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거리

오바마는 누구인가

이청산 2008. 11. 6. 09:34

 

시련이 키운 '검은 케네디'… "미국에 빚 갚겠다" 정치의 길로
● 오바마 누구인가
흑백혼혈로 태어나 외조부모 슬하에서 성장
고교시절엔 정체성 고민으로 마약 손대기도
컨설팅회사 다니다 빈민 위한 지역활동 시작
이혜운 기자 liety@chosun.com
소년에게 10대 시절은 누구나 힘든 시기다. '버락(Barack)'이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소년도 그랬다. 그는 하와이의 명문 사립 푸나후 스쿨의 몇 안 되는 흑인 학생이었다. 하지만 친구들처럼 부자도 아니었고, 부모와 떨어져 외조부모의 손에 자라고 있었다.

아버지는 케냐 출신 하와이 유학생이었다. 수업을 같이 듣던 17세의 백인 처녀 앤(Ann)과 사랑에 빠져 마우이섬으로 도망가 그를 낳았다. 하지만 두 살 때 아버지는 집을 떠나 하버드대로 유학을 떠났고, 박사학위를 받은 뒤 케냐로 돌아가 버렸다.

소년은 학교에서 아버지가 '케냐의 왕자'라고 허풍을 쳤다. 이후 교통사고 후유증을 치료하러 요양차 하와이에 온 허약하고 초라한 아버지를 보고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어린 시절 그는 인도네시아에서도 살았다. 어머니는 그가 여섯 살일 때 인도네시아 유학생 롤로(Lolo)와 재혼한 뒤 그를 데리고 자카르타로 갔다. 어머니는 새벽 4시면 그를 깨워 영어 공부를 시켰다. 언젠가는 미국 주류사회에 들어가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오바마는 "나는 인도네시아 아이이자 하와이 아이로, 흑인 아이이자 백인 아이로 자랐다. 그 과정에서 문화의 다양성을 배웠다"고 회고했다. 고교 시절엔 '아버지 없는 흑백 혼혈'이라는 출신 배경 때문에 정체성 고민에 빠져 마리화나와 코카인에까지 손을 댔으나 결국 극복했다.

교환학생으로 뉴욕 컬럼비아대학을 다닐 때는 '수도승' 같은 생활을 했다. 하루에 4.5㎞씩 달리고 일요일에는 금식을 했으며 삶의 기록을 남겼다. 책도 많이 읽었다. 수업이 없거나 공부를 하지 않을 때는 걸어서 도시 이곳 저곳을 다녔다. 이때의 생활은 그의 지적 수준을 급속히 향상시켰다.

그는 컬럼비아대학을 졸업한 뒤 컨설팅 회사에 취직했다. 승진도 했고 비서도 생겼으며 은행의 잔고도 제법 쌓였다. 하지만 어머니의 말이 계속 떠올랐다. "관용과 평등을 지키고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 편에 서라." 그는 결국 빈민을 위한 지역활동을 하러 시카고로 떠났다.

이후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하고 일리노이주 상원의원과 연방 상원의원으로 성장하면서 전형적인 정치인 코스를 밟는다.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진보적 미국과 보수적 미국이란 없다. 미합중국이 있을 뿐이다"라는 명연설을 하면서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2006년 그는 미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담대한 꿈'을 실현할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연설할 기회가 있으면 빠지지 않았고, 민주당 동료 의원들이 도움을 요청하기만 하면 발벗고 나섰다. 참모인 데이비드 액설로드(Axelrod)는 "지지자들은 늘어났지만 그 역시 (내가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는) 확신하지 못했을 겁니다" 고 말했다.

그는 종종 선배 정치인들에게 자문했다. 가장 신뢰한 사람 중 한 명이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를 지낸 톰 대슐(Daschle·2005년 은퇴)이었다. 톰은 "머뭇거리는 그에게 저는 단호하게 말했죠.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 기회가 오리라는 생각은 버리라고. 상원에 오래 있을수록 '그 표결에서는 왜 찬성했나?'따위의 질문에 변명할 게 많아진다고요" 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그는 친한 친구들과 보좌관들을 불러 대통령선거에 출마하는 데 대해 떠봤다. 대선 출마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사람 중엔 성공한 흑인 친구들이 많았다. 한 친구는 "아직 미국은 흑인 대통령을 받아들일 준비는 안됐어" 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흑인 대통령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다면 내가 죽을 때까지 그럴 거야. 내가 그런 선입견에 도전하겠어" 라고 답했다.

2001년 오바마는 한 인터뷰에서 부모 얘기를 꺼냈다. "그 분들은 이 나라에서 제 이름이 성공에 전혀 장애가 되지 않을 것이라 믿으며 제게 아프리카 이름 '버락'을 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제 이야기가 더 큰 미국 이야기의 일부라는 것과 제가 이전에 이 땅에 왔던 모든 이들에게 빚지고 있음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버락은 이제 그 빚을 짊어진 채 더 큰 미국을 위해 백악관으로 들어간다.


 

입력 : 2008.11.06 00:55 / 수정 : 2008.11.06 02:56

 

 

 오바마의 어머니, 그녀는 누구인가? 

 2008.11.06

 

 

오바마는 "나의 자질 가운데 좋은 것은 모두 어머니에게서 물려 받았다."는 말을 했다. 우리는 그의 어머니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의 삶은 2008년 4월 11일 로이터 통신에 자세히 소개됐다.

오바마의 어머니(앤 더넘 소에토로)는 케냐 유학생과 결혼하고 오바마를 낳고 이혼하고 인도네시아 유학생과 결혼했다.

언뜻 봐도 평범한 삶을 살지는 않았을 것 같다.

 

앤은 미국 중부 캔사스 중산층 가정의 백인 소녀로 자라났다. TV에서 동물이나 어린이가 학대받는 장면을 보면 눈물을 줄줄 흘리던 성격이면서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겁 없는 여성이기도 했다.

 

그녀는 하와이대학에서 오바마의 아버지를 만났다. 그리고 1961년 18세의 나이에 임신 3개월째 결혼했다. 당시는 하와이를 제외한 다른 주에선 인종 간 결혼이 허용되지 않던 시기였다. 그녀는 오바마를 낳고, 오바마의 아버지는 자신의 고향 케냐로 돌아갔다. 케냐엔 이미 유학 오기전 결혼한 부인이 있었다. 앤은 따라가지 않았고, 이혼소송을 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유학생과 1967년 재혼했다. 앤과 남편과 오바마는 인도네시아로 이사했다. 오바마는 10살 때 하와이에 사립기숙학교에 진학했다. 앤도 남편을 남겨둔채 하와이로 와서 대학원에 진학해 인도네시아 인류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1980년 이혼했다.

 

앤은 박사학위 논문을 위한 현장조사를 위해 인도네시아로 돌아갔다. 당시 14살의 오바마는 어머니를 따라가기를 거부하고 외조부모 곁에 남았다. 1992년 인도네시아 소작농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녀는 3년 뒤 자궁암으로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오바마는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지 못했다.

 

그녀는 오바마에게 모든 인간은 동등하고 소중한 존재라고 강조하였고, 동시에 아시아 빈민 여성들의 삶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인류학자였다.

 

 

 

오바마의 아버지들 그리고 외가 이야기 바로가기 

 

 

[박해현 기자의 컬처 메일]

 문학이 대통령을 길러냈다
박해현 기자 hhpark@chosun.com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자는 대학시절 문학청년이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오바마는 1981년 옥시덴탈 대학 재학 중 교내 문학 잡지에 시 2편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 중 한 편의 시 〈아버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널찍한 그러나 망가진/ 그러나 곳곳에 재로 얼룩진/ 의자에 앉아 계신/ 아버지는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시네/ 아버진 시그램 위스키를 또 한 잔 비우며, 묻네/ 나와 무엇을 하려 하니?/ 풋내 나는 애야…'
정치학자 문성호의 책 《버락 오바마,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는 오바마가 대학생 때 쓴 시 이외에도 9~12세, 고교생 시절의 시까지 모두 9편이 실려 있습니다. 문학적으로 조숙했던 겁니다. 오바마는 케냐 출신 아버지와 어릴 적에 헤어져 자랐기 때문에 그의 시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하와이에서 오바마를 애지중지 키운 외할아버지의 변형이라고 미국 언론들은 판독했습니다. 주간지 뉴요커는 저명한 문학비평가 해럴드 블룸에게 청년 오바마의 시를 읽고 평가를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시 〈아버지〉에 대해 "비애, 유머, 애정이 깃들어 있는 아주 좋은 민중시"라고 호평하면서 "오바마가 시인이 아니라 정치인을 선택한 것은 잘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의 시를 주목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오바마의 문학적 스승은 어린 시절에 있었습니다. 그의 자서전 《아버지로부터의 꿈》에 따르면, 시와 재즈를 즐겼던 외할아버지의 술친구 중에서 늙은 흑인 시인 프랭크가 있었습니다. 프랭크는 "내가 시카고에 살 때 유명 흑인 작가 리처드 라이트, 흑인 시인 랭스턴 휴즈와 함께 어울렸던 사람"이라고 자랑했다는데요. 그의 집에 자주 놀러간 오바마는 "눈꺼풀에 반 이상 덮인 눈 뒤에 녹아 있는, 어렵게 얻었을 성싶은 지식에 끌렸다"고, 시적으로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이래서 고교생 시절에 이미 오바마는 상당한 독서량을 갖추었고, 흑인 문학 읽기를 통해 정체성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바마의 백인 어머니가 가장 좋아한 외국 영화는 프랑스의 마르셀 카뮈 감독이 만든 《흑인 오르페》였습니다. 오르페우스 신화에 담긴 시인의 비극적 사랑을 브라질의 리우 축제로 무대를 옮겨 그린 영화입니다. 오바마의 당선은 신화 속의 얼굴 하얀 시인 오르페우스를 흑인으로 바꾼 영화가 극장 밖의 현실이 된 것 같습니다. 오바마의 승리는 정치적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한 편의 영웅 서사시를 보여주는 듯한 문화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오바마 서사시'의 메시지는 '영웅이 되려면 어릴 때부터 문학 책을 많이 읽으라'는 겁니다.
입력 : 2008.11.10 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