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나무의 외로움

이청산 2021. 4. 5. 18:46

나무의 외로움

 

  나무는 외로움을 모른다. 외롭다거나 외롭지 않다는 걸 겪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이 외로운 것인가, 혼자 있는 것이 외로운 것인가, 여럿 중에서 혼자 외따로 되는 것이 외로운 것인가. ‘혼자라는 게 무엇인가. 그게 바로 저 아니던가.

  나무는 애초에 한 알의 씨앗으로 땅에 떨어졌다. 그때부터 혼자다. 오직 흙과 물이 보듬어줄 뿐, 누가 저를 태어나게 해준다거나, 태어난 것을 자라게 해주는 손길이 따로 있지 않았다. 혼자서 싹이 트고 혼자서 세상으로 나왔다. 

세상에 나와서도 혼자다. 바라볼 수 있는 건 하늘뿐이었다. 하늘을 바라면서 태양의 볕살을 쬐고 바람을 안을 뿐이었다. 뿌리에는 흙과 물이 있고, 가지에는 햇살과 바람이 있어 그것들을 의지 삼아 몸피를 불려 나갔다.

  그랬다. 흙과 물과 햇살과 바람-. 그것들이 몸을 자라나게 해주었다. 물론 나무를 위해서만 그것들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에게 손길을 준다. 다른 것들보다도 나무가 그 손길을 잘 받고 있을 뿐이다.

  그 손길을 받아 둥치도 솟구치고 가지도 뻗어나고 잎들도 푸르게 달았다. 나무는 하늘이 그립다. 그곳에는 세상 어머니 품처럼 모든 게 다 있을 것 같다. 햇살과 바람뿐만 아니라 흙도 물도 하늘에서 내려주지 않으면 어디에서 날까. 나무는 오로지 하늘을 바라며 뻗어 오른다.

  햇살은 가지에도 내리고 잎에도 앉는다. 그때마다 잎은 반짝반짝 빛이 난다. 바람이 불어와 더운 몸을 식혀 주기도 하고, 더욱 삽상한 생기를 불어넣어 주기도 한다. 그 빛과 생기로 싱그러운 그늘을 드리워 지친 이들의 안식처가 되게도 한다. 

하늘은 나무에게 꼭 요긴한 만큼만의 볕살과 바람을 주는 것은 아니다. 온몸이 타오를 만치 볕을 내리쬘 때도 있고, 몸이 다 부서질 정도로 내리치는 비바람도 없지 않다. 갈증에 허덕이다 말라 들기도 하고, 커다란 가지가 우지끈 부러지기도 한다.

  그럴 때도 나무는 햇살이며 바람을 탓하지 않는다. 큰비가 내리고 설한풍이 사납게 불어 온몸이 떠내려갈 뻔하거나, 눈 속에 폭풍 속에 묻혀 버릴 것 같은 때도 있지만, 좀 힘들면 힘든 대로 상처가 지면 지는 대로 견뎌낼 뿐이다.

  제힘으로 이겨내거나 견뎌내지 않으면 무엇도 저를 안아주거나 덮어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다. 나무는 그렇게 어려울 때도 무엇이 저를 감싸주리라는 바람이나 기대조차도 가질 줄 모른다. 그 모든 것을 하늘이 주는 일로 알 뿐이다.

 

나무는 오직 혼자서만 산다. 밤이든 낮이든 혼자서 지내고, 어릴 때든 훌쩍 솟아서든 혼자서 산다. 그렇다고 나무에게 이웃이 없는 건 아니다. 여러 미물이며 뭇짐승들이 찾아와 함께 놀아주기도 하고, 그중에 벌 나비는 꽃가루를 물고 와 씨를 맺게도 해준다.

  그런 것들이 찾아와 함께해 줄 때는 사는 일이 한층 정겹고 따뜻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들이 가버린다고 해서 서운하고 쓸쓸할 일은 없다. 오고 가는 모든 것이 모두 바람이 불고 햇살이 내리는 일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때로는 이웃 나무들과 함께 하늘을 우러르기도 하고, 때로는 어깨를 겯고 지내기도 하지만, 이웃에 기대는 일은 없다. 설령 같은 자리에 뿌리를 박고 산다 할지라도 저마다 틔운 물길로 생명수를 얻어 가지를 뻗고 꽃과 잎을 피운다.

  나무는 오직 한자리에서만 산다. 태어난 자리에서 살고, 산 자리에서 숨을 거둔다. 넓은 세상을 모른다 하랴. 넓은 세상은 무엇으로 사는 곳인가. 자리다툼이며 얼굴 겨루기로 사는 곳이라지 않는가. 나무는 오직 제 자리, 제 얼굴로만 살 뿐이다.

나무는 세월 속을 살고 있다. 몸속에 그 세월을 하나하나 그으며 산다. 세월을 둥글게 그려나가다가 하늘이 준 세월이 다 찼다 싶으면 그대로 내려앉으면 된다. 자신이 만들어 내려 앉힌 잎들 위로 몸을 눕혔다가 또 어느 세월쯤에 태어났던 흙으로 다시 들면 된다.

  나무는 그렇게 한 생애가 끝날 때까지도 외로움을 모른다. 외로운 것이 곧 자신의 삶이라 알기 때문일까. 아니다. 모든 것이 하늘의 일이라고 여길 뿐이다. 기쁨도 슬픔도, 즐거움도 괴로움도 모두 하늘이 준 일로 알 뿐이다.

  사람아, 누가 외롭다 하는가. 일찍이 어느 시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외로운 사람아

  외로울 땐 나무 옆에 서 보아라

  나무는 그저 제자리 한평생

  묵묵히 제 운명, 제 천수를 견디고 있나니

  너의 외로움이 부끄러워지리

                           -조병화, 나무-외로운 사람에게

 

  오늘도 산을 오른다. 나무를 본다. 오직 하늘을 바라며 홀로 홀로 서 있는 나무를 본다. 외로움을 모르는 외로운 나무들을 본다. 마음이 고즈넉해진다.

  그 나무 가슴에 안고 산을 내린다. 걸음이 가든하다.(202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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