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비에 대하여
무엇을 해도, 어디에 있어도 무언가 마음 한쪽이 비어 있는 것 같다. 그 빈 마음은 책을 읽는 데도 집중을 못 하게 할 때도 있고. 무얼 먹어도 속이 차지 않게 할 때도 있다. 이 빈 마음의 정체는 무엇일까.
한 생애의 막을 내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지도 십수 년이 흘렀다. 한 생애가 막을 내렸다는 것은 지난했던 생애의 한 업에서 놓여났다는 것이다. 한동안 그 해방감을 만끽하며 지냈다. 별세계를 사는 것 같았다.
그 별세계도 한 해 두 해를 살다 보니 보통의 세계, 일상의 삶의 되어갔다. 그런데 그 일상에는 무언가 하나 있어야 할 게 비어 있는 것 같아 허전했다. 그렇다고, 그전 생애의 세계가 그립거나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었다.

한때는 시 낭송을 즐겨 하여 동호인들과 함께 무대를 만들어 보기도 했고, 수년 전부터는 수필을 쓰고 싶은 사람들과 함께 공부하며 문학회도 만들어 해마다 책을 내고 있다. 그런 일들은 나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런 일들이 내 마음의 빈자리를 얼마큼은 메워 주었지만, 온전히 메꾸어주지는 못했다. 돌아보면, 나 자신을 위해서나 누굴 위해서라도 무얼 하나 뚜렷하게 해 놓은 일도 없고, 하는 것도 없이 세월만 흘리고 있는 것 같아 허무감도 없지 않았다.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처지나 하는 일들이 실수,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있는 것 같고, 그런 과거들만 쌓여 있는 것 같아 가끔 우울해질 때가 있다.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돌아보아 후회하지 않을 일을 할 수가 없단 말인가, 회의감에 젖기도 한다.
그렇게 달이 가고 해가 바뀌는 사이에 세월만 흘러가는 게 아니었다. 사람도 흘러갔다. 같은 시기에 퇴직하면서, 다시 인연을 이어가자 하고 만나 즐거이 대작하던 네 사람 중에 세 사람이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버렸다. 나 하나 남은 것이 서러웠다.

서럽다 해야 할까, 서러움마저 매몰되어 버렸다 해야 할까. 옆 사람마저 원심을 남긴 채 이 세상에서는 다시 못 볼 곳으로 훌쩍 떠나갔다. 누가 나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올 때, ‘내 삶은 총체적인 실패인 것 같다.’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먼저 간 사람을 따라갈 기회가 왔다. 고립 고적한 시간들이 쌓여가던 어느 날 나는 혼절했다. 구급차에 실려 대처 병원에까지 육신이 옮겨져 갔지만, 누굴 뒤따라가지는 못했다. 두어 주일 뒤에 다시 나의 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몸도 마음도 예전 것이 아니었다.
홀로 견디기도 힘들고, 견뎌 나갈 의지도 챙기기 어려웠다. 보이는 것, 느껴지는 것, 와 닿는 모든 것이 아수라였다. 그 절망의 아수라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비쳐 올 줄이야. 나라의 제도가 나의 손을 잡아 끌어주었다.
‘요양 보호사’라는 따뜻한 이름을 가진 천사가 나에게로 왔다. 내 힘으로 해결하기 쉽지 않은 생존의 문제를 하루 중 잠시나마 와서 해결해 주고, 말 붙일 곳 없는 내 고적을 잠시라도 깨워주는 게 여간 고맙지 않았다.
일본에는 지금 ‘공헌수명貢献寿命’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주목받고 있다 한다. 노인이 돌봄 없이 스스로 일상을 유지하면서 사회에 뭔가 이바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기간을 뜻하지만, 노인이 자력으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사회에 공헌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아, 나는 어찌해 세상을 위해 별다른 이바지도 못 하면서, 나 혼자 못 살아 다른 이 손길조차 이리 받아야 하는가. 참 허망한 삶을 살고 있다는 비감이 폐부를 찌를 때, 문득 ‘자기 자비Self-Compassion’라는 말이 눈에 띄었다.
실수하거나 고통을 겪을 때 자신을 비난하는 대신, 따뜻하고 너그럽게 대하는 태도라는 것이라 했다. 또한, 고통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겪는 보편적인 경험이라는 인식을 가지는 일이라 했다.

겪고 있는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에 휘둘리지 않고 균형 있게 바라보는 ‘마음 챙김’이라고도 했다.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어야 남에게도 베풀 수 있다고도 했다. 아,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챙기지 못해 누구를, 무엇을 위할 수도 없었단 말인가.
아침 강둑을 걷는다. 즐겨 걷는 내 산책길이다. 맑은 햇살이 강으로 강둑으로 내려앉는다. 강에 앉은 햇살은 윤슬이 되어 반짝반짝 빛을 낸다. 내 안을 흐르고 있는 마음 강에도 저 윤슬이 반짝일 있을까.
강물이 유유하다. 거침없이 흐른다. 걸리는 게 있으면 소리 없이 비켜 가고, 비켜 흘러서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옆의 물과 스스럼없이 어울린다. 흘러간 강물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오직 앞만 바라보면서 내달을 뿐이다.

그렇구나, 그냥 흘러가자, 걸리는 게 있으면 아파하지 말고 둘러 가자. 만나는 이를 반가이 맞자. 그리고 또 흘러가자. 내일은 글 친구들을 만나는 날이다. 글과 삶을 서로 나누다가 눈물 나면 눈물에 젖고, 웃음 나면 가슴 펴고 웃을 일이다.
허전도 외로움도 다 나의 것 아닌가. 빈자리는 빈자리대로 보듬고 가자. 그냥 흘러가는 저 물처럼 유유히 흘러가자. 내일 글 친구들을 향해 걸음 가볍게 나서자. ♣(2025. 12.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