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한촌에 온 겨울

이청산 2011. 12. 25. 10:37

한촌에 온 겨울



참 신기해요, 요렇게 여린 것이……!”

아내는 상추 잎을 썰어 무치면서 연신 감탄을 했다. 이른 아침 논들에는 된서리가 하얗게 내렸다. 아직도 텃밭을 지키고 있는 상추의 잎이 빳빳하게 얼어 있어, 손을 대기라도 하면 유리알처럼 곧장 바스러질 것 같다. 그렇던 것이 아침이 익어 햇살이 퍼지면 잠 깬 인사라도 하듯 파릇한 잎사귀를 흔들며 겨울의 하루를 맞는다.

겨울이 왔다. 논들은 맨흙이 드러났다. 가으내 출렁이던 황금물결은 콤바인 속으로 들어가 알곡이 되어 나오고, 일생을 마친 벼는 짚이 되어 논바닥에 잠자리를 잡는가 싶더니, 커다란 덩어리로 묶여 하얀 비닐 포장을 쓰고 논들을 떠나고 있다. 논들은 벼 벤 그루터기를 안고 겨울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이제 논들은 하얀 솜이불을 덮을 일만 남았다. 두터운 이불을 덮어쓴 채 봄꿈을 꾸다가, 새봄이 오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날 것이다.

과원의 과수들도 마당의 감나무도, 과실이며 잎을 지상으로 다 내리고 하늘의 바람만을 안고 봄을 기다리고 있다. 바람은 맨살로 서있는 나무를 어루만지는 듯하다가도, 별 부딪칠 것이 없는 가지가 밋밋하다는 듯 사납게 흔들고는 줄행랑을 치기도 한다. 이 때 한촌(閑村)은 한촌(寒村)이 되어 사람의 몸을 움츠려 들게 한다.

한촌의 바람은 유난히 시리다. 바람을 막아줄 빌딩도 없고, 길을 열기에 차게 하는 자동차들도 그리 많지 않다. 바람은 별 걸릴 게 없는 고샅을 지나 문도 없는 삽짝 안으로 잘도 든다. 약삭빠른 바람은 문틈까지 헤집고 들어와 사람의 등줄기를 파고들기도 한다. 이놈들을 내쫓자면 화목보일러에 장작을 지피거나 기름보일러의 눈금을 돋우는 수밖에 없다.

지난 가을까지만 해도 저녁답의 고샅걸에 돗자리를 깔고 마을을 화기에 젖게 하던 할매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요즈음은 한나절이 되어도 모습을 뵈기가 어렵다. 스산한 바람이 할매들에게 집만 적적히 지키게 했다. 간혹 지나다니는 자동차가 마을의 정적을 깨울 뿐, 고샅에 가끔씩 날리던 마른 감잎도 자취를 감추었다. 땅거미가 짙어지면 집집마다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텔레비전 불빛이 두터운 어둠에 싸여 얼음장 하늘에 뜬 별빛을 더욱 초롱하게 한다.

그러나 한촌의 겨울이 그리 적막한 것만은 아니다. 며칠 전에는 어느 할매 생신이라고, 동네 사람 모두 와서 아침을 같이 하자고 했다. 사람들은 마을회관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이장 목소리를 따라 생신 할매 집에 다 모였다. 대처에 사는 아들딸들이 와서 어매의 생일상을 푸지게 차렸다. 무병장수하시라고, 자손번창하시라고 축원을 드리며 훈훈한 겨울 아침을 맞았다.

엊그제는 또 어느 집 딸을 시집보내는데, 결혼식 피로연도 따로 있으련만, 결혼식 전날 동네 사람들을 모두 청하여 잔치판을 벌였다. 이바지 음식들을 함께 나누는 마을의 오랜 미풍이라 했다. 거방진 잔칫상에 불콰해진 남정네들의 얼굴만큼이나 따뜻한 겨울날이 온 마을을 화기롭게 감쌌다.

오늘은 마을 사람들이 한자리에 다 모였다. 노인회에서 그간의 보조금이며 성금을 아껴 두었다가 모처럼 어느 식당을 빌어 화합의 잔치판을 마련한 것이다. 젊은이들이래야 쉰 줄을 다 넘긴 사람들이지만, 몇 안 되는 젊은 사람들이 늙은이들을 잘 받들어주어 고맙다며,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하는 노소동락의 자리를 만들었다. 형아 아우야, 아지매 아재가 한데 어울리며 덕담 담은 술잔을 주고받았다. 말수가 적으신 동진네 할매도 기분이 좋다며 환한 웃음을 터뜨리고, 아재, 할배들의 너털웃음이 술잔을 가득 채우는 사이에 한촌의 겨울은 눈 슬듯 녹아갔다.

겨울이 한촌 사람들에게로 다가오고 있는 사이에, 사람들에게서 빠져나가는 것도 있었다. 세월이었다. 세월은 해를 싸안고 슬몃슬몃 사람들을 떠나갔다. 한 해가 저물어 갔다. 돌아보면 나에게도 참 각별한 한 해였다. 세월은 삶의 모습과 자리를 영 바꾸어 놓았다. 한 생애를 마감하게 했다. 도시와 조직의 회색빛 먼지를 털어내고, 자연과 인심의 맑은 바람 속을 살게 했다. 그 첫 겨울을 한촌의 청량한 바람 속에서 맞고 있다.

이 한촌에는 성장해 나갈 사람도, 젊음을 더해 갈 사람도 없다. 오직 슬금슬금 곁을 떠나는 세월만 가지고 사는 사람들뿐이다. 이들이 가진 세월을 바람 속에 다 내놓는 날이면 마을은 휑뎅그렁하게 비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절망할 일은 아니다. 세월이 아무리 사람들을 노쇠하게 하며 빠져나가도, 차디찬 추위도 녹여내는 따뜻한 사람의 정()은 결코 빠져 나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 물고기 잡아 올게, 술 한 잔 줘!”, “얼른 이리 오소, 해장국 끓여 놨어!”라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엔, 세상 모든 것이 다 사라질 때까지도 인정의 불잉걸이 이 순후한 사람들을 지켜 줄 것이다. 봄 새잎 돋듯 새록새록 돋아나는 인정들로 마음 가득 채워 이 시린 겨울 고개도 너끈히 넘을 수 있을 것이다.

한촌에 온 겨울은 이리 따스한 몸짓으로 새 봄을 향해 가고 있다. (2011.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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