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버려진 책을 보며

이청산 2018. 1. 14. 15:27

버려진 책을 보며

 

몇 성상 세월을 글 쓰는 일과 함께 살아오면서 문단의 끝자리에나마 이름을 올린 지 이십여 년이 흘렀다그 사이에 쓴 글들을 여러 문학지를 비롯한 각종 출판물들에 발표해 왔지만웹사이트에만 올리면서 혼자 간직하고 있는 것들도 적지 않다.

주위에서는 그만큼 써왔으면 책 몇 권 묶을 만하지 않느냐며 출판을 권하기도 하지만좀처럼 엄두가 나지 않는다등단 초기에 세상모르고 수필집을 한 권 낸 이후로 이십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그저 쓰기만 하면서 여러 지면을 통해 세상에 보이는 것으로 만족해 왔다.

책을 내기 위해서 드는 갖은 공력도 짐스럽지만내 책이 어떤 사람들에게 얼마나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책 낼 마음을 먹기가 쉽지 않다그렇게 쓰기만을 해오는 사이에 남들은 많은 책들을 내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갈라 보며 나에게도 왕왕 부쳐온다내 책으로 그 고마움을 갚을 수 없어 감사의 답신은 꼭 해주기를 애쓰고 있다.

부쳐 오는 책들이 자꾸 쌓여간다보내주는 정성을 생각하여 다 읽으려고 애쓰지만모든 책을 알뜰히 읽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그 때마다 내가 책을 내어 누구에게 보냈을 때를 상상해 보면정성 들여 다 못 읽는 것이 송구해지기도 한다.

몇 사람과 글쓰기 공부를 함께 하고 있다글을 쓰는 재주도 지식도 별로 없지만먼저 글을 써왔다고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고맙다혹 도움이 될까하여 다 읽은 책이나 못다 읽은 책들을 선물로 나누어주며 거울로 삼으라 했다책을 준 이가 안 다면 어떻게 여길까.

시를 쓰면서 수필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절친한 글벗 한 사람이 있다나보다 좀 후배이긴 하지만 글쓰기에 대한 마음과 뜻이 잘 맞아 내가 아는 것이며 가진 책들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면서 함께 궁리도 하고 조언도 해주곤 했다.

어느 날 그는 식구들의 생활여건에 변화도 생기고처음으로 새 식구도 맞게 되었다며 집 안을 대대적으로 정리해야겠다고 했다여러 가지 세간을 많이 줄여야할 처지인데그 중에 책이 하도 많아 이미 본 책안 볼 책은 추려내어 열심히 버리고 있는 중이라 했다.

글쓰기 공부 모임이 있던 날그는 다른 사람의 힘까지 빌리면서 책 두 상자를 끙끙거리며 안고 왔다버리다가 남은 것인데 그냥 없애기가 아까워 들고 왔다며 나누어 보라 했다내가 책을 나누어주는 걸 본이라도 볼 걸까사람들은 이 책 저 책 뒤적이면서 읽을 만하다 싶은 것은 갈무리도 했다.

문집이나 문학지들이다두 책상에다가 그득히 펼쳐놓은 책을 보노라니내 글이 실린 책들도 적잖게 있다그 책들을 보는 순간 무엇이 갑자기 치달아와 부딪는 듯,발 딛고 선 곳이 별안간 꺼져버리는 듯 아리고도 어질한 현기증이 전율처럼 솟았다.

자기가 구입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에게 준 책들이었다기고한 문학지에서 필자용이라며 여벌로 한 권 더 보내준 것이거나하나 더 보내 달라고 부탁하여 부쳐온 것을 그에게 준 것이었다대부분 내가 요청하여 받아 건네준 책이다.

그에게 내 글이 실린 책을 줄 때는마음 맞는 글벗에게 내 글 자랑도 하면서 자기 공부에도 참고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지만깊이 숨겨둔 마음도 하나 있었다내가 먼저 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 혹 내 글을 추스를 필요가 있게 된다면지음의 후배인 그가 그 책들을 자료 삼아 챙겨주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마음이었다그에게 그런 마음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그는 사람들에게 그 책들을 가지라 했다혼자 보기가 아까워 남에게 주고 주려했던 걸까그리하여 나를 더욱 빛내주고 싶었을까내 글이 실린 책인 줄도 모르고 가져온 것 같았다여느 책과 다를 바가 없다는 듯 한데 섞어두었다가 별 괘념 없이 무작위로 가지고 나온 모양이었다내 글이 실린 책이란 그에게 무엇이었을까?

내가 책들을 보고 여기 내 글이 실린 것도 있네!”했더니 그래요?”하면서 설핏 당황하는 빛을 보이는 것 같았지만나의 그에 대한 우정이라든지 기대 같은 것은 그리 마음 두지 않는 듯했다내 글이 실린 책이라는 말에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책을 들추고 있는 사람들 보기가 오히려 민망했다사람을 믿고 사는 일이 이리 힘든다는 생각이 새삼스레 뇌리를 스친다.

내가 작품을 처음으로 기고한 문학지라든지특별히 마음에 드는 작품이 실린 책이라든지달리 아껴두고 싶은 책도 없지 않지만그것은 내 마음일 뿐 그의 마음은 아니었다그가 남에게 책을 나누어주는 것은 버리는 방법에 다름 아니라 여겨지는 순간우정도 기대도 속절없이 버려지는 것 같아 마음 한쪽이 뭉텅 내려앉는 듯했다.

언젠가는 어차피 사라져 가야 할 것을 아끼는 사람의 손에 의해 버려진 것을 오히려 안도해야 할까쓰레기통에 들지 않고 사람의 손에 들게 된 것을 차라리 기쁨으로 새겨야 할까내 글이 한 사람이라도 더 남의 눈길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을 미상불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손을 건너가는 책을 보면서 위안거리를 찾아보지만 아릿한 심기는 쉬 잦지 않는다.

지난날 세상모르고 펴냈던 나의 책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되어있을까여태 누구의 호기심 어린 눈을 빛나게 채워주고 있지는 않겠지만,어느 서가의 책들 한 서리를 고이 차지하고나 있을까불귀의 객이 되어 대지를 기름지게 하고 있을까누구네 집 기우는 서랍장을 받치고 있을까날더러 책 내라는 사람들의 소리가 오늘 더욱 공허하게 이명하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버려진 책들을 수습한 사람들과 함께 하던 글쓰기 공부를 마치고 밤거리로 나선다가로등 몇 개가 찬바람 속을 스산하게 서성이고 있었다.(2018.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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