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료 실

'페르세베'를 따는 법

이청산 2007. 10. 6. 15:40
[문화일보] 살며 생각하며

'페르세베'를 따는 법
 
세상이 아무리 번잡하고 시끄러워도 어김없이 시간은 흐르고 계절은 바뀐다. 큰바람이든 큰물이든 견뎌내면 마침내 결실을 보리라고, 들판의 곡식과 무르익은 과일들이 가르친다. 일년 중 가장 큰 만월을 이루는 팔월 보름 한가위, 우리의 조상인 농경민들에게 이만큼이나 풍요롭고 흡족했던 때는 다시없었을 것이다. 빠듯한 살림살이와 지루한 교통 체증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우리를 귀향길에 오르게 하는 것은 그렇게 유전자에 새겨진 축제의 열망과 소원인지 모른다.

고향에는 가족이 있다. 가족은 인간 본연의 고향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말대로 가족과 조국은 현실보다 상상 속에서 더 매력적이다. 상상 속의 가족은 듬직한 아버지와 다정한 어머니, 사소한 일로 티격태격대지만 누구보다 든든한 친구인 형제자매들로 이뤄져 있다. 상처를 입었을 때 찾아들어 쉴 수 있는 안전한 피난처이며, 잘못을 덮어주고 꺾인 무릎을 격려로 일으켜 세워주는 평화롭고 따뜻한 둥지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우리는 가족애와 애국심에 시시각각 감동하고 감격하며 살아가는가? 어쩌면 그 반대가 아닌가?

스페인 북서부의 갈리시아 지방에는 세계의 미식가들에게 '바다에서 건진 절대 미각'이라 불리는 스페인 최고의 해산물인 '페르세베'가 있다. 페르세베는 주로 거센 파도가 이는 바위의 암초와 암초 사이에 붙어 자라기 때문에 그 채취 과정은 험난하기 그지없다. 어부들은 밧줄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 1킬로그램에 우리 돈으로 17만원이나 하는 비싼 해산물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건다. 집채 같은 파도가 들썩일 때마다 가냘픈 밧줄에 묶인 어부들의 몸이 가랑잎처럼 흔들린다.

그런데 이토록 극한 상황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이 하나 있다. 밧줄 하나 달랑 허리에 묶고 바위틈으로 몸을 부리는 사람들의 배후에는 인근에서 밧줄을 드리워주는 배가 있다. 그들이 위험한 상황에서 재빨리 밧줄을 당겨주지 않으면 바다에 나간 사람은 고스란히 황천객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배를 모는 사람들과 채취에 나선 사람 사이에는 절대적인 신뢰관계가 필요하다. 여차하면 파도에 쓸려 배가 암초에 부딪쳐 파손될 수 있는 상황에도 밧줄을 끊고 도망치는 대신 끝까지 밧줄을 당겨 채취자를 구해줄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

선량함? 의리? 희생정신? 돈? 아니면 그 무엇?

몇 대에 걸쳐 이 위험한 일을 해온 갈리시아 사람들은 그 해답을 알고 있다. 그들은 결코 타인과 함께 바다로 나서지 않는다고 한다. 선악과 도덕과 신념과 그 모두를 넘어서, 가족만이 자신의 눈앞까지 득달같이 닥쳐든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라도 맨몸으로 바다에 나간 피붙이의 밧줄을 움켜잡고 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함께 파도에 쓸려갈지언정 그의 죽음을 담보로 자기 목숨을 건지기 위해 배를 돌려 도망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 갈리시아 어부들처럼 살았던 적이 있다. 까마득히 잊고 살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어느 한때, 폭풍처럼 우리를 휘몰아친 식민 지배와 전쟁과 가난의 쓰라린 역사가 있었다. 누구도 대신 나를 지켜주지 않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가장 기동성 있게 움직여 포탄을 피하고 양식을 구하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단위는 가족뿐이었다. 오직 운명의 공동체인 가족만이 가혹한 현실 속에서도 서로를 밀고 끌며 삶을 독려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의 가족은 실로 변화와 갈등과 새로운 요구 속에 놓여 있다. 하지만 나는 때로 도전받고 부정되는 우리의 질기고 슬픈 가족주의를 역사 속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바다보다 더 거친 세상의 파고를 넘어야 했던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와 어머니 아버지 과거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만이 현재와 화해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길이리라. 바야흐로 가족이 단순한 혈연의 집단을 넘어 평등하고 자유롭게 서로를 사랑하는 동아리가 되기 위해서는, 가족 해체니 가족 위기니 공허한 목청을 돋우기 전에 우리가 서로에게 과연 어떤 존재인지 정직하게 헤아려볼 일이다.

거기에 세상의 파도와 바람에 맞서 싸우느라 분주하고 고단한 얼굴들이 있다. 설령 초라하고 비겁한 꼴이라도, 나를 꼭 닮은 못난 그들이 참으로 애틋하고 미쁘지 아니한가.

김별아 / 소설가 
 
기사 게재 일자 2004/09/25

http://www.munhwa.com/opinion/200409/25/200409250101221419100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