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칼럼

[신문 칼럼] 섬의 향기와 맛

이청산 2007. 3. 16. 08:29

대일산필(이일배)
섬의 향기와 맛

섬에는 의식주를 이루는 모든 물자가 귀하고 비싸다. 먼 물길을 건너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섬의 밥상은 향기롭다. 뭍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나물과 해물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나물은 이 섬에만 나는 것이 많다. 명이(산마늘), 부지깽이(섬쑥부쟁이), 전호, 삼나물, 고비, 머위, 강활……. 뭍의 사람들에겐 이름조차도 생소한 것들이 섬의 온 산에 늘려 있다. 그 중에서도 명이와 부지깽이는 섬사람들에게 특히 사랑을 받는다. 이 나물들은 사철 내내 산에서 자라는데, 겨울철 눈 속에서도 싹을 틔우고 잎을 피운다. 뿌리에 그물 같은 섬유가 덮여 있는 명이는 애순으로부터 둥글넓적한 잎을 피우는데, 뿌리에서 마늘과 같은 맛과 향기가 나기 때문에 산마늘이라고도 한다. 부지깽이는 긴 대공을 따라 톱니가 있는 타원형의 잎을 피우는 것으로 매우 부드러우면서 싱그런 향기를 지니고 있다.
구한말인 1882년 울릉도 개척령이 반포되어 이규원(李奎遠)이 울릉도를 검찰하고 간 뒤인 1883년에 16호 54명의 개척민이 입도하는 것으로 울릉도의 근대사가 시작된다. 이 때의 개척민들은 그야말로 맨손으로 시작하여 모든 것을 일구어 나가야 했다. 고기도 잡기 어렵고, 농사도 지을 수 없는 겨울이 되면 먹을거리가 없었다. 이 때 개척민들의 목숨을 붙들어 준 것이 명이나 부지깽이 같은 나물들이었다. 개척민들의 구황(救荒) 먹거리가 된 것이다. 섬사람들의 명(命)을 이어준 나물이라 ‘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부지깽이’는 마른 줄기를 부지깽이로 쓰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기도 하고, ‘부지기아초(不知飢餓草)’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모두 구황과 관련된 이름들이다.
섬에서 맞는 첫 휴일, 좋은 경치가 있는 곳도 많고 가보고 싶은 곳도 많지만, 먼저 명이와 부지깽이를 찾아 나섰다. 가파른 산길을 타고 올라갔다. 아직도 찬바람이 불고 눈발도 날리는 삼월 초순, 겨울에 내린 눈이 채 녹지 않고 곳곳에 쌓여 있는데, 부지깽이는 길섶 곳곳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파랗다 못해 검은빛까지 띄면서 잘 자라고 있다. 명이는 좀더 높은 비탈에 낙엽을 뚫고 뾰족이 순을 내밀고 있다. 낙엽을 들쳐 내니 하얀 뿌리가 드러난다. 또 자라라고 뿌리 밑동은 남겨두고 잘라내니, 알싸하고도 상큼한 향기가 코끝에 스민다.
명이는 날 것으로 무치고, 부지깽이는 데쳐서 기름을 둘러 무쳐 놓았다. 상쾌하고도 신선한 향기가 밥상을 가득 채운다. 거기다가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학꽁치로 회를 치고 복어로 탕을 끓여 놓았다. 비릿하면서도 풋풋한 바다의 향기가 나물 향과 함께 어울리면서 뭍에서는 맡을 수도 없고, 맛볼 수도 없는 섬 특유의 맛과 향기를 자아낸다.
그것은 울릉도의 절경에서 느끼는 향기와도 같고, 울릉도 사람에게서 느끼는 맛과도 같다. 이 향기와 맛이 그리워 내가 다시 울릉도행을 결심한 것인지 모른다. 몰아치는 파도가 뱃길을 끊어 섬 살이를 고적하게 만들어도 그 향기와 맛을 음미하노라면 섬은 다시 포근한 품을 가진 가슴 넓은 사람처럼 느껴진다. 내수전마을 정매화골에 가면 명이가 많을 것이라 한다. 다음 휴일엔 인정 많은 주막집 여인네의 전설이 서려 있는 정매화골로 가 보아야겠다.

                                                                           (수필가, 울릉종고 교장)

                                                                        등록일 : 2007-03-15  20: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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