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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세 문학소녀, 떠나다

이청산 2009. 5. 11. 20:58

57세 문학소녀, 떠나다

장영희 교수 별세… 엄마에게 '마지막 편지'

  • 입력 : 2009.05.11 03:01 / 수정 : 2009.05.11 14:42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그의 아름다운 미소를 볼 수 없게 됐다. 고난에 굴하지 않는 도전정신과 아름다운 글로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안겨줬던 장영희 서강대 교수가 9일 눈을 감았다./뉴시스

"엄마, 미안해 이렇게 먼저 떠나게 돼서 내가 먼저 가서
아빠 찾고 있을게… 난 엄마딸이라 참 좋았어"

"엄마 미안해, 이렇게 엄마를 먼저 떠나게 돼서.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 찾아서 기다리고 있을게. 엄마 딸로 태어나서 지지리 속도 썩였는데 그래도 난 엄마 딸이라서 참 좋았어. 엄마, 엄마는 이 아름다운 세상 더 보고 오래오래 더 기다리면서 나중에 다시 만나."

고(故) 장영희(57) 서강대 교수가 '엄마'에게 남긴 편지다. 장 교수가 죽기 직전 병상에서 쓴 마지막 글이다. 장 교수의 어머니 이길자(82)씨는 두 다리와 오른팔이 마비된 둘째 딸을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업어서 등·하교시켰다. 진눈깨비 내리는 날이면 딸을 학교에 못 데려다 주게 될까 봐 새벽에 일어나 연탄재를 부숴서 집 앞 골목길에 뿌려놓았다.

장 교수의 편지는 단 네 문장, 100자다. 지난달 28일 병원에서 퇴원해 집에 가기 직전, 병상에서 노트북 컴퓨터로 사흘 걸려서 썼다.

막내 여동생 순복(47)씨는 "통증과 피로감으로 정신이 혼미한 상태라 한 줄 쓰다 쉬고, 한참 있다 또 몇 자 보태고 하는 식으로 쓰느라 그렇게 됐다"고 했다.

암환자와 장애우의 희망이던 장 교수는 9일 낮 12시50분 눈을 감았다. 생애 마지막 8년 동안 장 교수는 세 번 암 진단을 받았다. 2001년 유방암 진단을 받고 완치됐으나 암이 척추로 전이됐고 다시 간까지 번졌다.

장 교수는 지난 2년간 24차례에 걸쳐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내년부터 보급될 중학교 영어 교과서와 수필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집필을 계속했다. 지난달 중순까지 병상에서 교정을 봤다. 수필집 에필로그에 장 교수는 "희망은 운명도 뒤바꿀 수 있을 만큼 위대한 힘"이라며 "난 여전히 그 위대한 힘을 믿고 누가 뭐래도 희망을 크게 말하며 새봄을 기다린다"고 썼다.

어머니에게 쓴 편지를 끝으로 병원에서 퇴원한 장 교수는 어머니, 여동생 순복씨 가족과 함께 살아온 서울 마포구 연남동 집에서 열흘을 보냈다. 지난 3일 이후에는 반(半) 의식불명 상태였다. 어린이날인 5일, 허리가 아파 누워 있던 어머니가 몸을 추스르고 장 교수 다리를 주물렀다. 순복씨는 "의식이 없던 언니가 엄마 손길을 느끼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엄마'라고 불렀다"고 했다.

장 교수는 지난 7일 재입원했다. 8일 조카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눈 뒤 9일 오빠 병우(62)씨 등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뒀다. 타계하기 직전 장 교수의 입에서 흘러나온 마지막 말은 "엄마"였다고 오빠 병우씨는 전했다.

[블로그] 당신은 진정 살기 위해 죽은 것입니다!
[블로그] "신은 인간의 계획을 싫어하시는 모양이다"

[사람과 이야기] 그녀의 삶, 그 자체가 기적이었다

우리 가슴에 꺼지지 않을 '희망의 불씨' 피우고… 떠나간 장영희 교수
소아마비로 평생 목발 9년간 세차례 암 판정
늘 희망의 끈 놓지않고 따뜻한 글로 가슴 울려

"끝이 안 보이는 항암 치료에 몸도 마음도 지쳐가지만, 독자에게 한 내 말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희망을 연구하고 실험하리라. 이 추운 겨울이 지나고 내년 봄 연구년이 끝날 무렵에 멋진 연구 결과를 발표할 수 있다면, 난 지금 세상에서 가장 보람된 연구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작년 12월 장영희 서강대 교수가 본지에 보내온 '2008 겨울, 희망편지―비켜라, 암!, 내가 간다'의 마지막 구절이다.

9일 타계한 장 교수는 본지 칼럼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 '영미시(英美詩) 산책' '아침논단' 등을 통해 고난에 굴복하지 않는 도전 정신과 긍정적 삶의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에게 희망을 안겨준 작가였다. 서강대 영문과를 졸업한 장 교수는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95년부터 서강대 교수로 재직해왔다. 김현승의 시를 번역해서 한국문학번역상을 수상했고, 수필집 '내 생애 단 한번'으로 올해의 문장상을 받았다.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아 두 다리가 불편했던 고인은 2001년 유방암에 걸렸으나 두 번의 수술과 방사선 치료를 받은 끝에 회복됐다. 그러나 2004년 9월 척추로 암이 옮아왔다. "신(神)은 인간의 계획을 싫어하시는 모양이다. 올가을 나는 계획이 참 많았다." 장 교수는 당시 3년간 본지에 연재하던 칼럼 '장영희의 문학의 숲' 중단을 알리는 마지막 글을 이렇게 시작했다. 이어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고 썼다. 이런 다짐대로, 그는 오뚝이처럼 병마를 이기고 이듬해 강단에 다시 섰다. 그러나 지난해 암이 간까지 전이되면서 학교를 휴직하고 최근까지 치료를 받아왔다.

장영희 교수가 지난 2005년 3월 척추암으로 강의를 중단한 지 6개월 만에 강단에 복귀하며 제자들의 환영을 받던 모습.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던 장 교수는 9일 눈을 감았다.
장 교수는 세 차례에 걸쳐 암과 싸우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2006년 두 번째 암 투병을 이겨낸 뒤에는 이렇게 썼다. "지난 3년간 내가 살아온 나날은 어쩌면 '기적'인지도 모른다. 힘들어서, 아파서, 너무 짐이 무거워서 어떻게 살까 늘 노심초사했고 고통의 나날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결국은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열심히 살며 잘 이겨 냈다. 그리고 이제 그런 내공의 힘으로 더욱 아름다운 기적을 만들어 갈 것이다." 장 교수는 투병 기간 중에도 '문학의 숲을 거닐다' '생일' '축복' 등의 책을 펴냈다.

장 교수는 장애우의 정당한 권익을 찾기 위해서 실천에 나선 행동가였다. 2001년 미국 하버드대 방문교수 시절, 7층짜리 아파트의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 꼭대기 층에 살던 그는 3주 동안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다. 장 교수는 이 아파트를 관리하던 보스턴 굴지의 부동산 회사를 상대로 싸워 사과와 함께 보상을 받아냈다.

유력 일간지 '보스턴 글로브'는 장 교수의 스토리를 머리기사로 소개했고, NBC TV와 지역 방송들도 앞다퉈 소개해 5400만 미국 장애인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장 교수는 당시 인터뷰에서 "장애인 학생들에게 '스스로 일어서라'고 가르쳐온 내가 적당히 타협할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장영희 교수는 최근까지 에세이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샘터)을 마무리하느라 바빴다. 유작(遺作)이 된 이 책 프롤로그에서 그는 "생각해 보니, 나는 지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기적을 원한다. 암에 걸리면 죽을 확률이 더 크고, 확률에 위배되는 것은 '기적'이기 때문"이라며 삶에 대한 강한 집념을 적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기적"이라며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그는 이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10일 빈소를 찾은 손병두 서강대 총장은 "투병 사실을 듣고, 장 교수에게 강의 수를 줄이라고 권유했는데 듣지 않았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떠났다. 하지만 암과 싸우고 있는 환자와 그 가족들, 장애로 힘들어하는 이들의 마음속에 '장영희'라는 따뜻한 촛불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독신이었던 장영희 교수의 유족으로는 어머니 이길자 여사와 오빠 장병우 전 LG 오티스 대표, 언니 장영자씨, 여동생 영주·영림·순복씨 등이 있다. 장 교수의 정신적·학문적 후원자였던 아버지 고(故) 장왕록 서울대 명예교수는 1994년 심장마비로 먼저 세상을 떴다.

[만물상] 장영희가 남긴 말 "다들 힘내"

  •  입력 : 2009.05.10 22:33
소녀 같은 단발머리에 옅은 미소, 잔잔한 감동을 주는 글 때문에 사람들은 장영희 교수가 조용하고 나직하기만 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들은 그의 다른 모습도 기억한다. 빠른 서울 말씨로 단칼에 푹 찌르는 촌철살인. 어느 해 가수 조영남이 장 교수 생일잔치를 열어주자 "둘이 결혼하는 거냐"는 우스갯소리가 나왔다. 장 교수가 한 마디로 주변을 잠잠하게 했다. "난 처년데 아깝잖아!"

▶장영희 교수는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제대로 앉지 못해 누워만 있던 소아마비 1등급 장애우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엄마 등에 업혀 학교에 갔고, 엄마는 그를 화장실에 데려가기 위해 두 시간에 한번씩 다시 학교에 갔다. 그 후에도 평생을 목발에 의지한 삶이었다. 그러나 장 교수는 '천형(天刑)'이란 말을 제일 싫어했다. 그를 버티게 한 건 삶에 대한 희망과 열정이었다.

▶"대학 2학년 때 읽은 헨리 제임스의 '미국인'이라는 책에는, 한 남자의 인물을 소개하면서 '그는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무서워 살금살금 걸었다'는 표현이 나온다. 나는 그때 마음을 정했다.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살금살금 걷는다면 좋은 운명도 깨우지 못할 것 아닌가.' 나쁜 운명, 좋은 운명 모조리 다 깨워가며 저벅저벅 당당하게, 큰 걸음으로 살 것이다, 라고."('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장 교수가 생산하는 희망의 바이러스는 그의 아름다운 문장을 통해 역경에 부딪히고 삶에 지친 동시대 사람들을 어루만져 주었다. 2004년 완치된 줄 알았던 암이 재발하자 그는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고 썼다. 일산 국립암센터의 환자들을 위한 서가에 장 교수가 쓴 책들이 그렇게 많이 비치돼 있고 손때가 묻어있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장 교수의 글이 주는 치유의 힘을 '장영희 효과'라고 했다.

▶장영희 교수가 8년에 걸친 암 투병 끝에 9일 천국으로 갔다. "남보다 느리게 걷기에 더 많이 볼 수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장 교수였으니, 짧은 생애였지만 보통 사람보다 많이 보고 갔을 것이다. 그리고 남보다 더 많은 것을 남겼다. 그는 조선일보에 연재한 '영미시 산책'에서 "'내 힘들다'를 거꾸로 하면 '다들 힘내'가 된다"고 했다. 힘들어도 다들 힘을 내 자기 안에 있는 용기와 인내, 열정의 깃발을 다시 흔들자는 얘기였다. 장영희 교수의 명복을 빈다.
 

'희망메신저' 故 장영희 교수 추모행렬

  • 연합뉴스
  •  입력 : 2009.05.11 10:47 / 수정 : 2009.05.11 11:27
암 투병 중 강단에 복귀해 우리 사회에 잔잔한 감동을 던졌던 서강대학교 영미어문ㆍ영어문화학부 장영희 교수가 지난 9일 지병인 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57세./연합
 
암 투병 중 강단에 복귀해 희망을 전도했던 고(故) 장영희 서강대 교수(영미어문ㆍ영어문화학부)의 빈소가 마련된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11일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고등학교 시절 장 교수의 글을 읽고 팬이 되어 서강대를 지원했다는 제자 김재엽(30)씨는 이날 아침 일찍 조문을 마친 뒤 “‘암 투병’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항상 밝은 모습으로 희망을 주셨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장 교수의 어머니는 먼저 하늘로 간 딸의 영정 앞에서 자리를 뜨지 못한 채 흐느껴 주위를 숙연케 했다.
몸이 불편한 탓인지 의자에 앉은 어머니는 “미안해”라는 말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슬픔을 토해냈다.
장 교수의 여동생들은 옆에서 어머니를 부축하며 “우리만의 ‘장영희’가 아니었고 모든 사람의 ‘장영희’였다”고 어머니를 위로했다.
장 교수의 오빠인 병우(62)씨는 “어제까지 제자, 학교 관계자 등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며 “가족을 사랑했고 제자를 사랑한 따뜻한 동생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암 투병 중에 동생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제자들이 운구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등 제자 사랑이 각별했다”고 전했다.

2001년 유방암에 걸렸다가 완치됐던 고인은 2004년 다시 척추암 선고를 받고 교수와 수필가로서의 활동을 중단했지만 2005년 봄 다시 강단에 돌아와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안겨줬다.

장 교수는 그러나 최근 병세가 다시 나빠져 학교를 휴직하고 투병 생활을 해오다가 9일 낮 12시50분 향년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장영희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뉴시스
  •  입력 : 2009.05.10 22:06
고 장영희 교수, 영문학자
‘헌데 글이 45편쯤 되면 책 한권 꾸리겠지? 전에 ‘내 생애 단 한번’은 41편이었거든. 제일 좋은 글을 여기 넣고 싶은데 새삼 보니 맘에 안 드는 글이 많네. ‘괜찮아’는 여기에도 집어넣었는데 서문에 흐트러진 글을 모으는 의미라고 쓸 거니까 괜찮겠지?’ (2009년 2월24일 편집자에게 보낸 e-메일)

그림작가 선정에서부터 제목, 디자인 콘셉트에 이르기까지 9일 세상을 떠난 장영희(57) 교수의 손을 거쳐 완성된 책이다. ‘내 생에 단 한번’ 출간 이후 2000년 10월~2003년 12월, 2007년 1월~2008년 6월 월간 ‘샘터’에 연재한 원고 57편 중 단행본에 수록할 것들을 가려내고, 중복되는 내용들을 정리했으며, 한 편 한 편 글을 다듬었다.

입·퇴원을 반복하면서 짬짬이 글을 손봤다. 2월25일 최종 원고 39편을 보냈다. 이어 3월30일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출판사에 넘기고 장 교수는 입원했다. 병상에서도 그녀는 출판사에서 1차 윤문을 거친 원고를 e-메일로 보내달라고 요청해 확인했고, 시인 김종삼(1921~1984)의 유족에게 연락해 그의 시 ‘어부’에서 책 제목을 따오는 것을 허락했는지, 추천사는 누구에게 부탁할지 일일이 점검했다.

입원 중인 4월23일 마지막 교정지와 표지 시안을 넘겨받아 1주간 검토한 뒤 4월30일 교정지를 출판사로 보냈다. 마지막으로 편집자와 연락을 주고받은 것은 4월16일이었다. e-메일로 ‘샘터’와 서면 인터뷰를 약속한 그녀는 4월24일 질문지를 받았으나 건강이 악화돼 결국 답변을 보내지는 못했다.

잠시 퇴원, 집에서 가족과 편안한 시간을 보내던 장 교수는 5월7일 갑자기 상태가 악화돼 다시 입원했다. 이어 5월8일 인쇄된 책이 나왔지만 그녀는 이미 의식이 없었다. 가족이 대신 책을 받아 병상의 그녀에게 출간 소식을 전했다. 결국, 장 교수는 병상에서도 놓지 않은 이 책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5월9일 저 세상으로 갔다.

책에는 2001년 미국 보스턴의 안식년 경험, 척추암 탓에 쉬었다가 일상으로 복귀하면서 연재를 재개했을 때, 다시 연구년을 맞았으나 암이 간으로 전이돼 미국행을 포기하고 국내에 머물게 됐을 때의 일들 등 9년간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고인이 이 책의 제목을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으로 정한 것은 무엇보다 기적의 책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나는 지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기적을 원한다. 암에 걸리면 죽을 확률이 더 크고, 확률에 위배되는 것은 기적이기 때문이다. … 나의 독자들과 삶의 기적을 나누고 싶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기적이고, 나는 지금 내 생활에서 그것이 진정 기적이라는 것을 잘 안다.”

기적이란 다른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프고 힘들어서 하루하루 어떻게 살까 노심초사하며 버텨낸 나날들이 바로 기적이며,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다.

고인은 자신이 ‘암 환자 장영희’로 비춰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스스로 ‘천형같은 삶’이라는 사람에게 그녀는 도리어 자신의 삶은 누가 뭐래도 ‘천혜의 삶’이라고 말했다. 세 차례 암 투병을 거치면서 쓰고 다듬은 글들이지만 결코 무겁거나 우울하지 않다. 암, 장애…. 자칫 암울해지기 쉬운 소재들을 적절한 유머와 위트, 긍정의 힘으로 승화시키는 문학적 재능과 여유는 장영희만의 독특한 힘이자 아름다움이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의 위대한 힘을 믿었다. 물이 자꾸 차올라오는데, 작은 섬 꼭대기에 앉아서 누군가 구해줄 것을 기다리며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눈먼 소녀의 이야기를 하며 누군가 “이런 허망한 희망은 너무나 비참하지 않나요?”라고 물었을 때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희망의 노래를 부르든 안 부르든 어차피 물은 차오를 것이고, 그럴 바엔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낫다. … 그리고 희망의 힘이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듯이 분명 희망은 운명도 뒤바꿀 수 있을 만큼 위대한 힘이다. 그래서 나는 누가 뭐래도 희망을 크게 말하며 새봄을 기다린다.”

고 장영희 교수는 서강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뉴욕 주립대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컬럼비아대에서 1년간 번역학을 공부했다. 서강대 영문과 교수 겸 번역가, 칼럼니스트, 중·고교 영어교과서 집필자로 활동했다.

정일(경인교대 미술교육과 교수) 그림, 236쪽, 1만1000원, 샘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