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울릉도

벼랑 위에 서다 -여기는 울릉도·22

이청산 2007. 10. 10. 13:01

벼랑 위에 서다

-여기는 울릉도·22



알봉을 향해 숲 속으로 발을 들이기 시작한 것은 오전 11시. 정 선생과 함께였다. 알봉 정상에 올랐다가 알봉분지로 내려가서 다시 미륵봉으로 올라 태하 쪽으로 내려 가리라며 길을 잡았다. 정 선생이 알봉 위의 웅덩이를 보러 가자고 했다. 산 위에 웬 웅덩이냐 했더니, 알봉 위에 작은 분화알봉 분화구에서구들이 있어 웅덩이를 이루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2백5십만 년 전쯤 화산 분출로 울릉도가 생기면서 그 분화구(caldera)로 나리분지가 형성되고, 2차 폭발에 의해 생겨 난 것이 알봉(538m)과 알봉분지다. 길 없는 숲 속을 뚫으면서 올라가는데 초입에는 경사는 완만했다. 한참을 올라가다 보니 움푹 파인 곳이 군데군데 보였다. 분화구인 모양이다. 물이 고여 있지는 않았지만, 비가 많이 올 때는 웅덩이를 이룰 수 있을 것도 같다. 성인봉쯤에서 알봉을 보면 그야말로 커다란 알 하나가 지상에 뚝 떨어져 있는 것 같은데, 산 속에 들어와 보니 알이 아니라 알들의 둥지가 모여 있는 것 같다.
 서로 엉킨 채 쌓여 있는 바위

몇 개의 분화구를 지나 대숲을 뚫고 나아가니 문득 우뚝한 봉우리가 막아선다. 가파른 경사를 타고 오르니 바위가 층을 이루며 솟아있다. 알봉 정상이다. 마치 석공이 돌을 갈아 정교하게 짜 맞춘 듯 바위가 서로 얽히면서 싸여 있다. 화산이 분출할 때 굳어지지 않은 돌덩이들이 서로 엉기면서 생긴 이음새가 기막힌 조화를 이룬다. 바위에 오르니 나리분지 평원이 한 눈에 든다. 여인의 유방을 옮겨 놓은 듯한 유두봉, 점잖은 부처처럼 버미륵봉과 유두봉티고 앉은 미륵봉도 코앞에 다가서 있다. 섬이란 참 신비스러운 곳이다. 나무 하나 풀 한 포기 예사로운 것이 없고, 흙 한 점, 돌덩이 하나도 쉽사리 생겨나 있는 것이 없다. 저 유두봉이며 미륵봉엔 또 어떤 신비가 숨어 있을까.
 

알봉분지로 내려와 허기를 때우고 미륵봉 쪽으로 길을 잡았다. 오후 1시 반경이었다. 숲을 뚫고 나아갈 수 있을 뿐 길이란 없다. 완만하던 경사가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섬단풍, 너도밤나무, 화솔 등 크고 작은 나무들이 치솟아 있는 비탈에는 푸른 고비 잎이 밭을 이루고 있는가 하면, 돌덩이들이 서덜을 형성하고 있기도 했다. 흙에 미끄러지고 돌에 자빠지며 올라갔다. 처음엔 3,40도 정도 될 듯한 경사가 5,60도는 됨직한 급경사로 변하면서 몸을 가누기가 어려워진다. 거의 절벽이다. 바위를 잡고 나무 뿌리를 딛고 힘을 다해 오른다. 우리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닌가, 정 선생과 얼굴을 마주 하며 미소를 나누기도 하고 서로 힘내라고 격려도 하며 계속 올라간다. 하도 가팔라 발을 딛기도 어렵다. 잠시 한 눈을 팔다간 까마득히 추락해 버릴 것 같다. 땀이 온몸을 적시는 것은 느낄 겨를도 없다.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니 아찔한 전율이 솟는다. 다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너무 높이 올라와 있었다. 힘도 들고 겁도 나지만 정상에 오르기만 하면, 섬 일대의 경관을 조망할 수 있고, 편하게 내려 갈 길도 있으리라 기대하며 다시 기운을 모은다. 위험을 무릅쓰고 부들부들 떨리는 팔다리를 진정시키며 두어 걸음 힘겹게 올랐는데, 어이쿠! 병풍 같은급경사를 힘겹게 오른 끝에 만난 석벽(유두봉 정상부) 석벽이 턱 버티고 서 있는 게 아닌가. 바위 같은 절망감이 몸을 누른다. 되내려 갈 수도 없고 그야말로 진퇴유곡이다. 생전에 없었던 경험이다. 무모한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때린다. 내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석벽 바로 밑으로 좁다란 길이 나 있다. 길이 아니라 빗물이 떨어지며 만들어진 좁다란 평지가 석벽에 허리띠처럼 붙어 있는 것이다. 그것을 딛고 조심스레 나아갔다. 석벽이 끝나는가 싶더니 다시 직각에 가까운 비탈이 하늘로 솟아 있다. 다행히 돌부리도 보이고 나무도 서 있어 돌을 잡고 나무에 의지하며 올라가기를 기를 쓰면 오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러나 발을 헛딛기라도 할라치면……. 너무나 끔찍했다. 무람없는 행동 때문에 이 육십 생애를 무참히……. 사실은 그런 것도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올라가지 않고서는 해결책이 없었다. 정 선생과 서로 조심하라는 말로 기운을 북돋우며 바위를 잡고 나무 뿌리에 발을 의지해 한 땀 한 땀 올랐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유두봉 정상에서

드디어, 드디어 정상에 올라섰다. 내려다보니 까마득한 낭떠러지, 그 벼랑 위에 우리가 서 있다. 휴우! 긴 한숨을 쉬려는 찰라 흰 구름이 성인봉을 감싸며 건너 산봉우리로 날아가고 있다. 널따란 알봉분지 가장자리에 투막집이 그림 되어 서 있고, 말잔등 아래로 나리분지 아늑한 모습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울릉도 정말 아름답군요, 정 선생과 마주보며 웃었다.  한 발 헛디디면 어떻게 될지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명재경각의 아찔한 순간들, 미끄러지기만 하는 발을 겨우 가누면서 떨리는 팔로 나무 유두봉 정상에서 보이는 알봉과 나리분지가지를 잡고 오를 때의 그 긴박, 절박했던 순간들을 이리 쉽게 잊고 웃을 수 있단 말인가. 저 나리분지의 풍경이 세상의 평화와 아름다움을 다 모아 놓았다 한들, 우리 수십 년의 생애와 바꿀 만한 것이었던가. 그래도 우리는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아니면 이런 곳에 어찌 올라와 보랴!"

"참 용감했네, 이리 험한 줄 모르고!"

"그 용감 없었으면 저 경치 어찌 볼 있겠소!"

"맞아요. 그 힘든 것도 지나고 나면 재미있고 즐거운 기억이 되겠지요."

다시 어찌 다시 이런 풍광을 만날 수 있으랴. 사람 기억만 믿을 수 없어 카메라에 부지런히 기억시켰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인가? 비로소 우리가 유두봉 정상과 바다서 있는 곳이 궁금해진다. 여기 뾰족이 솟아 있는 바위를 보니 우리가 목표로 했던 미륵봉은 아닌 것 같다. 바위는 서로 엉기면서 두어 길 높이의 탑을 이루며 솟아 있다. 맞아. 여기가 유두봉인가 보다. 멀리서 보면 동그란 젖무덤 위에 솟아 있는 젖꼭지, 그래서 '찌찌봉'이라기도 하고 점잖게 '유두봉'이라고도 하는 그 봉우리. 지금 우리는 여인의 젖무덤 위에 서서 섬의 아름다운 경치를 유쾌하게 감상하고 있는 것이다. 이 벼랑 위에서-.
 

이젠 내려 갈 차례다.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곳이 유두봉이고 보면 평리, 현포 쪽으로 내려가야 할 것 같다. 올라온 반대 방향으로 내림길을 잡아내려 가려는데, 또 큰일났다. 어딜 둘러봐도 모두가 낭떠러지다. 올라온 길보다 더 심하게 깎아지른 듯하다.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시계는 4시 반을 가리키고 있다. 정 선생이 울릉산악회 관계자에게 전화를 하여 길을 물으니 올라온 길을 다시 내려오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 아찔한 절벽을 어찌 다시 내려간단 말인가. 다시 절망감이 온몸을 누른다.

"할 수 없군요. 길을 다시 찾아보는 수밖에-." 목소리가 비장해진다.

산악회 관계자에게 전화하여 만약을 대비하여 비상 대기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절벽 길을 더듬었다. 나무나 돌부리에 의지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나무며 바위 사이를 건너뛰다가 어깨며 얼굴을 부딪기도 하고, 걸리는 것이 없는 가풀막엔 전신을 급경사에 맡겨 버린다. 가풀막은 미끄럼틀이 되어 몸을 아래로 밀어뜨린다. 자칫 잘못하면 계곡 구렁텅이로 내쳐질지도 모르는 순간이다. 그렇게 사투하기를 반 시간여, 드디어 완경사가 나타난다. 산악회로 전화하여 이제는 무사히 내려 갈 수 있을 것 같다고산을 내려 오면서 본 북쪽 바다의 어화, 비상 출동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알려 주었다. 다시 알봉분지에 이른 것은 5시 반경. 온몸이 흙과 땀으로 범벅이 되고 무릎도 어깨도 결리고 아팠지만, 돌아볼 겨를이 없다. 어서 해안 큰길로 나가 막차를 타야 한다. 알봉 등산로를 뛰듯이 내 달았다. 엎어지고 자빠지며 해안도로에 이르러 도동으로 가는 막차를 탄 것은 6시20분이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 피로가 몰려온다.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오늘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하였던가. 무엇이 위험과 고통의 시간 끝에 오른 벼랑 위에서 웃으며 쾌재를 부르게 했던가. 섬이 우리에게 무엇이기에 그 힘든 고통의 시간들을 견뎌내야 했던가, 무슨 순교자처럼-.

어쩌면 내 섬 살이도 벼랑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닐까. 섬에 서려 있는 아름다운 기억들을 찾아서 위태와 번민을 무릅쓰고 찾아온 벼랑 위에 내가 서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혹은 아직도 섬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줄 그 벼랑을 향해 가파른 가풀막을 다리를 떨며 올라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빌 뿐이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섬의 사랑과 눈물을 따뜻하게 펼쳐줄 벼랑이기를,

혹은 번민의 파도를 넘어 그 벼랑으로 오를 수 있기를,

그 벼랑 내려 갈 때는 사랑의 노래 휘파람 불며 갈 수 있기를-.♣

                                                                                  (2007.10.8.)

 

나아갈 길이 없다 물러설 길도 없다
둘러봐야 사방은 허공 끝없는 낭떠러지
우습다
내 평생 헤매어 찾아 온 곳이 절벽이라니
 
끝내 삶도 죽음도 내던져야 할 이 절벽에
마냥 어지러이 떠다니는 이 아지랑이들
우습다
내 평생 붙잡고 살아온 것이 아지랑이더란 말이냐

                                    -조오현 : '아지랑이'

 

                        x-text/html; charset=EUC-KR" width=250 src=https://t1.daumcdn.net/planet/fs14/12_18_14_6_7QTgu_11863492_5_534.wma?original&filename=534.wma x-x-allowscriptaccess="never" volume="0" loop="-1" omcontextmenu="return fal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