 우연(于淵)과 사우정(四友亭)이었다. 우연은 냇물 가운데 자연으로 형성된 못으로 민우식이 자신의 마음을 비춰보는 공간으로 설정한 곳이라 한다. 청옥 빛이 감도는 맑은 물 건너편으로 두어 길 됨직한 바위 절벽이 솟고 그 위에 사우정이 자리 잡고 있다. 사우정의 사우란 주련(柱聯)으로 걸려있듯이 명월 청풍(明月淸風)’고산 유수(高山流水)’를 말하는데 자연을 벗 삼아 고아하게 살아가려는 의취가 서린 정자라 하겠다. 지을 당시에는 전면 3칸 측면 2칸의 구조로 지어졌다 하나, 지금은 전면 한 채의 건물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도 주위에는 헐어져 가는 시멘트 블록으로 담장이 쳐져 있고 정자 앞 바위 위에는 접근을 막는 둥근 철조망이 두텁게 둘러져 있어, 지난날의 그윽한 자취는 상상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뿐이고, 시내를 가로 질러 사우정에 이르는 다리(정자교)는 붕괴 위험이 있다하여 경고 표지를 만국 깃발처럼 붙이고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터였다. 민우식 살아 이 광경을 다시 본다면, 그 옛날 그리 생각했던 것처럼 천리(天理)가 유행(流行)하는 현상이라 할 수 있을까.

다시 무거운 발길을 옮겨 구곡의 자취를 따라 간다. 우연(于淵)에서 물길을 거슬러 2정도 올라가면 시내 오른쪽에 높은 산으로 솟아 있는 제4곡 여천대(戾天臺), 거기서 100m정도만 오르면 제5곡 방화동(放化洞) 입구를 만날 수 있다기에 차를 천천히 달리며 주위를 살펴보았으나, 나타나는 것은 커다란 글씨로 적힌 禮鄕籠巖이라는 표지석이었다.

여기에 이르렀을 때는 점심때가 훨씬 지나버렸다. 아무리 좋은 경치도 식후경(食後景)이라고, 오석윤 사무국장과 박순자 사무차장은 주위에 있는 몇 곳 음식점을 찾아 다녔지만, 영업을 제대로 하는 곳이 없다. 급기야는 차를 타고 쌍용터널을 지나 화북에 있는 어느 식당에까지 나아가서야 겨우 요기할 곳을 얻었는데, 지금부터 조리를 시작해야 한단다.

그 사이에 이만유 회장은 우리가 찾아가야 할 남은 구곡들에 대하여 설명을 이어 나가는데, 알고 보니 우리가 와 있는 곳이 병천이고, 이곳은 1703(숙종 29)에 묵옹(黙翁) 송요좌(宋堯佐) 선생이 건립한 병천정사(甁泉精舍)가 있는 곳이었다. 묵옹(黙翁)은 병천정(甁泉亭) 주위의 아름다운 경관을 구획하여 구곡원림(九曲園林)을 경영하였다고 하는데, 이 구곡원림은 현재의 쌍룡구곡과는 다른 구곡원림이라고 한다.

김문기 교수의 고증에 의하면 쌍용구곡 제6곡을 지나 2정도 올라가면 병천정(甁泉亭)이 나온다 하였으니, 6곡 안도석(安道石)은 쌍용교 쪽으로 다시 내려가야 볼 수 있을 터였다. 쌍용계곡 용유동의 구곡은 제6곡으로 끝내고 제7곡부터는 내서천을 따라 설정한 이유가 짐작이 간다. 지금처럼 터널도 없었던 지난날에는 용추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높고, 용추 서쪽 지방은 상주 화북에 속하여 문경 쪽과 왕래가 이루어지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병천정 근처에 송요좌가 경영한 또 다른 구곡원림이 있었기 때문에 구곡의 방향을 중도에서 돌린 것 같다.

병천 언덕바지에 자리 잡고 있는 병천정사로 올라가니 우측면 방 문 위에 빙청실(氷淸室)’ 현판이 예서로 걸려 있고, 전면에는 병천정사(甁泉精舍)’ 현판이 해서로 걸려 예스런 정취를 보여주고 있었지만, 뜰엔 시멘트를 바르고 기둥 사이엔 못을 쳐 빨랫줄을 걸어놓아 그윽한 옛 자취에 큰 흠을 지우고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정사를 나오니 주문해 놓은 음식점에서 조리가 다 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차를 달려 쌍용터널을 지나 화북에 있는 우복동이라는 고풍스런 식당 집으로 들어가니 버섯 덮밥을 해 놓았는데, 급히 한 것이라며 채 퍼지지도 않은 밥을 차려 놓았다. 이 회장이 날 더러 건배사를 하라기에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행로에 아름다운 일 많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기원으로 막걸리 잔을 나누고, 시장을 반찬 삼아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우복(遇伏) 정경세(鄭經世)(15631633) 선생이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지낸 후 38세 때 입향(入鄕)하여 남은 대부분의 여생(餘生)을 지냈다는 우복동천(遇伏洞天)이 이 식당 집에서 멀지 않아 가보고 싶다는 일행도 있었으나, 서쪽을 기웃거리고 있는 해를 잡을 수 없어 우복동식당에서 요기한 것을 위안 삼아 다시 남은 구곡 찾기로 줄달음에 나섰다.

터널을 되돌려 지나 병천정사 앞을 거쳐 차를 세운 곳은 용추교를 건너 심원사를 오르는 길목이었다. 시냇가 돌길을 따라 물을 거슬러 올라가노라니 문득 두어 길은 넘을 듯한 높이로 암벽처럼 서있는 바위가 앞을 가로 막는데, 그 위에는 소나무 몇 그루가 고고히 서 있었다. 바위 앞으로 다가서니 초서로 쓴 글자가 희미하게 보이는데, ‘安道임이 분명했다. 6곡 안도석(安道石)이었다. 글씨가 새겨진 곳이 바로 바위이니 자는 굳이 새기지 않은 듯한데, 두 글자마저도 세월 속에서 곧 마모될 것 같아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게 했다.

안도(安道)는 제 3, 4, 5곡을 거쳐 오는 사이에 도()의 세계에 이르러 편안함을 얻는다는 뜻일 것도 같고, 시에서 休說而今高莫攀(지금 높아 오르지 못한다 말하지 말라) 하듯 정진하여 나아가다가 보면 도의 세계에 이르러 편안함을 얻게 된다는 경구(警句) 같기도 했다.

어찌하였거나 크고 작은 바윗돌이 빼어난 경관을 이루고 있는 풍치 좋은 곳에 설정된 구곡의 하나라고 생각하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관광객이 버린 듯한 쓰레기들이 곳곳에 늘려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일행들이 쓰레기를 일일이 주워 자루에 담는데, 그 모습이 바로 점심을 먹으며 기원했던 아름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위안을 느끼며 다음 구곡을 찾아 발걸음을 돌릴 수 있었다.

다시 차를 달려 쌍용교에 이르러 내서천으로 든다. 4, 5곡은 또 어디에 있는가. 달리다 보면 그 굽이가 나타날 줄 알았건만 역시 보이지가 않는다. 우리의 답사 걸음이 너무 황망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일단 내서천을 거스르며 설정되어 있는 제,7, 8, 9곡을 먼저 찾아보고 다시 나와 제, 4, 5곡을 찾아보기로 하고 내서천을 따라 오른다.

오르노라니 모텔도 보이고 널따란 경작지도 나타나고 커다란 바위도 드러나는데 차를 멈춘 곳은 서령교를 지나서였다. 부근의 펜션 주인을 만나 홍골이 어디냐고 물으니 손을 가리키는데 시내 오른쪽에 붉은 빛을 띠는 바위 절벽이 보이고 그 옆 조그만 골짜기에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로 쌍룡구곡의 극처(極處)인 제9곡 홍유동(紅流洞)이다.

민우식은 이곳을 복사꽃 떠오는 도원(桃園)으로 설정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듯하다. 복사꽃이 아니라도 바위 자체가 붉은 빛을 띠고 있으니 그곳을 흐르는 물도 붉은 빛이라, 복사꽃 떠서 흐르는 도원을 상상할 만도 했다. 거저 바위가 있고 물이 흐르는 평범한 공간이지만, 일상적인 공간에서 도를 찾아 세상을 밝혀 나가려고 하는 민우식의 삶의 자세가 드러나 있는 곳이라 할 수 있겠다.

이곳이 제9곡이면 제 7, 8곡을 지나온 것이다. 9곡과 50m 거리에 있다는 제8곡 광명암(廣明巖)을 찾아 내려간다. 광몀암은 홍류동에서 몇 걸음을 걷지 않은 도로 가에 커다란 검은 바위로 누워 있었다. 원래는 비스듬한 석벽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 고가의 도로가 나면서 길에 얹힌 형상이 되어 버렸다.

검은 이끼가 낀 널따란 바위 한복판에 해서체로 쌍계수석(雙溪水石)’ ‘사우산림(四友山林)’이라는 글씨가 크게 새겨져 있는데 쌍계는 내서와 쌍룡의 두 시내를 말하는 것일 테고, ‘사우는 고산(高山), 유수(流水), 명월(明月), 청풍(淸風)을 말하는 것일 테다.

민우식은 쌍계의 물과 돌, 그리고 사우를 벗 삼아 한가로운 삶을 살면서 이러한 삶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더욱 넓게 밝히고자 이 굽이의 이름을 광명암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초서체로 새겨져 있다는 廣明巖이라는 글씨는 세월 속에서 마모되어 사라져 버렸는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고, 바위 앞에 서있는 다리의 난간에 초서체의 廣明巖橋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바위에 새겨져 있던 글씨를 본 딴 것이라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찾을 수 없는 것은 廣明巖글씨만이 아니었다. 8곡 광명암과 쌍룡교 사이의 어디에 있을 제7곡 낙경대(樂耕臺)를 찾아 부지런한 다리품을 팔았으나 내서천 건너의 소나무 숲속의 바위에 새겨놓았다는 樂耕臺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민우식이 시에서 七曲躬耕樂此臺(칠곡이라 몸소 밭을 갈고 이 대에서 즐기니)’라고 하듯, 분명히 어디쯤에 낙경대가 있을 듯한데, 뉘엿거리는 서산마루의 해를 바라보며 무지의 소치라 생각하고 발걸음을 돌리기엔 너무도 미련이 컸다.

미련을 안은 채로 쌍용교에 모두 모였다. 날도 저물고, 다리도 아프고, 바쁜 일을 두고 있는 사람도 많아 오늘의 답사 걸음은 여기서 접고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수고를 서로 위로하는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러나 발길을 돌릴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회장을 비롯한 몇 사람의 발은 돌릴 줄 몰랐다. 다시 찾아보자 했다.

오석윤 국장이 모는 차에 다섯이서 타고 제1곡 쪽으로 다시 내려갔다. 되올라와 김문기 교수가 고증한 대로 사우정에서 출발하여 500m를 재어 또 달려 차를 세우고 시냇가로 내려갔다. 물은 유유히 흐르고 있는데, ‘入門이라 새겨져 있는 표지석은 끝내 눈에 들지 않았다. 낙망에도 단련이 되었다.

길로 올라와 다시 차를 타고 계곡을 거슬러 올라갔다. 오 국장이 제4, 5곡으로 짚이는 곳이 있다고 했다. 김문기 교수의 고증대로 우연(于淵)에서 물길을 거슬러 2정도 올라가면 시내 오른쪽에 솟아 있는 높은 산, 그 굽이에 이르면 제5곡 방화동(放化洞)으로 들어가는 길과 제6곡 안도석(安道石)이 보이는 곳을 찬찬히 살피며 나아갔다. 보였다. 하늘을 떠받치듯이 높이 솟은 바위산이 보이고, 눈길을 내려 굽어보니 안도석이 보일 듯했다. 하늘에 이를 듯이 솟아있는 제4곡 여천대(戾天臺)가 틀림없을 것 같았다. 연비여천(鳶飛戾天)하듯 점점 도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는 민우식의 의식의 세계를 짐작하며 여천대를 다시 바라본다. 여기서는 이 우뚝 솟은 산을 두고 다른 곳을 여천대라 일컬을 만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드디어 미지의 한 굽이를 확인했노라는 안도감과 함께 다시 물길을 거슬러 잠시 올랐다. 100m를 오르면 제5곡 방화동(放化洞)으로 들어가는 작은 길이 있다고 하였는데, 보이는 것은 닦은 지 오래지 않을 것 같은, 자동차도 다닐 수 있을 만한 너비의 산길뿐이었다. 혹 방화동의 흔적이 보일까하여 몇 백여 미터쯤을 숨 가쁘게 올랐으나 길을 닦을 때 깨진 돌 조각만 즐비했다. 무슨 표지판을 보니 수액 채취를 위해 낸 길인 것 같았다.

방화동의 흔적도 길을 닦는 중장비 아래에 무참히 깔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길을 되돌려 내려왔다. ‘방화(放化)’라고 하듯 마음을 내려놓아 바꾸는수밖에 없다고 체념하고 돌아서 나오는데, 이 회장은 무슨 영감이라도 얻은 듯 편편한 바위가 서 있는 길섶을 올라 살피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그 바위가 서 있는 곳은 길을 새로 닦기 전의 길 어귀인 것 같았다. 이쪽저쪽을 한참 살피던 이 회장이 장방형으로 누워 있는 한 바위 앞에서 놀란 듯 소리를 쳤다.

함께 다가가서 보니 글자의 흔적이 희미하게 보였다. ‘의 형체는 희미하게나마 알 수 있게 드러나는데, 그 앞의 글자는 형체를 알기 어려웠다. 어찌하였거나 해서체의 放化洞이 분명한 것 같았다. 모두 쾌재를 부르짖었다. 하루 종일 다리품을 판 보람이 이 한 곳에서 다 얻어질 수 있는 것 같았다.

물론 표지석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방화동의 모습일 것이요, 주자의 무이구곡 제5곡이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을 제5곡으로 설정한 의의를 깨닫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 표지 글자를 만난 것만으로도 쌍용구곡 답사 길의 한 의의는 채울 수 있을 것 같아 오늘 얻은 피로의 한 부분은 쉽게 날릴 수 있을 것 같았다.

, 이제 가은 아자개 장터로 가서 국수나 한 그릇 합시다.“ 이 회장의 말씀이었다. ‘放化洞글자 앞에서 주먹을 들어 쾌재를 외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함께 손뼉을 쳤다.

오늘의 답사 행로를 돌아보며 귀로를 달린다. 험난한 행로의 오늘이었다. 희망과 낙망이 엇갈리는 길속의 오늘은 몸의 걸음보다 마음의 걸음이 더 험난했던 것 같다. 설정된 구곡의 모습을 찾을 수 없거나, 찾기가 어렵거나, 찾았더라도 원형이 훼손되어 있거나-. 세월의 풍우 탓이기도 했지만, 인간의 아름답지 못한 손길 탓이기도 했다. 온전한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는 곳이 한 곳도 없는 것 같았다. 가는 곳마다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안겨줄 뿐이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행로는 선인이 설정한 구곡의 그윽한 운치와 경관을 찾아 즐기려 했다기보다는 설정해 놓은 실물적 흔적만을 찾아 헤매었던 것 같기도 했다. 선인들이 구곡을 경영할 때는 김문기 교수가 좌표로 제시하듯 특정한 한 지점만을 보고 즐긴 것은 아닐 것이다. 숲을 보려 하지 않고 나뭇가지 하나에만 매달리려 한 것 같기도 하다.

우리 구곡원림보존회의 존재 의의가 오늘 쌍용구곡 답사를 통하여 다시 새겨지는 것 같았다. 사라져가고 훼손되어 가는 구곡의 흔적들을 지키고 보존해야 할 일, 그리고 옛 사람들의 구곡 경영에 깃들인 그윽한 지취(志趣)를 오늘에 살려 나갈 일에 더욱 의의를 가다듬어야 할 것이라 생각하며 어둠 속의 귀로를 달려 나간다.

아자개 장터의 국수집에 이른다. 들깨 국수의 구수한 향미가 반가운 듯 달려 나와 덥석 지친 품을 헤치고 안긴다.(2013.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