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곡원림답사기

구곡원림을 찾아서·6 <석문구곡 2>

이청산 2013. 7. 22. 15:00

구곡원림을 찾아서·6
-남은 석문구곡을 찾아서

 

 칠월의 셋째 화요일 오전 아홉시 반, 영강문화센터 앞에 이십여 명의 회원들이 모였다. 삼월의 답사 첫 걸음 때 기우는 해를 잡지 못해 제5곡에서 걸음을 접고 훗날을 기약했던 석문구곡의 남은 원림들을 마저 답사하기로 했다.

이만유 회장의 구곡원림 사랑에 대한 인사에 이어 몇 대의 차를 나누어 타고 산북으로 향했다. 어제 내리던 장맛비가 고맙게도 잠시 그치고 삼복염천의 따끈한 햇살이 내려앉고 있었다.

산양을 지나 산북의 대하리 정미소 앞에 이르렀다. 300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짙은 그늘을 만들어놓고 답사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늘 아래 정자에 앉았다. 몇 회원이 준비해 온 간식을 나누며 이 회장은 오늘 답사의 시작점인 제6곡 반정(潘亭)부터 풀어나갔다.

반정은 김문기 교수도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없었다고 한 곳이다. 석문구곡(石門九曲)을 경영했던 근품재(近品齋) 채헌(蔡瀗;1715-1795)이 제5곡 구룡판을 지나 금천을 따라 오르다가 물가에 서 있는 반정을 만났을 것인데, 지금은 물가에 있는 정자를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회장은 여러 가지 자료를 종합하고 주민들의 회고담을 들어볼 때 저기 보이는 저 정자가 반정이었을 것 같다.’며 손을 들어 남쪽 산자락의 한 정자를 가리켰다. 이 회장의 손끝을 보니 큰길 건너 산자락에 조그만 정자 하나가 소나무 노거수 뒤에 고즈넉이 서 있다.

그런데 그 정자 이름은 반정이 아니라 비파정(琵琶亭)이라고 했다. 저 정자가 서 있는 산이 비파산인데, 원래의 이름은 뱀산이었던 것이 배암산, 비암산으로 와음(訛音)이 되면서 비파산으로 변한 것 같고, 후세인이 정자를 중수하면서 산 이름을 따서 비파정으로 붙인 것이 아닌가 하고 추정한다는 것이다. 옛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산 아래의 큰길이 옛날에는 물이 흐르는 강이었고, 석문구곡가 제6곡에 보이는 우뚝 솟은 소나무는 지금 보이는 저 나무 일 것 같아 그런 추정을 할 수 있게 한다고 했다. 이 주위에서 다른 곳을 마땅히 반정으로 비정(比定)할만한 곳이 있지 않다고도 했다.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비파정으로 올라갔다. 오랜 동안 돌보는 이 없었던 듯 정자 지붕에는 풀과 나무가 자라고 있고, 오랜 세월 풍상을 겪은 듯한 소나무 한 그루가 외롭게 정자를 지키고 있었다. 사십여 년 전에 십시일반 성금으로 중수했다는 중건기가 처마 아래 붙어 있었다. 정자에 서서 내려다보니 논들과 인가가 펼쳐지고 장수 황씨 종택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 앞에 물이 흐른다고 하면 그윽이 앉아 풍광을 즐기는 데는 손색이 없는 자리일 것도 같았다.

세월의 두께를 걷어내고 진상을 밝힐 수는 없지만 반정으로 보아도 괜찮을 것 같은 운치를 느끼며 비파정을 내려와 인근에 있는 장수 황씨 종택으로 향했다.

창연한 고색을 띠고 있는 종택은 현감(縣監)을 지낸 장수 황씨(長水黃氏) 15대조인 황시간(黃時幹)이 살았다는, 4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고택이다. 안채며 사랑채 등이 지난날의 모습을 대체로 잘 간직하고 있는 것 같고, 탱자나무 고목이 종택에 어린 오랜 세월을 증언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사람의 자취는 볼 수 없이 대문간 문설주에 종손 연락 전화번호가 적힌 기왓장 하나를 붙여 놓았을 뿐이었다.

종택을 나와 동로 쪽으로 잠시 올라 제7곡 광탄(廣灘)에 이른다. 석문정에서 내려오는 대하천과 화장골에서 내려오는 동로천을 만나 넓은 여울을 이루기 때문에 광탄(너부내)으로 불린다는 곳이다. 석문구곡가에서 채헌은 배를 타고 이 광탄에 올랐다고 하니 그 옛날에는 흐르는 물의 양이 지금과는 달리 아주 많고 경관도 빼어났던 것 같다.

두 물이 만나 물소리 한층 커지는 곳에 세월의 상흔이 깊게 안고 있는 큰 소나무가 우산처럼 가지를 벌리고 동네의 수호신처럼 서있다. 수령이 400여년으로 추정되는 천연기념물 제426호 대하리 소나무다. 옛날에는 이 동네에 황희 정승의 영정을 모신 영각이 있어 영각동이라 부르며 매년 정월 대보름에 이 나무 아래에서 동제를 모셨다고 한다.

광탄에서 대하천을 따라 올라 제8곡 아천(鵝川)을 찾아간다. 200m 정도를 오르니 조그만 돌산이 나타나고 그 산을 보며 잠시 달리니 두 개의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이 보였다. 두 다리는 모두 아천교인데 큰 다리는 차량과 사람이 통행하는 새로 놓은 다리이고, 하나는 통행을 하지 못하는 옛길 다리이다. 그 다리 밑을 흐르는 물이 아천인데, 지금은 그저 평범한 시냇물에 지나지 않아 보이지만, 채헌이 渡頭不說桃花網 遊客尋眞逐水來라 노래하여 나루에서 복사꽃 주울 수 있다고 소문내지 않아도 유객들은 스스로 좋은 경치 찾아 물을 좇아오리라고 한 것을 보면, 채헌의 시절에는 빼어나게 그윽한 경관을 지니고 있었던 같다.

그 계곡수를 옆에 끼고 물을 거슬러 오른다. 김용사 쪽으로 잠시 차를 달리니, 시내 양쪽에 마치 문을 이루듯 바위 벼랑이 솟아 있다. 채헌은 이 벼랑 사이를 흐르는 물가에 정자를 짓고 친척과 지인을 불러 시가를 지으며 노닐었으니, 이곳이 바로 석문구곡의 극처인 제9석문정(石門亭)’이다.

석문정은 달곡교를 건너 이곡마을 숲 속에 자리 잡고 있는데, 풀숲에 묻힌 채 높다란 석축 위에 세월의 더께를 잔뜩 이고 서 있었다.

지난날엔 석문가단(石門歌壇)을 이룰 정도로 선비 한량들이 모여 앉아 그윽한 풍치를 즐기며 시를 읊곤 했다지만, 지금은 그물을 둘러쳐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있어 길손을 잃어버린 채 홀로 호젓이 옛 세월 속을 서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지난날 정자의 주인은 속세의 티끌을 벗어난 도원(桃園)으로 삼아 청정한 마음을 의탁하려 했던 곳이다. ‘等閒識得尋芳路 飛躍鳶魚摠是天(쉽사리 꽃 찾는 길을 알아내니 연비어약이 모두 이 동천이로다)’라 하듯이 아천 나루에서 주울 수 있는 복사꽃이란 석문정 계곡 물에서 흘러내린 것이니, 석문정이 바로 채헌의 무릉도원이었다.

이제 이 석문정을 끝으로 석문구곡의 답사를 마친다. 채헌의 무릉도원을 안고, 그 꿈과 낭만을 안고 석문구곡을 떠난다. 원림의 모습은 모든 것을 변전시키는 세월의 흐름을 따라 빛이 바래어 갈지라도 여유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살았던 선인들의 삶의 모습은 영원히 남을 것이고, 또 남아야 할 것이다.

석문구곡에서 멀지 않은 운달계곡을 찾아간다. 개울가 어느 객주 집에 자리를 잡는다. 이 계곡에서는 푹 고은 닭백숙이 제 맛이라던가. 답사를 좀 일찍 끝낸 한가로운 마음을 모아 모두 잔을 기울이며, 모처럼 답사 길을 함께 한 이욱 자문위원의 건배사로 우리 구곡원림 보존회의 앞날을 축복한다. 문경구곡원림 보존회의 발전과 우리 모두의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그리고 계곡 깊숙이 들어가 청량하게 흐르는 물속을 뛰어든다. 박 사무차장의 물장난에 모두들 해맑은 동심으로 돌아간다. 구곡원림 답사 길에서 얻은 아름다운 마음들이라 할까.

차를 달린다. 문득 멈추어 선 곳은 산북면 석봉리 박 차장의 소나무 농장이었다. 잘 가꾸어진 솔숲 속에 관리사(管理舍)가 있고 계곡 물이 흐른다. 물가의 평상에 앉는다. 구곡원림을 이야기한다. 원림이 따로 있을 것인가. 바로 이곳이 원림이라 하였다. 이곳을 제5곡으로 하여 우리 구곡원림보존회의 원림으로 경영하자며 모두 큰 웃음으로 박수를 쳤다.

단산 마루를 향해 기울어가는 해가 발그레한 얼굴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2013.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