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이웃집 할머니 영희, 박-파안

이청산 2025. 1. 14. 11:43

이웃집 할머니 영희, -파안

 

  어느 날 밤,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재독 한국인 작곡가를 만났다. 늘 대하는 이웃집 할머니인 줄 알았다. 검은 머리보다 백발이 더 성한 단발머리, 적당히 주름진 얼굴에 짓는 맑은 미소. 우리 동네 할머니들도 즐겨 입을 듯한 스웨터에 조금 헐렁한 바지, 크지 않은 키에 등마저 굽었다. 파킨슨병 때문에 거동이 불편해 보행보조기에 의지해 걷고 있다. 내 사는 마을 어느 할머니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이 할머니의 생애는 범상하지 않았다. 반세기 세월을 독일에 살면서 독일 음악계를 이끌고 있는 한국인 ‘영희, 박-파안 Younghi Pagh-Paan’ 작곡가. 오랜 세월을 남의 나라에서 살아오고 있지만, 잠시도 고국을 잊어 본 적이 없는 우리나라 사람, 그의 음악 속에는 우리의 얼이 살고 있다. 그런 음악을 창조해 낸다. 그 정신이 그를 더욱 이웃집 정 많은 할머니같이 느껴지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나라가 식민지에서 풀려나던 1945년에 청주 남주동에서 태어났다. 그가 들은 첫 번째 음악은 한국전쟁 때 완전히 폐허가 된 거리에서 어느 걸인이 구걸하며 불던 해금 소리였다. 일곱 살 때 아버지와 장터에 가서 소리꾼들이 판소리와 창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때 국악을 처음 접했다. 열 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고, 열세 살부터는 주한미군방송에 나오는 클래식 음악을 듣고 악보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음악적인 소양을 쌓아 갔다.

  열 살 때 여읜 아버지이지만, 교량 건축가인 아버지가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다리를 설계하는 모습이 멋져 보여 자기도 아버지가 하는 일을 해보겠다는 꿈을 가지기도 했다. 아버지가 떠나신 후 형편이 어려워졌다. 피아노 레슨비도 감당하기 힘들어 음악 공부를 중단하면서 청주여중·고를 졸업했다. 아버지처럼 교량 건축가가 되기 위해 서울대 공대를 지원하려고 수학, 물리, 화학 등을 열심히 공부했지만, 음악이 도저히 포기되지 않았다. 재수까지 하면서 결국 음대에 들어간다. 다른 과목 성적이 우수하여 3등으로 합격해 기성회비를 면제받으며 공부했다.

  서울대 음대, 대학원 작곡과를 졸업하고 죽을 각오로 공부하여 29세 때 국내에서는 최초로 독일학술교류재단(DAAD) 장학금을 받아 독일 유학길에 오른다. 프라이부르크 음악대학에서 유럽 최고의 음악가들을 만나, 1977년 보스윌 세계작곡제에서 1등 하고, 도나우싱엔 음악제에서 「Sori(소리)」를 발표하면서 작곡가 ‘영희, 박-파안’이라는 이름이 전 유럽에 알려졌다.

  ‘파안’은 ‘파안대소破顔大笑’에서 따온 말로, 크게 웃고 살자는 뜻을 담았다. 그 파안과 함께 오직 음악만을 위해 살아오는 동안에 1978년 스위스 보스빌 국제작곡제 여성 최초 1등, 1980년 두나오에싱엔 음악제 여성 최초 오케스트라 곡 위촉, 1994년 독일어권 작곡가 최초 여성 교수로 임명되어 부총장까지 역임, 1995년 동양인 최초 독일 하이델베르크 여성 예술인상 수상, 2011년 대학 정년 퇴임, 2016년 본인 이름을 딴 ‘국제 박영희 작곡상’ 제정. 2020년 여성 동양인 최초의 베를린 예술대상 수상 등 화려한 이력을 쌓아 왔다.

  그러면서 그의 정신세계는 잠시도 고국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1978년 스위스 보스빌 작곡콩쿠르에서 1등을 한 곡 「MAN-NAM(만남)」은 신사임당의 시 '사친思親'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고 한다. 이 곡과 함께 2011년 대관령국제음악제에 참가하여 아시아 초연작 「타령Ⅵ」은 국악기를 쓰지 않으면서도 한국 전통 장단을 그려냈다고 한다. 2014년에는 고향 청주를 위해 「청주시민의 노래」를 작곡하였으며, 통합 청주시 제1호 명예시민이 되었다.

  어느 날 제자들이 모여 스승의 은혜를 기리는 자리를 마련했다. 보행보조기에 의지해 그 자리에 들어서는 그를 보며 제자들이 박수로 환호했다. 보조기와 함께 빙 돌면서 한쪽 다리와 팔을 번갈아 번쩍 들며 인사하는 세련되지 않은 그 사위가 바로 우리 시골 할머니의 정겨운 모습이었다. 제자들은 그를 위해 우리 가곡 「스승의 은혜」를 우리말로 부르며 고마워했다.

  팔순의 그가 왜 이웃집 할머니 같은지를 알 것 같다. 소박한 외모며 정 많은 마음도 그러했지만, 몸은 이국땅에 있을지언정 정신은 언제나 고국에 두었던 것도 그러하고, 우리의 옛것을 사랑하는 철저한 한국 사람인 것도 그러했다. 초등학생 때처럼 오직 연필로만 눌러가며 악보를 쓰는 작곡 모습도 그러하고, 민족의 얼에서 소재를 가져오는 예술 신념도 그러했다.

  그는 병구病軀를 불편하게 이끌고 있지만, 사는 일이 즐겁고도 행복해 보였다. 그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의 예술에서 나온 것 같다. 오직 혼신을 다 바치고 있는 그의 예술이 육신의 고통이며 삶의 간난을 다 넘어설 수 있도록 해준다. 예술에는 그런 힘이 있다.

  나는 그와 비슷한 연배로서 같은 시대를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다. 나는 어디에 살고 있는 누구인가가 돌아보일수록 그가 더욱 우르러진다. 뛰어난 작곡가 이웃집 할머니 영희, 박-파안.

그 영상을 본 날 밤, 머리에 가슴에 새겨진 그 모습이 내 잠결 속을 깊숙이 파고들어 왔다.♣ (2025.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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