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세상은 보는 대로

이청산 2012. 6. 4. 20:55

세상은 보는 대로


카메라 빨리 좀 가지고 와 봐요!”

대문간에 서서 논들을 바라보고 있던 아내가 집 안을 향하여 소리쳤다. 무슨 일이냐며 바삐 카메라를 가지고 뛰쳐나가니, 아내는 논 한가운데서 모를 심고 있는 아낙네를 가리켰다.

저 모습 한 번 찍어 봐요, 얼마나 보기 좋아!”

모자로 얼굴을 감싼 희준이 엄마가 논 가운데서 허리를 굽히고 모를 보식(補植)하고 있다. 이앙기로 모를 다 심었지만, 제대로 심어지지 않았거나 들쑥날쑥 심어진 것들을 새로 심기도 하고 보태어 심기도 한다.

옆구리에 모 주머니를 차고, 무릎까지 오는 노란 장화를 신은 희준이 엄마는 모를 다칠세라 조심조심 발을 옮겨놓으며 한 땀 한 땀 모를 덧심어 나간다. 잠시 몸을 일으켜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긋고는 다시 발을 옮겨 또 한 포기의 모를 조심스레 심는다. 그 모습이 그리 정성스럽고 진지할 수가 없다. 희준이 엄마의 늘상 사는 모습일 것도 같았다. 논물에 비친 보라색 티셔츠며 노란색 장화의 빛깔이 물속에서 꽃송이가 되어 일렁거렸다. 물 위에서 점점이 나풀거리는 연초록 모들을 배경 삼아 그려지고 있는 아름다운 수채화 같기도 했다. 희준이 엄마에게는 고된 노동의 현장일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아름다운 한 폭의 풍경화였다.

그 아름다운 장면을 놓칠세라 카메라의 셔터를 연이어 눌러댔다. 허리 굽혀 모를 심는 모습이며 허리를 펴는 모습, 주머니에서 모를 꺼내는 모습이며 다시 모를 심어 나가는 모습들이 카메라 속으로 빨리듯이 들어왔다.

그 중 몇 장면을 골라 일보로 보냈다. ‘디카&스토리라는 칼럼에 기고하기 위해서다. 이전에도 가끔 곳곳의 풍광과 정경들을 카메라에 담아 보내어 이 칼럼에 게재했던 적이 있었다. 장면에 얽힌 스토리와 함께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게재하여 아름답고 진귀한 장면들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즐거움을 주는 칼럼이다.

이번에도 몇 장면을 골라 보내면서 200자 이내로 한정하는 스토리를 이렇게 붙였다.

요즈음 농촌은 모내기가 한창입니다. 모는 이앙기로 다 심지만, 충실하게 심으려면 손으로 일일이 보식(補植)을 해주어야 합니다. 부지런하기로 소문난 우리 동네 희준이 엄마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자식을 어르듯 모를 한 포기 한 포기 갈무리하며 구슬땀을 흘리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이룹니다. 풍년이 눈앞에 보이는 듯합니다.”라고 하면서 모 심는 아낙네의 아름다운 모습이라 제목을 달았다.

보기에 따라서는 평범하기 짝이 없을 장면에 별날 것도 없는 스토리가 기자의 눈에 들 수 있을까. 기자도 내가 느낀 것과 같은 아름다움을 느낄까.

며칠 뒤, 일보 오피니언 면에 그 장면과 스토리가 실렸다. 나에게 촬영을 권했던 아내가 실릴 줄 알았다며 반색했다. 아내도 참 아름답게 느꼈다며, 누가 봐도 아름답게 느껴질 것이라 믿었다고 했다. 기자도 그 광경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꼈던가. 그런데 스토리의 끝부분을 슬쩍 바꾸어 놓았다.

……자식을 어르듯 모를 한 포기 한 포기 갈무리하며 구슬땀을 흘립니다. 올 봄 비가 너무 오지 않아 이곳저곳 관정을 파서 물 퍼 올리는 모터소리가 들립니다. 올해도 풍년 들녘을 기원해봅니다.” 제목도 농촌 들녘 모내기 한창이라 바꾸어 달았다.

기자 특유의 시각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자는 그 장면을 아름답게 느끼기 전에 사건의 현장, 삶의 현장이라는 시사적인 측면에서 먼저 본 것 같았다. “올 봄 비가 너무 오지 않아 …….”는 기자가 덧붙인 기사였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결국 오늘의 디카&스토리는 아름다움을 그려내는 한 장면의 그림이 아니라 사실을 보도하는 사건의 한 현장이 되어버린 것 같다. 신문이나 잡지의 칼럼 기고문을 기자나 편집자의 취향과 의도대로 고쳐서 싣는 것은 왕왕이 있는 일이기에 그대로 보아 넘길 수밖에 없다.

같은 사물이나 사실일지라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 하는 것은, 물론 보는 사람의 느낌과 생각에 달려 있다. 관점에 우열을 논할 수는 없다. 다만 온기어린 시선으로 보느냐, 냉철한 시각으로 보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 싶다. 그렇게 보이는 것들을 마음속에 따뜻하게 갈무리해 두고 싶다. 세상은 내가 보는 대로 보이는 것이 아닌가. 내가 느끼는 대로 세상이 안겨 오는 게 아닌가.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 따뜻한 세상을 안고 싶다. 부지런하고 아름다운 희준이 엄마의 모습을 담아 두고 싶다.

오늘의 이야기는 내가 의도했던 것과는 좀 다른 길로 간 것 같아 아쉬움은 있지만, 그러나 기자의 눈도 탓할 일은 아니다. 하는 일에 걸맞은 시각을 지니고 있는 것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는 일일 수 있음에야-. (2012.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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