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곡원림답사기

구곡원림을 찾아서·3 <선유칠곡>

이청산 2013. 5. 27. 19:16

구곡원림을 찾아서·3
-선유칠곡의 우정을 따라

 

 세 번째 구곡원림 답사 길에 나선다. 이 번 행로는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에 있는 선유동 계곡이다. 선유동에는 선유칠곡과 선유구곡이 있다고 한다. 칠곡은 무엇이고, 구곡은 또 무엇인가. 가득한 호기심을 안고 걸을 수 있는 길이 될 것 같았다.

몇 대의 차를 나누어 이강년기념관 앞에 집결한 것은 5월도 중순을 넘어선 2011시경이었다. 십여 명의 회원들이 선유동천 나들길 안내판 앞에 섰다. 하늘이 흐리고 오월 날씨답지 않은 스산한 바람이 불기도 했지만, 호기 어린 답사의 발길을 막지는 못했다.

지난달의 화지구곡 답사에 대한 회고에 이어 오늘의 안내를 맡은 선유칠곡의 김영순 회원과 선유구곡의 손해붕 회원에게 사의를 표하는 이만유 회장의 인사 말씀과 함께, 뜻 있는 답사의 결의를 다지면서 목적지를 향하여 출발한 것은 정오가 가까울 무렵이었다.

 

선유칠곡의 우정을 따라

차를 움직여 선유동교를 건너 선유동유스파크 앞에 닿았다. 차를 세우고 계곡 쪽으로 내려갔다. 물길 방향으로 도보 통로를 따라 잠시 내려가니 문득 담쟁이가 기어오르고 있는 깎아지른 바위 절벽이 앞을 가린다.

칠우대(七愚臺)’라는 글자와 함께 김종률(金鐘律), 정세헌(鄭世憲), 민순호(閔舜鎬), 김정익(金正翊), 김정진(金廷鎭), 김양한(金亮漢), 김종훈(金鍾勳) 등 일곱 사람의 이름이 나이순대로 새겨져 있다. 이들은 각기 우은(愚隱), 우석(愚石), 우초(愚樵), 우송(愚松), 우전(愚田), 우포(愚圃), 우천(愚泉)이라는 호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 바위를 칠우대라 한 것 같다. 이곳이 바로 선유칠곡의 제1곡이다.

이 칠우(七愚, 七友)들은 대한제국 시절 망국(亡國)의 시기에 가은(加恩) 지방의 선비요, 유력한 인사들로 나이도 비슷하고 정도 두터워 자주 모임을 가지고 선유동의 산수를 즐기며, 선유구곡 아래에 칠곡(七曲)을 경영하면서 우정을 나누었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서로의 만남을 위한 장소로 1910년대 칠우대 옆 산자락에 정자를 세우니,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剛)이 이를 알고 칠우정(七愚亭)’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들이 국권을 빼앗기던 시절에 서로 만나 무엇에 마음과 뜻을 모았을까를 상상하며, 수풀 속에서 고즈넉한 물길을 가누는 칠우폭포를 지나 칠우정을 찾아 기슭을 올라가니 정자는 허물어지고 집터만 어지럽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담장이며 집 바닥에 콘크리트 흔적이 선연히 남은 걸 보니 정자가 서 있을 때도 지을 당시의 건축물이 아니라 후세인들에 의해 보수를 거듭했던 것으로 보인다. 누군지 모를 그 후세인은 칠우들이 모일 당시의 정서와 정경은 별로 고려하지 못했던 것 같다.

칠우정에 앉아 망국의 한을 안고 시회(詩會)를 열며 내려다보았을 선유동천의 제2곡 망화담은 칠우정의 부침을 아는 듯 모르는 듯 맑게 흐르는 물을 관조하며 옛 바위 그대로 網花潭아름다운 글씨를 고이 품고 있었다. ‘망화담이라 한 것은 계곡을 떠내려 온 꽃잎들이 이곳에서 맴을 돌아 그 꽃잎 그물질하며 즐겼으리라 상상해 봄 직하지만, 지금 냇가에는 우거진 잡초가 바위를 가리고 큰물에 침수된 흔적이 상처처럼 얼룩져 있을 뿐이었다.

칠우대를 출발점으로 하여 망화담을 지나 물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아치형 교각으로 서 있는 선유동교를 가로 질러 오르니 서너 평은 족히 될 것 같은 평평한 반석이 교각을 바라보며 누워있다. 3곡 백석탄(白石灘)으로 말 그대로 흰 바위다. 바위가 너른 만큼이나 글자도 큼지막하다. 이 너럭바위에 칠우들이 앉아 여울을 지우며 흘러가는 맑은 물을 바라보며 시로써 망국의 울분을 삭였을런가. 우리는 이 바위에 앉아 점심을 먹는다. 저마다 싸온 도시락을 펼쳐내어 서로 권하고 나누어 먹는 마음들이 흰 바위를 닮았을까, 맑은 물을 닮았을까, 정겹고 살갑기 그지없다.

선유동교로 올라 다리를 건너 계곡을 따라 오르다가 큼지막한 바윗돌 징검다리를 건넌다. 다시 계곡을 오르노라니 시내인가, 바위인가, 온통 바위로 된 시내에 맑은 물이 흐르고 그 한 너럭바위에 살아 움직이고 있는 듯한 글자가 보인다. 4곡 와룡담(臥龍潭)이다. 보는 이들은 해서와 초서를 배분하고 조합한 절묘한 글씨체라 하는데, 마치 몸을 틀고 있는 용의 모습을 그린 것 같다. 글씨체만 그런 것이 아니라 계곡수도 이곳에 이르러 큰 못을 이루면서 넘실거려 마치 누운 용이 누워서 꿈틀거리는 형상 같으니, 글자와 물의 형세가 하나로 어우러진다. 이 바위 이 물이야 예 모습 그대로 일 터, 그 느낌 또한 예와 이제가 다르랴.

다시 물길을 거슬러 오르다가 저쪽 기슭으로 가기 위해 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길을 뛰어 건넌다. 아뿔싸, 이 걸 어쩌면 좋은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카메라가 뛰쳐나와 물가에 떨어진다. 얼른 주어 물기를 떨어내고 작동을 시켜보지만 오호통재라, 캄캄한 먹통이다. 이 좋은 경치를 담을 수 없음에야 오늘의 탐방 길이 무슨 의의가 있다 할 것인가. 눈으로만 가슴으로만 넣어 저 아름다운 정경들을 어찌 다 갈무리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안타까움을 딛고 얼른 생각하니 폰카(핸드폰 카메라)가 떠오른다. 핸드폰을 꺼내어 들었지만 아프고 아린 마음은 쉽사리 가시지 않는다.

생채기진 가슴 안고 이른 곳이 제5곡 홍류천이다. 물가에 기다랗게 누운 너럭바위에 물 흐르듯 紅流川세 글자가 물길 따라 새겨져 있다. 문득 깊어진 수심에 잠시 숨을 돌리듯 느려진 물살을 따라 붉은 꽃잎 둥둥 떠 있어 홍류천이라 했던가. 탐방 길 바쁘던 나그네 걸음도 잠시 멈추어 그 물에 마음 담그며 옛일을 그려본다. 맑고 깊은 물에 가슴 적시며 분주를 떨어내듯 그 옛날의 칠우들도 이 물로 시름을 거두어 내었을까.

물에 씻은 맑은 마음으로 계곡을 다시 거스르니 평평한 너럭바위로 빛 고운 물이 널따랗게 흐르는데, 건너 기슭 검은빛 커다란 장방형 바위에 내려 쓴 세 글자가 보인다. 6곡 월파대(月波臺). 칠우의 우정 행로가 예까지 이르렀을 때 해는 이미 기울고 달이 이 물 속에 잠겼던가. 그 달빛 결을 이루며 이 물을 흐르는 정경이 하도 고와 이름조차 월파대라 한 것인가.

그 옛일 상상으로 담으며 몇 발자국을 다시 옮기니 칠우가 즐겼던 칠곡의 마지막 칠리계(七里溪)’에 이른다. 널따란 바위를 흐르는 물이 7리에 걸쳐 여울져 있어 칠리계라 일렀던가, 좌우에 무성하게 어우러진 푸른 숲에 안겨 길고도 맑게 흐르는 물이 한가롭고도 여유롭다. 이 한유(閑裕)로 칠우들은 칠리계에서 칠곡을 정리하며 세속에 허물진 마음을 씻어내며 새로운 정을 다졌을지도 모르겠다.

칠우들이 즐겼던 칠곡을 잇달아 올라보니, 선유칠곡은 주자를 비롯한 대개의 구곡 경영자들처럼 도학적인 뜻을 새기며 즐겼던 원림이 아니라, 아름다운 정경을 우정에 담아 즐겼던 것 같다. 그 정경, 그 우정으로 나라 잃은 아픔을 달래며 심신의 수양을 쌓아 나갔을 것 같다.

오늘 우리의 걸음도 도학의 심오한 이치를 따라 온 것이 아니라 물과 바위, 나무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경관을 따르고 그 우정의 자취를 따라 왔을 뿐이다. 아직은 남았다. 이제부터 또 하나의 시작이다.

칠리계는 곧 선유구곡의 시작이다. 이제 우리의 걸음이 절정을 향해 가고 선유동천 그 아름다움의 한가운데로 들고 있다.

다시 선유구곡으로 든다.(2013.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