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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영남 인재의 절반은 선산서 배출

이청산 2007. 10. 6. 15:42
15세기 영남 인재의 절반은 선산서 배출

충절로 '성리학의 본향' 명성

18세기 중반의 유명한 지리학자 이중환(李重煥)은 그의 명저 '택리지(擇里志)'에서 "조선 인재의 절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절반은 일선(선산의 고지명)에 있다"고 선산을 평한 바 있다. 물론 이 말은 조선 왕조 전 시기에 걸쳐 선산이 관료를 많이 배출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15세기에 관한 한 선산은 인재의 고장이었다.

15세기 후반 선산 출신의 저명한 관료 학자 김종직(金宗直)은 '이존록(彛尊錄)'에서, 길재의 문하로 "학동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고 소회한 바 있다. 이들 가운데 그의 부친 김숙자(金叔滋)가 포함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5세기에는 선산 관아와 향교가 있던 영봉리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한 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들 가운데 전가식, 유면, 정지담, 하위지는 문과에서 당당히 장원한 재원이었다. 그 때문에 김종직은 영봉리를 '장원방(壯元坊)'이라 불렀다.

길재의 '불사이군'의 충절은 이후 선산 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육신 하위지(河緯地)와 생육신 이맹전(李孟專)이 이곳 출신인 것도 이러한 분위기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평생에 걸친 길재의 정주학 침잠은 이후 이 지역이 성리학의 본향이 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16세기 중반 이후 확립된 조선 성리학의 도통(道統)은 흔히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으로 연결된다. 그런데 위의 8대 연원 가운데 길재로부터 김굉필(金宏弼)에 이르는 무려 4대의 학자들이 모두 선산과 직·간접적으로 연결을 맺고 있던 인물들이었다. 15세기 선산은 성리학의 메카였던 셈이다.

그런 탓에 임진왜란 직후인 17세기 전반 해평 출신의 학자이자 관료 최현(崔晛)은 '일선지(一善志)'를 편찬하면서, 그 말미에 '선현(先賢)'조를 따로 설정해 둘 정도였다. 거기에는 김주, 길재와 같은 고려말의 저명 인물을 비롯해서 하위지, 김숙자, 이맹전, 김종직, 김굉필, 김응기, 정붕, 박영, 김취성, 김취문, 박운, 성운, 최응룡 등 19명이 수록되어 있다. 15세기와 16세기를 풍미했던 당대의 관료와 학자들 대부분이 망라되어 있는 셈이다. 15세기의 문향 선산은 이렇게 탄생했던 것이다 
                                     [영남일보 2005,1,11. 역사 속의 영남 사람들 53] 

구미시 선산읍 원리에 있는 조선 최고의 서원 금오서원. 야은 길재를 비롯해서 선산이 배출한 거유 김종직, 정붕, 박영, 장현광을 배향한 서원이다. 대원군의 대대적인 서원 훼철 시에도 조선 성리학의 발원지라는 상징성이 참작되어 훼철되지 않았다.3

  구미시 선산읍 원리에 있는 조선 최고의 서원 금오서원. 야은 길재를 비롯해서 선산이 배출한 거유 김종직, 정붕, 박영, 장현광을 배향한 서원이다. 대원군의 대대적인 서원 훼철 시에도 조선 성리학의 발원지라는 상징성이 참작되어 훼철되지 않았다

역사속의 영남 사람들- 야은 길재 선생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