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곡원림답사기

구곡원림을 찾아서·4 <선유구곡>

이청산 2013. 5. 27. 19:20

구곡원림을 찾아서·4
-선유구곡, 신선의 발자국을 따라

 

 해발 969m인 둔덕산(屯德山)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맑은 시내를 따라서 약 1.8에 걸쳐 펼쳐져 있는 선유구곡 원림은 누가 이름을 붙이고 바위에 새겨 경영했는지, 언제 이 선유구곡 원림이 완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다행히도 이 선유구곡 원림을 노래한 구곡시(九曲詩)가 있어서 원림을 경영했던 선비들의 심경을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선유구곡시를 지은 이는 외재(畏齋) 정태진(丁泰鎭, 1876-1956)으로 자는 노수(老搜), 호는 서포(西浦) 또는 외재(畏齋)라 하고 관향은 나주(羅州)라 한다. 외재는 이동정(李東亭),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경술국치 이후에는 만주 요동으로 건너가 덕흥보(德興堡)에서 개간으로 영위하며 광복운동에 전심하다가. 기미년(1919)에 파리의 만국평화회의에 곽종석과 연계 서명하여 독립을 청원한 혐의로 일경에 체포되어 달성형무소에 구금되었다. 혹독한 고문에도 굳게 지조를 지키며 출옥 후에는 문경시 초옥 관문에 은거하며 독서로 평생을 마쳤다고 한다. 은거 중에 그가 이성래(李聖來)와 함께 선유구곡을 찾은 것은 정해년(1947) 5월이라 하니,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한 해 전이고, 선유구곡을 찾은 철이 오늘 우리가 답사 길을 들어선 때와도 비슷한 절기이다.

이제 외재 이후 육십여 년이 지난 오늘 그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선유구곡을 걷는다. 선유칠곡을 걸으면서 물에 빠뜨린 카메라가 여전히 작동되지 않아 아름다운 장면들을 갈무리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워 차라리 선유구곡은 다음으로 미루고 싶기도 했으나, 혼자 그리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폰카로 아린 마음을 달래며 선유구곡을 들어선다. 다행이 계곡을 오를수록 하늘이 개고 산산한 바람은 훈풍으로 바뀌어갔다. 

 

선유칠곡의 칠우들이 이미 선유구곡을 알아 칠곡의 끝을 그렇게 잡은 것일까. 선유구곡은 선유칠곡의 마지막 굽이인 칠리계가 끝나는 곳으로부터 시작된다. 바로 선유구곡 제1곡 옥하대다. 예서부터 신선놀음의 시작이다. 이 원림의 이름조차도 선유구곡이 아니던가.

신선의 노니는 걸음은 안개 속으로부터 시작된다.

白石朝暾相暎華(흰 돌에 아침 햇살 비쳐 밝게 빛나고)/ 晶流寒玉紫騰霞(맑은 시내 찬 물결에 안개 붉게 오른다.)’

청량한 햇살을 받으며 반석 위를 유유히 흘러내리고 있는 푸른 숲 깊은 동천의 맑은 물을 보며 시인(정태진)이 보았을 풍경을 상상으로 그려본다. 넓게 펼쳐진 하얀 반석[白石]위에 아침 햇살을 받은 안개[紫霞]가 피어오른다. 신비감을 자아내는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제1곡을 이름하되 옥하대(玉霞臺)’라 하였겠지만, 다른 곳이 그러하듯 바위에 반듯하게 새겨져 있었을 이름이 홍수에 쓸려 자취가 없어진 것을 시인은 안타까워하고 있다.

우리도 그 안타까움을 함께하며 30m 가량을 올라 제2영사석을 찾으려는데 먼저 맞이하는 것은 땅에 온 몸을 눕히고 고개만 힘겹게 쳐들고 있는 수백 년 노송(老松)이다. 세월을 못 이기어 저러한가, 물길에 치여 저리 되었는가, 아린 마음으로 노송을 지나 물가로 드니, 푸르고 맑게 흐르는 물길 옆 반석 위에 靈槎石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신령한 뗏목 바위라는 뜻일 터이니, 배를 띄울 수 없는 계곡수임에도 불구하고, 바위와 어우러져 깊고 맑게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돌로 뗏목 삼아 선령을 불러(以石爲槎喚作靈)’ 상상의 배를 띄우며,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배 띄워 놀았던 주자를 상상하고 이름 그리 붙였으리라. 시인이 불렀던 신선은 그가 지향하는 유도(儒道)를 구현한 사람이었을까. 풍경을 다시 보고 시인의 시심을 더듬으며 다시 물길을 거스른다.

3곡을 찾아 오르는 길섶에 기이한 바위 하나가 눈길을 잡는다. 바위가 진흙처럼 물렀던지 큰 손을 들어 다섯 손가락을 쿡 찍어 놓은 듯하여, 먼 옛날 선유구곡에서 수련하던 선인(仙人)의 자취라는 설명과 함께 장군손바위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다. 사람의 상상력이란 언제나 참 소박한 데서 시작되는 것임을 다시 느끼며 시멘트 포장된 길을 잠시 걷노라니 문득 아치형의 나무다리가 나타난다. 다리를 오르기 직전의 난간 옆 수풀 속에 活靑潭이라는, 조금은 투박해 보이는 글자가 힘찬 모습으로 길쭉한 바위에 새겨져 있다. 3곡 활청담(活靑潭)이다. 바위 앞 반석 사이에 흐르는 물이 절로 만든 작은 못이 하나 보이는데, 이를 두고 붙인 이름인 것 같다. 물은 흐르면서 고이고 고였다가도 흘러가니 활발하게 움직이며 맑다고 이름 그리 붙인 것 같다. ‘못 속이 활발하니 못물이 맑아지네(潭心活活水方淸)’라 노래하듯 물도, 사람 마음도 활발성을 가져야 청청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자연이 품고 있는 삶의 이치를 예서 또한 발견한 듯하다.

이런 자연을 두고 모두가 그 이치를 깨닫고 사는 것 같지는 않다. 그 경치 좋은 시내 양쪽으로 경작지도 보이고 별장인 듯한 집들도 보이는데, 다리를 건너 거슬러 올라가는 길에 있는 집은 잘 지어 놓고도 거처는 하지 않는 것 같아 집 곳곳에 잡초만 무심히 솟아있다. 활발하지 않으면 청청할 수도 없음을 다시 느끼며 제4곡으로 오른다.

3곡에서 150m 정도 오른 계곡 저 건너편 물가에 육면체 마름모꼴 바위 하나가 우거진 숲을 배경으로 하여 비스듬히 서 있는데, 그 바위 앞면에 洗心臺세 글자가 물이 흘러내리는 듯도 하고 구름이 둥실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한 기이한 모양의 전서체로 새겨져 있어 풍경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우고 있다. 4곡 세심대다, 이 계곡 물이야 어디를 흘러도 맑지 않은 곳이 없지만, 바위 앞 움푹 들어간 못[]의 맑은 물은 속을 훤히 드러내며 맑다 못해 파란 빛마저 띠고 있어, 이 물을 보노라면 몸도 마음도 한껏 청정해지니 마음을 씻는 대라 명명한 것 같다.

이곳에 이르러서는 세속의 모든 욕심을 다 내려놓고 마음의 청정을 찾을 것을 권하여 붙인 이름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시내 가운데의 한 바위를 지나는데 구로천(九老川)’이라 새긴 글씨가 보인다. ‘구로(九老)’는 당나라 백거이가 아홉 노인들과 함께 구로회(九老會)를 만들어 벼슬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살아간 고사를 말하는 것이거늘, 이 선유 동천에서 노닌 구로는 누구였을지, 이 물에 마음을 씻으며 신선처럼 살아가려 했던 사람들이었을 것 같다. 그 사람들은 제5곡 구은대에 새겨져 있는 김태영(金泰永)을 비롯한 구은(九隱)이 아닐는지.

바위를 타고 물을 건너 백여 미터를 오르니 시내 오른쪽에 옆으로 길게 펼쳐진 바위벽이 나타난다. 그 바위벽 한가운데 파란 이끼에 가린 채로 희미하게 드러나는 내려 쓴 세 글자 觀瀾潭’,

여기가 바로 제5곡 관란담임을 알려준다. 이 바위 앞에 제법 넓은 소()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 물을 보는 곳이라는 뜻인 것 같다. 맹자는 ()’여울목이란 뜻으로 해석하면서 여울목을 보면 원두(源頭)를 알 수 있다하였으니, 관란담을 노닐던 신선들도 여기 이 물을 보며 수원(水源)을 생각하고 도의 근본을 헤아렸던가 보다. 주자의 무이구곡이 무이정사가 있는 제5곡을 원림의 중심으로 생각했던 것처럼 이곳을 선유구곡의 중심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바위에 또 구은대(九隱臺)라 하여 이곳을 노닐던 아홉 사람의 이름을 새겨놓았으니, 구은(九隱)에 대한 구체적 사실은 상고할 길이 없으나 이곳을 선유(仙遊)의 중심처로 삼았으리라는 짐작을 해볼 수 있을 뿐이다.

물을 보며 그윽이 도를 즐기던 신선의 모습을 상상하여, 계곡을 가로질러 쳐진 밧줄을 잡기도 하면서 100m 정도를 오르니, 우거진 숲 그늘 바위벽에 가로로 쓴 濯淸臺세 글자가 뚜렷하다, 이곳이 제6곡 탁청대다. ‘탁청(濯淸)’이란 말은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는다라고 한 굴원(屈原)의 고사를 떠올리기 어렵잖게 하는데, 과연 탁청대 앞의 바위 사이를 흐르는 물은 맑고도 깨끗하여 세속에서 묻혀 온 때를 여기서 말끔히 씻고 싶어진다.

마음이 그래서 일까, 조금씩은 세속의 때가 지워져 가는 듯한 심사를 품으며 다시 100m 정도 바위를 타고 오르니 물가 바위틈을 비집고 철쭉 몇 봉오리가 아리땁게 피어나 있다. 그 꽃을 리본 삼고 반듯이 놓여 있는 너럭바위에 모양도 신기하게 詠歸巖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7곡 영귀암이다. 이 또한 전서체에 해당할는지, 아름다운 글자 모양에 영탄을 금할 수가 없다. ‘영귀(詠歸)’는 공자(孔子)와 증석(曾晳)의 고사에 나오는 말이라는 고증은 차치하고라도, 이 아름다운 풍경을 두고 臨流盡日弄晴暉(물에 임해 온종일 맑은 빛 즐기다가)/ 風浴隨時可詠歸(수시로 바람 쐬고 읊조리며 돌아온다.)’라고 하듯 어찌 시 한 수쯤 읊지 않고 돌아갈 수 있으랴. 그 시심 아름다우니 글자도 저리 아름답게 새겼는가. 물길을 거슬러 오르다가 돌아보며 정녕 아름다운 풍경과 글씨에 다시 탄성을 모은다.

물가에 매어놓은 밧줄에 의지하기도 하면서 다시 너럭바위를 걸어 잠시 오르다보니, 이 또한 무엇인가. 발을 동동거리며 춤을 추는 듯도 하고 눈을 쫑긋 뜨고 길손을 맞는 듯도 한 鸞笙瀨세 글자가 너럭바위에 얹혀 있다. 8곡 난생뢰다. 물이며 바위야 이 골짝 어느 곳에나 있다 할지라도 이런 글자 모양이야 세상 또 어디 있으랴. 구곡이 극처에 이를수록 물소리도 범상치 않게 들렸던가. ‘琮琤石瀨奏笙鸞(돌여울 물소리 난새의 노래 소리)/ 縹渺仙踪底處看 저 아래 아득히 신선 자취 보인다)’라 하듯, 여울 흐르는 물소리가 난새가 연주하는 생황의 소리로 들려 그리 이름하였던가. 풍광이 아름다우니 상상력조차 거룩해지는 모양이다.

아무튼 못 잊을 풍경이요, 잊히지 않을 글자 모양이라 생각하며 구곡의 마지막을 오른다. 물길을 거슬러 너럭바위들을 밟아가며 잠시 오르니 몇 채의 인가가 보이고 다리 건너로 정자가가 보인다. 도암(陶菴) 이재(李縡, 1680~1746) 선생을 기려 세운 학천정(鶴泉亭)이다. 학천정 앞에 펼쳐진 시내도 너럭바위들이 맑은 물을 흘리며 누워있는데 건너편 기슭을 마주 하고 있는 너럭바위 앞면에 우아한 전서체로 玉舃臺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바로 선유구곡의 마지막인 제9곡 옥석대다. ‘옥으로 만든 신발인 옥석(玉舃) 김문기 교수는 득도자(得道者)가 남긴 유물이라는 뜻으로 고증하면서, 선유구곡의 마지막 굽이에 이르러 득도자가 유물로 남겨 놓은 옥석대에서 이를 통해 도를 만나고 도를 얻었을 것이라고 했다.

최초에 선유구곡을 경영한 신선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선유의 물길을 거슬러 이곳에 이르러 드디어 옥석으로 표상되는 도를 얻고 깨친 듯한 심사를 얻어 이름을 그리 붙였으리라. 시인은 이곳에서 선유구곡의 시상을 마무리하면서 仙人遺寫今何在(선인의 남긴 자취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다. 신선이 남긴 자취가 어디 다른 곳에 있으랴. 세상의 모든 희비(喜悲)와 신산(辛酸)을 초월한 곳에 있는 이 청정한 산수가 바로 신선이 아니던가. 오늘 우리가 이 산수의 청정을 닮아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다면 이 바로 득도가 아닐런가.

 

, 옥석대에 서린 도풍 덕분인지, 물 젖어 작동되지 않던 카메라가 문득 제 노릇을 하기 시작한다. 구곡을 오르는 사이에 젖은 물기 날아가고 본래의 청정을 저도 찾았는가 보다. 하물며 우리 사람들이 구곡을 다 섭렵하고도 마음에 아직도 어찌 속진이 남아 있다하랴.

선유구곡을 다 거닐어 신선이 된 듯, 득도자가 된 듯 한껏 청정심에 젖으려는데, 안타깝다. 학천정 앞 옥석대 바위 위에 학천(鶴泉)’이라는 이완용(李完用)의 글씨가 새져 있다니-. 나라 팔아 배를 채운 그의 눈에도 이 선유의 거룩한 풍경이 보였던가.

남기태 회원은 선유교 위에 올라 소리쳐 부르며 막걸리 한 잔으로 오늘의 답사를 마무리 짓자 한다. 이 좋은 곳을 거닌 끝에 어찌 술이 한 잔 없을손가. 객이 드물어 문을 채 열지 않은 객주에 들어 막걸리 몇 병과 새우깡 안주를 겨우 구해 계변에 앉아 목을 축이며 오늘의 발길을 다시 헤아린다.

일곱 벗이 우정을 모아 경영했던 칠곡으로부터 예로부터 잦은 시인묵객들의 발길로 선유의 풍치를 더해 갔던 구곡을 더듬어 오르면서, 단지 그 위치만을 확인하는 것으로 어찌 만족하겠는가. 우리 살고 있는 이 강산이 참으로 아름다운 곳임을, 영원 무궁토록 지켜 나가야할 빛나는 유산임을 다시 한 번 확신으로 새겼던 걸음이었음을 잊지 말자 했다.

참 좋은 곳을 참 즐거운 걸음으로 섭렵한 것을 이만유 회장을 비롯한 모든 회원들과 더불어 서로 감사하며, 쌍용구곡을 거닐 다음 달의 발걸음을 기약하고 선유의 세상을 나와 인간의 세상으로 걸음을 돌려 나왔다.(2013.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