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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 작가, 나의 유언장 같은 이야기

이청산 2009. 12. 3. 17:03

조정래 작가, 나의 유언장 같은 이야기 [조인스]

2009.12.03 14:51 입력

여성중앙조정래는 40년 작가 생활을 돌이켜 ‘황홀한 글감옥’이라고 회상했다. 반백년 글쓰기가 얼마나 치열했기에 ‘글감옥’이고, 한편으론 또 얼마나 ‘황홀했다’는 건지 궁금해 그와 만나봤다.


『태백산맥』부터『아리랑』그리고 『한강』에 이르기까지 역사 소설만 32권, 원고지 5만 장을 써내려간 고집스런 조정래 작가는 기자에게 “하고 싶어 안달 난 ‘미치광이’들이나 쓰는 게 소설이고, 그게 바로 예술가의 삶”이라고 말했다.
조정래는 다른 문인들처럼 술을 즐기지도 않고 집필할 때면 일정표를 벽에 붙여두고 매일 목표량을 점검하는 작가로 유명하다. 탐욕을 누르고 글쓰기에 매진하려고 밥도 배부르게 먹지 않는단다. 그렇게 남다른 집념으로 40년을 버텼다. 작가의 말을 빌리면 “글 쓸 때마다 피를 말리며 온몸을 쥐어짜는 고통이 따른다”고 하는데, 그러면서도 하루에 15시간씩 책상 앞에 앉는 원동력은 뭘까.

“글에 몰두하다 보면 몸이 이상하게 변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는 자전적 에세이『황홀한 글감옥』을 통해 그 해답을 들려주며 “글의 내용들은 나의 유언장 같은 이야기”라고 전했다.
“하루 이틀이 아니고 몇 년씩 계속해서 글에 몰두하다 보면 몸이 이상하게 변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눈앞의 현실이 아득하게 멀어지고 소설 속의 현실이 바짝 눈앞으로 다가오는 것은 말할 것이 없고, 전신에 저릿저릿 전기가 통하는 현상도 일어납니다. 그 저릿거림은 저 혼자만 느끼는 의식이 아니라 실재의 증상으로 나타납니다. 문고리 같은 쇠붙이는 전기가 통해 만질 수가 없고, 심지어 아내의 손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작가는 이런 상태가 며칠 계속된 후에야 풀리지 않던 글의 매듭이 풀리고 써야 할 대목이 명쾌하게 떠오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한다. 문장이 완성되지 않아 고통에 몸서리치는 시간을 한참이나 지나서야 묘사가 떠오르는 적도 많단다. 바로 그런 맛, 괴로움 뒤에 만끽하는 그 기쁨과 성취감 덕에 고달픔을 감수하면서도 글을 쓴다.

사실 조정래 작가는 『태백산맥』을 집필할 때부터 크고 작은 직업병(?)에 시달려야 했다. 우선 하루의 절반 이상을 꼼짝 않고 책상 앞에 앉아 있다 보니 다리가 굳어 제대로 걷지를 못했다. 집중해 글을 쓸 때는 미처 느끼지 못하지만 집필을 멈추면 잔뜩 힘주고 움츠렸던 등과 팔, 어깨의 통증이 뼈마디가 저릴 정도로 몸을 괴롭힌다. 만성 피로 때문에 얻은 병도 한둘이 아니어서 눕기만 하면 기침이 심해져 두 달 동안 꼬박 소파에 앉아서 잠을 청한 경험도 있고, 위벽 두 군데가 헐어내릴 만큼 심한 위궤양에도 시달려봤다. 워낙 오랜 세월 동안 하루 종일 앉아만 있으니 고약한 종기가 늘 엉덩이를 괴롭혔고 장이 아래로 쏠려 탈장 수술까지 받았다. 그렇게 원고지 5만 장을 채워놓고 나니 마흔의 젊은 작가가 일흔을 바라보게 됐다. 흐른 시간으로만 따지면 아쉬울 수도 있는 세월, 하지만 그 시간은 후회 없이 떳떳하다. 그 고통은 작가로서, 예술가로서 그가 스스로 느낀 숙명이자 의무였기 때문이다.

“예술은 상대방에게 감동을 주는 걸 전제로 하잖아요. 문학은 감동을 줘서 생활에 지친 사람들의 영혼을 깨워줘야 하는데, 그러려면 작가는 8시간 노동하는 보통 사람들보다 적어도 두 배의 노력을 해야 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하루 평균 15시간 이상은 글을 쓰려고 노력했고 20년 동안 술 한잔도 안 마시고 쓰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다 보니 되더군요.”

그렇다고 조정래를 평생 글쓰기에만 매달린 외골수라고 보면 오산이다. 그의 예술가적 재능은 다른 방향으로도 발휘되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그림이다. 조정래의 그림 솜씨는 가까운 지인들 사이에선 이미 유명하다. 학창 시절에는 잠시나마 화가와 만화가를 꿈꾼 적도 있었고, 그의 그림 솜씨를 인정한 선생님이 미술반 입부를 권유한 적도 있었다. 아내인 김초혜 시인에게 연애 시절 처음 준 선물도 직접 그린 초상화였다니 범상찮은 솜씨를 짐작할 수 있다. 요즘도 작품 구상차 취재 여행을 가면 그곳 풍경을 수첩에 담아 오는데 그 스케치가 예사 솜씨가 아니란다.

조정래 작가는 아직 그림에 대한 꿈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요즘도 틈만 나면 미술 도구를 사 모으고 언젠가 본격적으로 붓을 잡을 계획도 세워두고 있다.



“소설을 쓰기 어려워질 때 저는 새 인생을 시작하듯 차분하게 그림을 그릴 예정입니다”


“이 나이까지도 그림 그리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어요. 그래서 손자들에게 줄 50가지 색 크레용이나 24가지 색연필을 살 때는 제 것도 꼭 삽니다. 하지만 상실한 꿈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물감을 사재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언젠가는 그림을 그릴 작정으로 착실하게 준비하고 있는 것이죠. 헤르만 헤세가 그랬듯, 더 늙어 그 복잡한 구성을 해야 하는 소설을 쓰기 어려워질 때 저는 새 인생을 시작하듯 차분하게 그림을 그릴 예정입니다.”

조정래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는 빈센트 반 고흐다.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하던 화가였는데 등단 후 그에 대한 경외감을 더욱 크게 느낀 계기가 있었다. 20여 년 전, 『태백산맥』취재를 위해 찾은 지리산 산장에서였다. 문득 새벽하늘을 올려다봤는데 그 크고 아름다운 별빛의 향연에 넋을 잃었다. 작가는 아름다운 밤하늘을 글로 묘사해 보려고 했지만 단어와 문장이 마음속에서만 맴돌았다. 그 순간 고흐가 그 아름다운 별을 유화로 표현했던 그림이 떠올랐고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나중에 그림을 그린다면 꼭 자연을 피사체로 삼겠다고 다짐했다. 조정래는 요즘도 작품 번역 등의 일로 파리를 찾을 때마다 화가들의 발자취를 따라 미술관을 순례한다. 물론 가장 큰 감동은 고흐와의 조우였다.

“저는 ‘파리는 백 번 가도 좋은 곳’이라고 말합니다. 수많은 미술관이 있기 때문이죠. 그 황홀한 감동과 넘쳐나는 행복감. 수많은 화가가 화폭 위에 토해낸 열정을 만나고, 현란한 색깔이 물결쳐 영혼을 적시는 그 감동을 뭐라고 형용할 수 있을까요. 제가 1974년에 출간한 소설집『황토』의 표지로 고흐의 ‘까마귀 떼 나는 들녘’을 골랐어요. 그런데 고흐의 하숙집 뒤편에서 그 그림의 무대를 봤습니다. 가까운 묘지에서는 그의 무덤을 봤지요. 무덤에는 담쟁이덩굴만 무성하게 덮여 있었습니다. 조심스레 그 잎 하나를 따서 한국으로 모셔왔고 국어사전 속에다 잘 눌러 말려 『황토』와 함께 고이 모셔놓았습니다.”

글과 그림에 두루 능하니 이것저것 다른 재주도 많아 보인다. 게다가 작가나 예술가들이라면 노는 재주도 남다른 경우가 허다하지 않던가. 하지만 그는 소위 ‘주색잡기’에는 취미가 없다. 대학 시절에는 문학청년들과 어울리며 화투며 당구, 바둑과 술을 두루 접해 봤다. 허나 재미를 좇아 밤새워 그 일에 매진해 보니 금세 정이 떨어지더란다. 문학과 인생을 논하며 한껏 멋부리던 친구들이 잡기만 시작되면 서로 이겨 돈 따려고 눈에 불을 켜는 모습을 보는 게 싫어서였다. 그 시간이 아까워 놀이 문화에서 의도적으로 멀리 떨어져 지냈고 가끔 지인들과 어울려 마시던 술도 역사 소설 쓰느라 20년 넘게 멀리하다 보니 자연스레 끊었다. 그래서인지 요즘도 남들과 어울려 놀러 다니는 일에는 도무지 익숙지가 않다.
“똑같은 이유로 골프에도 손을 대지 않습니다. 여기저기서 유혹이 많았지만 대학 시절에 이미 깨달은 걸로 충분한데 또 겪어볼 필요는 없는 것 아니겠어요. 돈 들고 시간 잡아먹는 운동을 할 바에야 봉사 단체에 기부하고 그 시간에 좋은 책 읽기도 바쁘죠.”

하지만 그는 숱한 등장인물의 일생을 다루는 소설가다. 어울려 노는 데 익숙지는 않아도 사람들의 일상을 관찰하고 그들과 소통하는 건 즐긴다. 최근 펴낸 에세이도 독자들에게 직접 받은 질문에 고스란히 답한 형태고, 지난 10월 10일에는 서울시에서 주관한 북 페스티벌에서 독자와의 만남을 가졌다. (작가는 한글날 즈음에 열리는 ‘책 잔치’에 북 페스티벌이 웬말이냐며 역정을 냈다.)

작가는 독자들과 소통하는 자리에서 스스로의 글쓰기 인생을 돌이켜보며 솔직한 소회를 전했다. 생에 절반 이상을 그저 글쓰기에만 매달렸던 삶, 돌아보면 한편으로는 뿌듯하기도, 또 한편으로는 포기해야만 했던 것들에 대한 아쉬운 마음도 있을 터다. 그에 대한 작가의 진심은 뭘까. 조정래는 이렇게 답했다. “너무 힘들어서 지나온 삶을 다시 살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은 황홀할 정도로 만족한다”고. 때론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누구에게 떠밀리지 않고 스스로 선택해 걸어온 길이기에 행복한 길이었을 터다. 조정래 작가는 “만족을 모르는 배부른 거지가 되지 말고 적극적으로 인생을 바라보면 누구나 황홀하게 살 수 있다”는 조언을 잊지 않았다. 역사 소설로 20년 넘게 뚝심을 부린 작가여서 그런지 조정래 작가의 훈수는 왠지 더 가깝게 들린다.

그렇게 원고지 5만 장을 채워놓고 나니 마흔의 젊은 작가가 일흔을 바라보게 됐다. 흐른 시간으로만 따지면 아쉬울 수도 있는 세월, 하지만 그 시간은 후회 없이 떳떳하다

“사람들이 죄다 출세에 급급하고 돈 많이 버는 직업을 찾아 허둥거리지만 이제는 그런 유치함에서 벗어나야죠. 하고 싶은 일, 스스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일을 찾으면 억지 공부에 떠밀리지 않아도 되니까요. 인생은 내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지잖아요. 여유롭게, 좀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가치를 마음에 담은 사람을 많이 만났으면 좋겠어요. 한 달에 400만원 버나 300만원 버나 1년에 1200만원 차이인데. 그 차이에 마음 상하지 않고 그냥 만족하면서 살 줄 아는 그런 사람 말이에요.”

취재_이한 기자 사진_김연지(studio lamp) 자료 제공_시사IN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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