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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울수록 말 한마디, 표정 하나라도 나눠야"

이청산 2008. 11. 17. 13:47

"어려울수록 말 한마디, 표정 하나라도 나눠야"
● 동안거 결제 법문차 서울 나들이 법정 스님
지난 겨울 크게 앓고나니 철들어… 차 마시고 책 읽는게 모두 고마운 일
행복도 불행도 모두 순간일 뿐, 인생 지나가면 돈이 아니라 德만 남아
[조선일보] 김한수 기자 hansu@chosun.com  2008.11.17


▲ 법정 스님은“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빚지고 있으며, 나누는 일을 통해 보상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또 다시 겨울이다. 계절의 변화와 함께 경제한파 또한 매섭게 불어오고 있다. 사람들이 힘들어할 때는 따뜻한 위로를, 세상이 나태하고 흥청망청할 때는 따끔한 질책을 던져온 법정(法頂) 스님. 지난해 겨울 큰 병을 겪은 후 부쩍 삶에 대한 고마움을 느낀다는 법정 스님은 오늘의 현실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지난 12일 서울 성북동 길상사 동안거(冬安居) 결제 법문을 위해 서울 나들이를 한 법정 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마침 이번 주 산문집 《아름다운 마무리》(문학의숲)를 펴낼 예정이기도 하다.

―최근 법문과 글에서는 '고마움'에 대한 표현이 많습니다. 건강을 회복한 후 다시 음악을 들으니 '울컥 눈물이 났다'는 구절도 있습니다.

"평소 호흡기가 좋지 않았는데 지난해 겨울에는 크게 앓았습니다. 외국에 나가 치료를 받았지요. 이제는 회복됐는데 앓고 나니 철이 드는 것 같습니다. 특히 앞으로 이웃에게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부러 거리를 두고 멀리하느라 인정머리 없이 대한 것이 죄송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어졌습니다. 하루하루 내 의지대로 살 수 있다는 것, 차 마시고, 책 읽고, 음악 듣고, 채소밭 가꿀 수 있다는 것이 모두 고마운 일입니다."
―요즘 하루 일과는 어떠신지요?

"새벽 4시에 일어나 예불, 좌선하고 6시엔 차를 마십니다. 다기(茶器)를 매만지면서 하루 생각의 실마리를 푸는 시간입니다. 오전 중에는 채소밭을 돌보고 좀 어정거리다가 좌선하고 글 씁니다. 12시에 점심공양하고 2시까지 산길 여기저기를 대지팡이 짚고 산책합니다. 오후엔 정진(좌선)하고 나무도 패고 낙엽 쌓인 것 치웁니다. 저녁엔 어둡기 전에 공양하고 7시부터 9시까지는 촛불이나 등잔 밑에서 책을 읽거나, 나가서 낙엽 지는 소리, 시냇물 흐르는 소리에 귀 기울입니다. 무엇엔가 귀 기울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혼자 있게 되면 내면의 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새 산문집 제목이 《아름다운 마무리》입니다. '마무리'는 무슨 뜻입니까?

"마지막이 마무리가 아닙니다. 순간순간 마무리하고 새 출발해야 합니다. 산다는 것은 순간순간입니다. 행복과 불행도 순간이고, 선한 생각과 악한 생각도 순간에 일어납니다. 순간을 참지 못해 뛰어내리기도 하지요. 그래서 순간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순간순간 자신답게, 자기 삶의 주인이 돼야 합니다."

―스님 경우는 어떻습니까?

"솔직히 저도 24시간 내내 깨어있지 못합니다. 하루의 5분의 1이나 6분의 1이 될까 말까…. 그래서 늘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있습니다."

―당시 불교계에서는 드문 일이었지요. 스님은 이미 1970년대부터 신문칼럼을 쓰고 산문집을 펴냈습니다.

"해인사 선방 시절, 하루는 장경각에서 노(老)보살 한 분이 내려오면서 '8만대장경은 어디 있냐?'고 물어서 '지금 내려오신 곳에 있습니다' 했어요. 그랬더니 '아, 그 빨래판 같은 거요?'하는 겁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우리 불교가 옛것만 답습하면 8만대장경 말씀도 '빨래판 같은 것'에 불과할 뿐인 것이지요. 쉬운 말로 번역하고, 살아있는 언어로 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사회적 존재이기도 합니다. 혼자 살지만 세상과 소통하는 내 방식은 글쓰기인 셈이지요."

―스님은 40년 된 대야, 30년 된 거울을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오래된 물건은 사소할지 몰라도 소중한 것입니다. 세월의 연륜이 쌓여있지요. 시주의 고마움을 새삼 깨닫고 풋풋하던 '풋중' 시절의 기상 같은 것을 되새기는 계기도 됩니다. 묵은 것, 옛것은 단순히 낡은 것이 아니라 지혜가 배어있습니다. 유산이 없는 삶은 뿌리 없는 나무처럼 붕 떠있는 삶입니다."

―스님은 21세기에 사는 사람들에게 20세기 혹은 그 이전의 가르침을 전하는 느낌이 듭니다.

"21세기가 됐다고 갑자기 21세기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소한 것 같아도 세상일은 관계입니다. 사람과 사람, 물건, 자연의 관계 같은 것이죠. 특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아무것도 끼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 사이에 끼어든 물질 때문에 힘들어하는 현대인들에게 전통문화의 가치를 알려줄 필요가 있지요."

―요즘 미국발(發) 경제위기로 우리 경제도 어렵습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빚지고 있습니다. 저도 얼마나 많은 빚을 졌는지 모릅니다. 살아있는 동안 보답하고 가야겠다는 생각뿐입니다. 우리 모두는 나누는 일을 통해 보상해야 합니다. 이웃에게 은혜를 회향(回向)해야 합니다. 그 은혜를 갚지 않고 가둬놓으면 빚이 다음 생까지 연장됩니다. 인생에서 무엇이 남습니까? 집? 예금? 명예? 아닙니다. 몸뚱이도 두고 가는데. 죽고 난 후라도 덕(德)이 내 인생의 잔고(殘高)로 남는 것입니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서민들이 고통받습니다.

"우리 주변에 누군가 가난한 것은 나눔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어려울수록 물질뿐 아니라 말 한마디, 표정 하나라도 나눠야 합니다. 나눌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또 한 가지, 모든 것은 변하고 유동합니다. 고통스러운 일도 한때일 뿐입니다. 우리가 100m 달리기 할 때 30~40m에서 장애물을 만났다고 포기하면 안 됩니다. 남은 세계가 있는데, 이 한때를 극복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내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저는 늘 행복할 때는 매달리지 말고, 불행할 때는 받아들이라고 강조합니다. 대신 늘 주시해야지요. 그러면 행복과 불행에 좌우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스님 글에 '모든 사람은 세상에 하나의 씨앗을 가지고 온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씨앗에 맞는 땅을 찾아 꽃 피우고 열매 맺어야 합니다. 그런 땅을 찾으려면 준비가 돼 있어야 합니다. 삶은 저마다 자기 그릇대로 풀리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일은 될 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준비 된 대로'라는 뜻이지요. 자신의 씨앗을 잘 가꾸십시오."
  • ▲ 지난 12일 동안거 결제 법문으로 서울 나들이를 한 법정스님은 현재의 경제위기에 어려움에 처한 사부대중이 "어려울수록 나누워야한다"고 강조했다. /이진한 기자

 

입력 : 2008.11.17 04:57 / 수정 : 2008.11.17 07: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