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내가 사는 첫날들

이청산 2021. 5. 9. 14:47

내가 사는 첫날들

 

  사십 년 넘는 세월을 두고 일기를 써 오고 있다. 오랫동안 써 오면서 한결같은 일이 하나 있다. 날마다 적는 것은 늘 내 살아온 날의 맨 끝 날이라는 것이다. 당연한 일일까. 어쨌든 나는 늘 생애의 끄트머리만 잡고 살아온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일기장의 끝에다 이따금 ‘내일은 어떻게 올까.’라고 적을 때가 있다. 오늘과 다른 날이 올까, 궁금할 때가 많다. 똑같은 날을 살아본 적이 없다. 날짜가 어제와 다를 뿐만 아니라 하늘도, 산책길의 풀꽃도 어제와 같지 않은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자연의 일이라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하는 일도 모두 그렇다. 날마다 얼굴 보며 나누는 아내와의 대화도 다르고, 어제와 같은 책을 읽어도 느낌이 같지 않고, 매일 걷는 ‘만 보 걷기’에서도 꼭 같은 걸음 수를 걸은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러니 어찌 같은 날이 있을까.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윤여정 배우가 몇 년 전 어느 방송 프로그램에서 “60세가 되어도 인생은 몰라요. 나도 처음 살아보는 거니까. 나도 67살은 처음이야.”라고 한 말이 세간에 회자하고 있다. 맞는 말이다. 누구도 자기 나이는 처음 살지 않는가.

  나도 늘 새로운 날을 산다. 물론, 나에게 오는 날은 내가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날이다. 언제나 생애의 첫날이다. 요즈음에 와서 더욱 그런 느낌 속을 살고 있다. 어쩌면 그다지 놀라운 느낌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내 사는 날을 날마다 새로운 날로 느끼는 것은, 사실은, 다가오는 날에 대해서라기보다는 지나간 날을 돌아볼 때 더욱 그렇다. 늘 처음의 날을 살았던 것 같다. 내가 맞이한 날이 이전에도 살아보았던 날이었다면, 그렇게 보낼 수 있었을까. 그리 덩둘하게 살 수가 있었을까.

  돌아보면 내 지난 생애는 거의 모두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시행착오란 겪어본 적이 없는 일을 처음으로 시도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닌가. 그러면 나는 생애의 모든 일을 처음으로 해내면서 살아왔단 말인가.

  사실 그랬다. 모든 것을 처음으로 사는 듯했다. 자식으로도 부모로도 남편으로도 처음 살아봤고, 동료도 부하도 상사도 처음 겪어본 자리였고, 인정도 우정도 연정도 처음 느껴본 감정들이었다. 그런 관계들로 어느 날 어떤 이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내 몸짓은 언제나 처음인 듯 서툴기만 했다.

  그 당시로써는 그럴 수밖에 없다거나 혹은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겼을지 몰라도, 지내놓고 보면 모두가 어설펐거나 틀렸거나 사리를 알지 못하고 했던 일이었던 같다. 그런 나로 인하여 힘들었거나 괴로웠거나 아팠던 이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날들이 돌이켜질수록 심사가 가볍지 않다. 얼굴이 붉혀지기도 하고, 마음이 아려지기도 하고, 괴로움에 겨워지기도 한다. 그토록 나는 왜 모든 날을 헛살기만 했을까. 겪는 날마다 새로운 날이 되어 시행착오를 되풀이해야 했을까.

  『노자(老子)』의 말씀을 듣노라니, 이런 구절이 아프게 와 닿는다.

  “본성으로 돌아오는 것을 ‘늘 그러한 이치’라 하고, 늘 그러한 이치를 아는 것을 밝음이라 한다. 늘 그러한 이치를 모르면 제멋대로 좋지 않은 일을 일으키게 된다.(復命曰常, 知常曰明 不知常 妄作凶, 『道德經』 16章)”고 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늘 내가 누군지를 모르고 살았던 것 같다. 내 본성에 비추어 무엇을 어떻게 해야 일이 잘될 수 있는지를, 그 한결같은 이치를 모르고 하루하루를 지내왔던 것 같다. 그 이치를 아는 ‘밝음[明]’이란 ‘현명함’ 즉, 이것저것 두루 살필 줄 아는 통찰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이 나에게 없었으니 맞이하는 날이 늘 첫날인 것 같고, 그 한결같은 이치를 모르는 ‘처음’ 앞에서 늘 서툴러야 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제멋대로 좋지 않은 일을 일으키게’ 되어 내 일을 그르치는 건 물론, 남도 힘들고 아프게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런 일들이 돌아보이는 것은 늘 처음이었던 그 쌓인 날들로 인해 나이가 좀 든 탓일까. 내 비록 처음 맞는 이 나이지만, 쌓인 날들로 든 나이라면 ‘늘 그러한 이치’를 조금이라도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노자의 말씀은 이어진다.

  “늘 그러한 이치를 알면 너그러워지고, 너그러워지면 공평해지며, 공평해지면 왕이 된다.(知常容 容乃公 公乃王)”고 했다. 여기서 ‘왕’은 ‘자연의 이치’를 말하는 것이라 한다. “자연의 이치대로 하면 오래갈 수 있으며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다.(道乃久 沒身不殆)”고 했다.

  그랬다. 나는 ‘늘 그러한 이치’를 모른 채로 늘 새날을 맞았던 것 같다. 그래서 너그러워지지도 못했고, 공평해지지도 못했고 따라서 자연의 이치를 모르고 살던 날이 되곤 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나는 늘 위태롭게 실수투성이로 살아왔던지도 모르겠다.

  아, 지금이라도 ‘늘 그러한 이치’를 알 수 있을까. 이제부터 맞는 날들은 낯선 날이 아니라 익숙한 날이 되어 너그럽고 공평해질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내일 올 날도 나에게는 여전히 낯선 날이 될 것만 같다. 또 어떤 시행착오가 나와 남을 고단하게 할지 모르겠다.

  나는 언제까지 첫날만을 살아야 할까. 얼마를 더 살아야 ‘늘 그러한 이치’를 아는, 설지 않는 날들을 살아갈 수 있을까.♣(202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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