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칼럼

[신문 칼럼] 섬에 바람이 불면

이청산 2007. 3. 23. 08:53

 

대일산필(이일배)
섬에 바람이 불면

항상 바다와 더불어 살아야 하는 섬에서는 세 가지를 믿지 말라는 속언이 있다. 날씨와 약속과 내일이다. 약속과 내일을 믿지 말라는 것도 날씨와 깊은 관련이 있다. 섬에서는 날씨가 그만큼 변화 난측하다는 말이다. 청명한 하늘에 어디서 날아왔는지 삽시간에 검은 구름이 덮이고 후드득 비를 뿌리기도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바윗덩어리도 단박에 날려버릴 듯한 돌풍, 강풍이 몰아치면서 바다를 마구 뒤흔든다. 유리알처럼 맑고 푸르던 바다가 갑자기 켜켜이 갈퀴를 세우며 하얗게 부서진다.
울릉도를 오다(五多 : 물, 돌, 바람, 미인, 향나무)의 섬이라고 하는데, 그 속에 바람이 들어 있을 만큼 바람이 많이 분다. 그것도 강풍이 부는 날이 많다. 강풍, 폭풍이 부는 날이면 바다가 부서지고, 바다가 부서지면 섬사람들의 가슴도 함께 부서진다. 배가 뜨지 못하기 때문이다. 배가 못 뜨면 고기잡이를 나가지도 못하지만, 뭍으로 오가는 물길도 끊어져버린다. 물길이 끊어져 버리면 섬은 적막에 빠진다. 물자도 들어오지 못하고 여행객도 오지 못해 길거리는 썰렁해져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거의 모든 물자를 뭍에서 가져다 써야 하는 섬 살이가 무척도 고달파진다. 한 사나흘만 끊기면 생필품이 동나버린다. 그래서 섬사람들은 집은 좁아도 냉장고는 큰 것을 두고 산다. 신문도 오지 않고 편지도 오지 않는다. 그 단절감이 가슴을 아리게 하는 것이다.
배가 뜨지 않으면 뭍에 아무리 긴박하고 절박한 일이 생겨도 하늘만 쳐다보며 가슴만 졸일 뿐, 어찌할 도리가 없다. 길은 오직 하나, 질러갈 길도 돌아갈 길도 없다. 그 하나의 길이 끊겨 버리면 긴요한 출장 일도 볼 수 없고, 누구에게 어떤 경조사가 있어도, 심지어는 뭍의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가볼 수가 없다. 섬을 나갈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다. 들어 올 사람도 마찬가지다. 배가 뜰 때까지 하릴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다. 뜻밖의 시간과 경비를 쓰면서 속을 태워야 한다. 물론 가족을 두고 혼자 섬에 들어와 사는 사람이 뭍에 나갔다가 발이 묶일 때는 폭풍은 복풍(福風)이 될 수도 있다. 가족과 좀더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 복풍은 마음까지 편하게 해 주지는 못한다.
하늘이 하는 일을 어찌할 수 있겠느냐며 쉽게 체념하지만, 세상사 모두 초월한 듯 달관할 수만은 없다. 섬사람들의 제일의 관심사는 언제나 배가 뜨느냐, 못 뜨느냐에 있다. 뭍에 나갈 일이 있건 없건 배가 다녀야 안심이 되고 안정을 얻을 수 있다. 섬사람들의 아침 인사는 ‘오늘 배가 뜬답니까?’다. 배가 뜨고 못 뜨는 줄 알면서도 묻고, 모르고서도 묻는다. 배가 떠서 기쁜 마음, 못 떠서 답답한 마음을 함께 나누자는 것이다. 섬사람들은 그 마음들을 함께 나누는 것으로 섬 살이의 고단과 고적을 다스려 나간다.
뭍에서 오백여 리의 물길 끝에 섬이 있다. 그 먼 물길은 뭍에서 섬으로, 섬에서 뭍으로 이어지는 섬사람들의 몸의 통로이자 마음의 통로이다. 풍랑으로 물길이 끊어져 몸이 오갈 수 없으면 마음도 오갈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섬은 섬사람들의 삶의 터이지만, 뭍은 섬사람들의 마음을 기댈 언덕이다. 그래서 섬에 바람이 불면 섬사람들은 고독해진다. 황량한 벌판에 홀로 버려진 아이처럼 외로워진다. 섬에 바람이 불면-.    (수필가, 울릉종고 교장)


등록일 : 2007-03-22  19:2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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