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공원으로 나갔다. 철봉체조를 하고 기구를 돌리며 시를 외웠다.” 언제나 내 일기의 첫머리에 나오는 말이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써온 지도 사십 년이 다 되어간다. 일여덟 해 전, 생애의 한 막을 내리면서 홀연히 도회를 떠나 강이 있고 숲이 있는 마을로 옮겨왔다.매일 아침마다 숲이 우거진 마을공원에 나가 턱걸이며 매달리기 같은 철봉체조를 하고, 기구를 타며 허리운동도 하고, 둥근 기구를 돌리며 시를 외곤 한다.
그렇게 날마다 하는 아침 운동을 날마다 일기장에 적는다. 그러니 내 일기장의 첫 머리에는 늘 같은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체조를 마치고 강둑을 걸으며 반짝이는 윤슬을 싣고 흐르는 강물이며, 날마다 만나는 강둑길 길섶의 풀꽃들도 일기장에 들어앉는다. 어디 그 뿐인가. 강둑을 내려와 산모롱이를 돌면 집까지는 쪽 곧은 들판길이 펼쳐지는데, 그 들길의 한 부분을 시나 수필을 외며 뒷걸음으로 걷는다. 날마다 걷는 뒷걸음이지만, 그렇게 걸어 집으로 왔노라며 빼놓지 않고 적는다.
내가 아침마다 하는 운동이며 산책이란 어쩌면 매일 세수하고 밥을 먹는 일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쓰는 일기는 ‘나는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학교에 갔다.’로 시작하는 초등학교 아이의 일기와 같이 천진난만하거나 유치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제와 같은 일을 오늘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아늑하고도 편안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제까지 내가 즐겨했던 일들을 오늘 갑자기 할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커다란 변화가 될 것이다. 변화를 피하고 싶다는 것이 아니다. 좋은 변화도 있을 수 있는 거니까. 이제 나에게 어느 날 갑자기 와 줄 ‘좋은 변화’란 게 있을까. 그런 걸 어찌 바랄 것이며 그럴 일이 무에 있으랴. 어제 같은 오늘을 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그 고마운 마음을 담아 오늘의 일기에 어제와 같은 머리글을 얹는 것이다.
내가 이 한촌을 여생의 터로 삼은 데는 연유가 있다. 지금 내가 사는 곳은 십 수 년 전 직함을 바꾸어 근무하게 된 첫 임지다. 궁촌 벽지이지만 이태를 사는 동안 많은 정이 들어버렸다. 임지가 바뀌어 타방을 떠돌다가 그 한생의 마감을 앞두고 은서할 곳을 찾다보니, 이곳이 흔연히 기억 속을 헤치고 나왔다. 다시 찾아와 늘 오르던 산 아래 터를 잡아 집을 지었다. 지금 집 뒷산이 바로 그 때 내가 ‘늘 오르던 산’이다. 지금도 그런 것처럼 그때도 소임을 살던 이태를 두고 별다른 일이 없는 날이면 해거름마다 산을 올랐다. 이태 째의 한 해가 저물 무렵 그 산에 오른 횟수를 헤아려보니 삼백 회에 가까워 갔다. 그걸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삼아 말했더니 모두들 기념비라도 세워야 되겠다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 우스갯말이 눈앞 일이 되어버렸다. 지역 몇 사람들 사이에서, 마침 표지석이 없는 그 산에 산 표지를 세울 겸해서 정상에 빗돌 하나 놓자는 의논이 돌았다. 내 등정 삼백 회를 완료하는 날 몇 사람이 힘과 마음을 내어, 앞에는 봉우리 이름을 새기고 뒤에는 ‘삼백 회 등정 기념 아무개’라 새긴 빗돌을 마루에 세웠다. 그 ‘삼백 회’도 내 일기장이 일러준 것이었음은 물론이다. 지금 일기를 뒤적여 헤아려본다면 일천에 몇 백 번은 더 얹힐 것 같다. 소화도 도울 겸해서 해오던 식후 아침 산책을 며칠 전부터 식전으로 바꾸었다. 연일 계속되는 폭염을 피해 조금이라도 덜 뜨거울 때 걸으리라며 식전 길을 나섰지만, 하는 운동이며 걷는 길은 마찬가지다. 철봉체조를 하고 기구를 돌리며 시 외기는 늘 같아서 일기 첫 머리는 변함이 없다. 요즈음은 하나 더 살피는 게 있다. 마을공원 한 쪽에 내가 돌보는 상사화 꽃밭이 있는데, 마르고 썩어 흙이 되어가고 있는 잎 사이로 꽃 대궁 촉이 솟을 때가 되었건만 소식이 감감하다. 작년 일기장을 보니 7월 말경에 솟았는데 올해는 한참 늦다. 가뭄과 폭서의 영향인 것 같다. 어느 한 해에도 8월 중순에 들어서야 촉이 난 적이 있는지라 다시 일기를 뒤적이며 기다리고 있다. 좀 이르고 늦기는 했지만, 내 일기장 속의 상사화는 언제나 피어났다. 올해도 내 일기장은 홍자색의 우아한 상사화를 담을 것이다.
오늘도 아침 산책길을 나선다. 두렁길을 지나 마을공원으로 가서 철봉체조를 하고 기구운동을 하며 시를 외고 길섶 풀꽃들과 더불어 강둑길을 걷는다. 쪽 곧은 들길을 시 수필을 외며 뒷걸음을 걸어 집으로 온다.해거름이 되면 집을 나서 산으로 향한다. 앞으로 몇 백 몇 천 회를 더 오를지 모를 마루의 빗돌 앞에 유쾌하게 선다. 근년 들어 한 가지 운동을 더 하고 있는 것이 자전거 타기다. 산 오르기와 자전거 타기를 번갈아 하고 있다. 내 세상 인연을 다하는 날까지 아침 산책길을 산뜻이 걷고 해거름 산을 가벼이 오를 수 있고 바람을 가르며 상쾌히 자전거를 달려 나갈 수 있다면 이보다 다행스럽고 즐거운 일이 또 있을까.
이 나날의 모든 일들이 나날 내 일기의 소재가 되고 있다. 내일도 오늘같이 살 수 있기 바라서다. 오늘이란, 어제가 쌓인 자리 위에 덩실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오늘은 또 내일의 오늘이 될 것이 아닌가. 오늘도 내 일기장은 차곡차곡 담은 하루로 내일의 오늘을 그리고 있다. 어제 같은 오늘을, 오늘 같은 내일을 그려나가고 있다.♣(2018.8.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