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에서 두 다리를 잃은 미군 중위와 명문대 출신 고액 연봉 여성 컨설턴트 간의 진솔한 사랑 이야기가 미국인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2011.10.11.조선일보)고 한다.
아프가니스탄 전쟁터로 나간 미 육군 댄 버스친스키(27) 중위는 지뢰를 밟아 두 다리를 잃게 되었다. 영화배우 나탈리 포트먼을 닮은 그의 연인 레베카 테이버(25)는 예일대를 졸업하고 맥킨지컨설팅에서 일하는 재원이다. 레베카는 댄의 엄청난 부상 소식을 듣고 혼절할 정도로 놀랐지만, 더 큰 절망에 빠져 있을 댄을 생각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레베카는 매일 댄에게 소소한 일상을 적은 이메일을 보내며 "남자는 긴 바지를 입고 다니니 괜찮아."라며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댄이 워싱턴DC의 월터 리드 육군병원으로 후송되자 병실을 찾아온 레베카에게 “날 떠난다 해도 미워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레베카는 “다리를 보고 남자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야.”라고 했다. 그들의 사랑은 점점 깊어져 레베카는 댄에게 "다리를 잃었으면 어때. 나를 얻었잖아."라고 말하며 위로해 주곤 했다.
이 이야기를 신문 보도로 읽으면서, 사랑은 역시 육체와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과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다시 새길 수 있게 해주는 사연이라 생각하면서도, 문득 어느 영화 속의 스토리를 떠올리게 했다. 1960년대 『돌아오지 않는 해병』, 『만추』, 『삼포로 가는 길』 등으로 잘 알려진 이만희 감독이 만든 영화 『귀로』의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어느 일간 신문에 연재소설을 쓰고 있는 소설가로, 겉으로 보기에는 사회적 명성도 있고 아내와도 행복한 생활을 꾸려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6.25때 참전했다가 허리에 입은 부상으로 성불구자가 되어 아내와 부부관계는 이룰 수가 없다. 이러한 남편에 대해 아내는 남편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갖은 정성을 다하지만, 때때로 가슴을 짓눌러 오는 외로움과 허탈감에 몸부림을 치기도 한다. 그러던 중 아내는 우연한 기회에 건장한 한 청년을 알게 되어 그와 사랑에 빠진다. 처음엔 남편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주저하지만 사랑이 불붙기 시작하자 그녀는 걷잡을 수 없는 욕정의 나락 속으로 빠져든다. 남편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괴로워 하지만, 아내의 외로움을 달래줄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는 오히려 지금까지라도 자기를 지켜준 아내를 고마워한다. 청년이 아내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멀리 떠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자고 하자 아내는 잠시 마음이 흔들렸지만, 남편에 대한 아내로서의 도리와 자기가 보살펴 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남편의 처지를 깨닫고는, 한때의 방황을 정리하고 가정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 영화는 아내로서 남편에게 정성을 다하는 정신적인 행위와 결핍된 욕구의 충족을 위한 본능적 행위라는 두 가지 요소의 대립과 갈등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결국은 남편을 받들고 순종하는 것이 여자의 도리라는 전통적 사회윤리관으로 결말짓고 있다. 이것은 이성적인 신념으로 감성적인 욕구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윤리관에 의해 감성적인 욕구를 억제하는 것으로 결말을 삼은 것이다. 그 윤리관에서 한 발짝 비켜서보면 역시 사랑이란 정신 혹은 마음만 가지고는 불완전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 그 이상주의적이며 정신적인 사랑의 순수성과 숭고함을 말하기도 하지만, 과연 정신과 육체, 마음과 몸을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인가. 몸이 따라 주지 않아도 마음만 있으면, 마음이 없어도 몸만 있으면 완벽한 사랑을 이룰 수 있을까. 만약 그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신기루나 모래성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몸이 피곤에 겨우면 마음도 지치기 마련이고, 몸이 고단하면 마음도 제 모습을 유지하기 어렵다. 몸은 마음의 그릇이고, 마음은 몸의 내용물이라면 부실한 그릇에 좋은 내용물을 담을 수 없고, 아무리 좋은 그릇이라도 내용물이 보잘것없으면 그릇은 제 구실을 할 수 없다. 마음이 가는 곳에 몸이 따라 가는 것이고, 몸 가는 곳에 마음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마음이 가 있는 곳에 몸이 없다면, 몸이 자리한 곳에 마음이 비어 있다면 모두가 참으로 공허하고 허황되지 않은가. 몸이 마음을 만들고, 마음이 몸을 이끈다고도 할 수 있다. 몸과 마음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다고 할 수도 없다. 마음만으로 혹은 몸만으로 무엇을 하기도 어렵고, 한다 하더라도 안정되게, 완전하게 하기는 더욱 어렵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사랑도 마음과 몸을 함께 나눌 때 완벽한 사랑을 이룰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다운 사이, 사랑하는 사이일수록 스킨십(skinship)의 필요성을 말한다. 스킨십이란 서로 피부를 접촉하여 사랑을 나누는 일, 즉 몸으로 나누는 사랑이라 할 수 있다. 스킨십은 이성간 애정의 표현뿐만 아니라, 어버이와 자식 사이를 비롯한 모든 인간관계에서 필요한 애정 행위라 할 수 있다.
아우야, 니가 만약 효자가 될라카머(되려고 하면)/ 너거무이(네 어머니) 보자마자 다짜고짜 안아뿌라/ 그라고 젖 만져뿌라, 그라머 효자 된다// 너거무이 기겁하며 화를 벌컥 내실끼다/ 다 큰 기 와이카노, 미쳤나, 카실끼다/ 그래도 확 만져뿌라, 그라머 효자 된다 (이종문, 효자가 될라카머)
육친 간에 몸으로 나누는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시다.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몸이 더욱 투명하고 절실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하는 시라고도 할 수 있겠다.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춤을 추고 있는 사람에게서 무용과 무용수를 분리할 수 없듯, 살아있는 사람에게서 몸과 마음을 어찌 분리시킬 수 있을 것인가. 마음으로 사랑하다 보면 몸을 사랑하게 되고, 몸의 사랑이 마음의 사랑을 더욱 간절하게 한다. 사랑하면 보고 싶고, 볼수록 마음이 더욱 깊어지는 것이 인간의 상정이 아니던가. 마음의 사랑이 몸의 그리움을 낳고, 몸의 사랑이 마음의 그리움을 빚어낸다고 할까.
전장에서 두 다리를 잃은 댄과 배우처럼 아름다운 레베카는, 다행히도 좀 불편하지만 몸과 마음을 다 가지고 있다. 마음의 사랑도 몸의 사랑도 순정을 다해 절절하게 나눌 수 있는 연인들이다. 비록 몸과 마음이 하나일지라도 불편한 몸 때문에 행여 마음마저 불편해지는 일은 없기를, 그리하여 그 사랑이 영원하기를 바라고 빌 뿐이다. 마음의 사랑과 몸의 사랑은 하나이지 않은가.
초겨울 찬바람이 불고 있다. 지금, 세상의 연인들은 어떻게 사랑을 속삭이고 있을까.♣(2011.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