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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사의한 이외수의 몸

이청산 2008. 11. 8. 19:03

이외수 인터뷰…불가사의한 이외수의 몸


작가 이외수가 화려하게 조명받고 있다. 지난달 한국대학신문이 창간 20주년을 맞아 전국 대학생 2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좋아하는 문인’ 1위는 황석영도 이문열도 조정래도 아니었다. 이외수였다. 문학동네뿐이 아니다. 이외수는 드라마(‘크크섬의 비밀’)에 이어 라디오(‘이외수의 언중유쾌’) 출연, CF 촬영 등으로 정신없이 바쁘다. 산문집 『하악하악』은 판매 40만 부를 훌쩍 넘어섰다. 고정독자 수십만 명. 그는 스스로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독립군 스타일’이라고 말한다. 만 62세 깡마른 이 초로(初老)의 작가 매력은 도대체 무엇일까. 

경기도 포천시에서 백운계곡을 건너 강원도 화천군으로 들어갔다. 많은 제대 군인들의 추억이 서린 사창리를 거쳐 상서면 다목리 ‘감성마을’에 도착했다. 아담한 단층집. 디자인이 참 예뻤다. 경기도 파주 헤이리의 예술인마을에 가면 클래식 애호가인 아나운서 황인용씨의 음악카페 ‘카메라타’가 있다. 살림집을 겸한 카메라타를 설계한 건축가 조병수씨가 “나는 이외수 애독자”라며 자진해 거의 무료로 설계해 준 집이란다. 뒤뜰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고, 고양이 한 마리가 현관에 웅크리고 있다 낯선 일행과 눈이 마주치자 몸을 숨겼다. 부인 전영자(56) 여사가 나와 반갑게 맞아주었다. 거실에 자리 잡으니 한 청년(문하생)이 조심스레 차를 따라주었다. 그는 전날 금연보조제 CF 녹음을 끝내고 모처럼 쉬고 있다고 했다. 인터뷰는 10월 27일 진행됐고, 여러 차례 전화 인터뷰로 보충취재를 했다.

불가사의한 이외수의 몸

-오랜만에 뵙습니다. 술에다 담배까지 끊으셨다면서요.

“술은 3년째 안 먹고 있고 담배는 지난해 12월 17일 끊었어요. 하루 예닐곱 갑을 피웠는데, 조금씩 줄이려 했더니 도저히 안 돼. 명색이 작가라는 놈이 이거 하나 못 끊나 하고 단번에 확 끊어 버렸어요. 그랬더니 몸이 놀랐는지 탈이 났어. 장염이 궤양으로 번져 올해 3월 춘천까지 가서 대수술을 받았어요. 지금은 멀쩡해. 평생 45㎏(키는 1m69㎝)이었는데 며칠 전 재보니 50㎏이에요. 종합검진에서도 ‘이상 무’래. 의사가 불가사의라고 하더군요.”

(젊은 시절의 이외수는 소주 30도짜리를 한 자리에서 됫병으로 2병을 마셨다. 글씨를 잘 써서 육군본부 총무과 필경사로 군 복무를 했는데, 전입 첫날 내무반장이 2홉들이 소주 한 병을 권하자 소주병을 입에 물고 뒷짐을 진 채 한 방울도 안 흘리고 다 들이켰다. 덕분에 내무반장의 귀여움을 받았다.)

-요즘 무척 바쁘신데, 일각에선 ‘작가인지 탤런트인지 헷갈린다’고 비판하던데요. 문단 주류도 이외수를 애써 외면하는 분위기가 역력합니다. 속으로는 부러워하거나 당혹해하겠지만.

“칼국수 잘 끓이는 놈이 수제비도 잘 끓이는 격 아닐까요. 섹소폰 불다 클라리넷 불고 피아노도 치는 거죠. 시인은 시, 소설가는 소설만 쓰는 게 아름다운 지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게는 그런 말이 기득권을 지키겠다는 소리로 들려요. 여하튼 남을 씹는 사람은 능력 없는 사람이야. 뭔가 하는 사람은 능력 있는 사람이고.”

-올봄 촛불집회 때 정치적으로 해석될 발언을 해서 화제였죠. ‘낚시 달인처럼 행세하던 놈이 막상 강에 나가니까 배스와 쏘가리도 구분 못하더라’든가, ‘백성이 손가락질한다고 백성의 손가락을 자르는 왕이 있다면 백성은 팔다리가 모조리 잘라져 절구통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왕에 대한 항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말들이 주목받지 않았습니까.

“주목보다는 시달림을 많이 받았죠. 그냥 얘기 한마디 했을 뿐인데. 아직도 내가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갖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내가 제일 존경하는 조상이 양녕대군이에요. 대궐 담벼락 넘어가서 음주가무를 즐기던 사람이지. 내 혈관에 그분 피가 제일 많이 흐를 겁니다. 정치나 벼슬은 체질에 안 맞아요. 내가 싫어하는 일이 살아서 관(棺) 속에 들어가는 것과 걸어서 관(官)에 들어가는 겁니다. 난 면사무소도 가기 싫어해요.”

쫄쫄 굶어본 경험에서 나온 애정

-우리 사회는 계층·세대·지역 간 소통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특이하게도 초등생부터 노인까지 폭넓은 팬을 확보하고 있어요. 비결이 뭘까요.

“국밥집 욕쟁이 할머니를 연상하면 돼요. 욕을 해도 감정 아닌 애정이 섞인 욕을 하잖아요. 상대의 애정이 느껴지면 소통은 저절로 됩니다. 내가 처음 인터넷에 들어가니까 나이 많다고 싫어하거나, 버릇없이 굴거나, 책이나 팔아먹으려는 놈 취급을 하더라고. 그러나 그게 아닌 걸 깨닫고부터는 얘기가 통해요. 애정? 내 애정은 쫄쫄 굶어 본 경험에서 나왔어요. 옛날엔 3일 정도는 일상적으로 굶었고, 라면 한 개로 일주일을 버틴 적도 있어요. 감자튀김 20원어치 사 먹고 다음날 종일 굶고, 번데기 20원어치 사 먹고 다음날 또 굶고…. 이런 식으로 1년을 보낸 적도 있죠. 인간 이하로 살아본 경험이 정말로 인간에게 애정을 갖게 만들더라고요.”

(혹심한 가난을 어떻게 견뎌냈느냐고 묻자 이외수는 “작가가 되겠다는 놈이 이런 고생쯤이야”라는 마음으로 버텼다고 말했다. 1970년대 강원도 춘천에 살던 이외수의 퀴퀴한 자취방은 작가 지망생들이 수시로 드나들던 사랑방이었다. 돈이 없어 겨울에도 대개 불을 때지 못했다. 손님들은 방문할 때 소주와 라면·연탄 따위를 사왔다. 시장 좌판에서 시래기나 비지를 도넛 모양으로 빚어 당시 돈 10원씩에 팔았는데, 이것도 선물용으로 인기 품목이었다. 자취방의 솥은 씻지 않아서 항상 무언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이외수는 “100도가 넘으면 안전하다”며 라면·비지·시래기 등속을 한꺼번에 넣고 끓여 요깃거리 겸 술안주로 삼았다. 이런 처지였으니 연애사업은 순조롭지 못했다. 딸이 이외수와 사귀는 걸 알면 아버지·어머니는 물론 오빠들까지 기겁하며 말리곤 했다. 애인에게 차인 추운 겨울날 춘천 소양로의 차디찬 자취방에 술 취해 들어와 숨 죽이며 울다가 이외수는 뇌까렸다. “아, 쓰발… 외로운 내 XX.”)


사창가 방에서 도 닦으며 탈고한 첫 장편소설

-그 어려웠던 시절에 습작에 매진해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당선(72년 ‘견습어린이들’)하고, 3년 뒤에는 ‘세대’지 현상공모 당선(중편소설 ‘훈장’)으로 중앙문단에도 등단했지요. 사창가가 무대인 장편소설 ‘꿈꾸는 식물’(78년)은 실제로 춘천시내 사창가 방에서 탈고한 작품이죠?

“아, 장미촌 8호집이었지요. 그때 도 좀 닦았지. 수도를 엄청나게 했어요. 밤마다 옆방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오는데, 글은 써야겠고, 젊은 놈이 미치겠더라고. 장미촌 언니들은 내가 글 쓰러 들어온 거 아니까 ‘저 오빠는 아니야’라며 눈길도 안 줬어요. 가끔 손님이 행패를 부리면 내가 나서서 수습해 주기는 했지. 8호집 이웃에 주인집 초등학생 아들이 살고 있었는데 몇 년 뒤 출판된 소설을 들고 가니 대학생이 되었더라고요. 주인장에게 ‘아들이 대학생이고 하니 이 장사 그만두시는 게 어떠냐’고 진심으로 권했어요. 그랬더니 다음날로 포주 일을 접었더라고. 길에서 만나 그 얘기를 듣고 반가워서 ‘대신 무슨 일 하시느냐’고 했더니 화원을 차렸대요. 꽃집 말이야. ‘아이구, 화대는 똑같은 화대로군요’라고 말해 줬지.”

-부인과의 연애·결혼 이야기가 많이 회자되던데요. 아무 비전도 없어 보이는 소설가를 반려자로 택한 것도 그렇지만, 지금까지 든든한 매니저 역할을 하시는 걸 보면 부인 복이 있어 보입니다.

“(웃으며)매니저? 아이고, 내가 노예계약을 맺은 거지. 요새는 하루에 스케줄이 서너 건이나 돼요. 다 이 사람이 관리해. 나도 기왕에 화천에 터를 잡았으니 화천을 많이 알려야겠다고 생각해 웬만하면 인터뷰 요청을 거절 안 해요.”

(기자가 보기에 이외수와 전 여사는 상보적 관계다. 이외수는 돈 얘기를 잘 못하고 남에게 떼이기도 일쑤다. 70년대 말 시인 L씨가 작가들의 대표작을 모아 책을 내고도 인세 한 푼 주지 않은 적이 있다. L씨에게서 인세를 받아낸 사람은 딱 두 명, 황석영과 이외수였다. 황 작가는 “안 주면 때려 죽이겠다고 협박해 받아냈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이외수의 경우 부인이 나섰다. 전 여사는 갓난아기인 장남 한얼이를 업고 서울의 L씨 사무실에 쳐들어갔다. 바닥에 포대기를 깔고 아기에게 젖을 먹여 가며 인세를 요구했다. 며칠을 따라다니자 L씨도 질려 돈을 내놓았다. 이외수와 미스 강원 출신의 전영자 여사는 76년 11월 26일 결혼했다. 무료로 식장을 빌려주던 춘천 여성회관에서 1차 결혼식을 치르고, 의암호 부근 김유정 문인비로 가서 2차로 식을 올렸다. 이외수는 선배 문인 김유정에게 ‘평생을 같이할 여자가 생겼습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라고 신고 겸 맹세를 했다. 부부의 생활고는 불문가지. 전 여사는 ‘연탄(19공탄)을 한꺼번에 5장 산 게 가장 많이 사본 기억’이라고 말했다. 아이를 임신해도 임신복부터 기저귀·분유까지 모든 게 없었다. 전 여사는 지금도 울적할 때면 시내에 나가 필요하지도 않은 임신복을 산다. 가슴 아픈 가난의 추억 때문이다.)

외계인과 교신하고 달친구와 채널링

-선생님의 그림·글씨 실력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싸움을 잘했다든가 젓가락을 기막히게 던지는 솜씨는 모르는 이가 많을 겁니다.

“싸움실력이야 옛날 얘기고…. 나무젓가락을 던져 함석판을 뚫는 기술 정도는 누구나 한 달이면 배울 수 있는 거예요. 자꾸 ‘나무는 쇠를 못 뚫는다’는 선입관에 휘둘리는 게 문제지. 그래도 나는 사람한테는 젓가락을 던지지 않았어요. 기 죽이려고 겁만 준 거지.”

(이외수는 원래 화가 지망생이었다. 그동안 시화전만 50여 회 열었다. 지난해 작고한 부친(이승윤)은 “그토록 원하던 홍익대 미대에 외수를 진학시키지 못한 게 가슴 아프다”고 회고했었다. 이외수의 개성 있는 글씨체(일명 나무젓가락체)는 인터넷 서체로 개발돼 곧 시판될 예정이다. 젊은 시절의 이외수는 젓가락을 잘 던졌다. 자취방 장롱 위에 놓인 라면 박스를 향해 나무젓가락을 던지면 미리 예고한 지점에 팍팍 꽂혔다. 삼양라면의 ‘양’자의 ‘ㅇ’ 받침에 정확히 꽂히는 식이었다. 한번은 술집에서 덩치 큰 태권도 사범과 시비가 붙었다. 이외수가 겁만 주려고 사범의 몸 근처로 쇠젓가락을 던졌는데, 운 없는 사범이 얼떨결에 손을 뻗어 막다가 젓가락이 손바닥에 꽂히고 말았다.)

-춘천을 떠나 화천에 정착한 게 재작년이죠. 화천군으로서는 지자체 발전에 선생님을 최대한 활용하고 싶을 텐데요.

“그해 1월에 왔죠. 홍천군·양구군, 그리고 고향인 경남 함양에서도 오라는 제의가 있었지만 화천을 택했어요. 화천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적이 있습니다. 군수(정갑철)가 문화적 열정이 정말 대단한 분이에요.”

-어려운 예산에 감성마을도 조성해 주었으니 지역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부담이 크겠네요.

“그럼요. 해마다 두 번씩 문학연수를 하는데, 수업료는 무료지만 식사나 잠은 이 마을에서 해결하도록 합니다. 연수생들이 돈을 쓰고 가야 지역에도 좋지요. 화천에는 군부대가 많잖아요. 부대에서 정기적으로 관심사병(문제사병)들을 감성마을에 보내오면 내가 정신교육도 해주고 있어요. 체중 45㎏인 나도 36개월간 군생활을 했다, 너희는 한 명 한 명이 다 보석 같은 존재다, 힘내라, 뭐 이런 강연이죠. 효과가 좀 있나 봐요. 어떤 사단장이 사병들의 밝아진 모습을 보고 ‘야, 이외수가 애들 마약 먹여 보냈느냐’고 농담을 하더래요.”

-외계인과 교신한다는 건 정말입니까.

“그럼요. 일반인이 그걸 납득하려면 비물질계의 의식체계에 대한 상식을 갖춰야 해요. 바위·산·강에 의식이 있느냐, 있다, 이런 상식을 갖고 있어야 납득되고 대화도 가능해집니다. 내가 달 친구들과 채널링(channeling·교신)해서 얻은 정보에 따르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도 전용 채널러(channeler)가 있어요. 거기서 얻은 정보로 영화 ‘ET’ 같은 걸 제작할 때 도움을 받았다는 거죠.”

-혹시 좌우명이 있나요.

“‘쓰는 자의 고통이 읽는 자의 행복으로 남을 때까지’예요. 죽을 때까지 쓸 겁니다. 한동안 쉬다 내년 초에 지금까지와 다른 장편소설을 시작할 거예요. 흔히 ‘목숨 바쳐도 아깝지 않은 소설’이라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지요. 나도 환갑이 지났으니 그런 작품 하나 써야죠. 난 그동안 산전·수전·공중전에 ‘네티전(네티즌+戰)’까지 다 거친 놈입니다. 남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소설을 계속 쓸 겁니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춘천이 고향인 기자는 중학교 1학년 때 이외수를 처음 만났다. 중 3 때 이외수의 권유로 난생 처음 소주를 입에 댔다(소주병 뚜껑으로 딱 한 잔이었다). 고교 2학년 말에는 집을 나와 그의 자취방에서 몇 달간 더부살이를 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이외수는 “술을 끊었지만 오늘만은 한잔해야겠다”고 했다. 그는 딱 석 잔을 마셨다. 술자리가 끝날 무렵 손님이 찾아왔다. 남자 대학생이 이외수를 찾아 전북 익산에서 오토바이로 달려왔단다. 역시 젊음은 방황도 예쁘다. 혁명가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가 생각났다. 얼마 전에는 인천에서 젊은 여성 두 명이 자전거를 타고 왔더라고 했다. 전남 해남에서 22일 걸려 걸어서 온 사람도 있다나. 이외수와 감성마을이 앞으로도 이 나라 젊은이들의 마른 목을 축여 주길 빌었다.

화천(강원도)=글 노재현 논설위원 겸 문화전문기자 [중앙일보 2008.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