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나뭇잎 삶

이청산 2021. 3. 22. 12:02

나뭇잎 삶

 

  오늘도 산을 오른다. 진달래 작은 몽우리가 수줍게 솟아오르고 생강나무가 노란 꽃을 터뜨리고 있다. 채 떨어지지 못한 나뭇잎이 앙상한 가지 아래서 대롱거린다. 이제 저 꽃과 더불어 잎의 움이 돋고, 마른 잎은 새 움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땅으로 내려앉을 것이다.

  잎은 나뭇가지에서 움이 트는 것으로부터 한살이를 시작한다. 가지도 애채로부터 생애를 시작하지만, 애채가 힘을 가지게 되면서 움을 돋우고 그 움에서 애잎이 피어난다. 애잎은 연녹색을 띠면서 조금씩 자라나 진녹색으로 살빛을 바꾸며 세상을 차츰 푸르게 만들어 간다.

  애잎은 마침내 짙푸른 큰 잎이 되어 꽃의 어여쁜 모습을 더욱 곱게 해주고, 열매가 맺히면 튼실히 자라게 해준다. 찾아오는 친구의 놀이터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제 난 가지를 싸안아 비바람을 막아 주기도 한다 그뿐 아니다. 지친 이들에겐 편안한 그늘이 되어도 준다.

  하늘이 푸르고 햇살이 눈 부시다. 반짝이는 햇살이 온몸에 내려앉는다. 잎도 반짝인다. 반짝반짝 해를 닮아가고 싶다. 하늘을 향해 가슴을 활짝 편다. 하늘이 그립다. 그 무한한 세상을 펄펄 날고 싶다. 잎도 가지도 하늘 향해 손을 높이 흔든다.

  그렇게 한철을 지나면서 무성한 녹음을 이루어 산천의 생기를 돋운다. 세상만사 흐르고 변해가지 않는 것이 없거늘, 나뭇잎인들 어찌 무성하기만 할까. 사늘한 바람이 불고 서리라도 내릴 양이면 서서히 색깔을 바꾸어 가면서 그의 삶은 점점 불그레 익어간다.

  그 익어가는 것은 가지를 위한 헌신의 몸짓일지도 모른다. 가지에서 받은 은혜를 돌려 갚는 일이라 할까. 찬 바람 불어오면, 잎이 가지를 감쌀 철이다. 가지와의 사이에 떨켜를 만들어 생명수의 흐름을 잎자루로 막는다. 가지가 차가운 겨울을 넉넉히 이겨내도록 해주려는 것이다.

  이제 잎은 지난 일도, 앞으로의 일도 모두 내려놓고 남은 삶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노랗게도 물들었다가, 불그레하게도 얼굴빛을 바꾸어 보았다가, 때로는 온몸을 불태울 듯 진홍으로 변신해 보기도 한다.

  그렇게 불타는 듯한 모습은 보는 이들을 즐겁게 한다. 잘 익었다고도 하고, 고운 물이 들었다고도 한다. 그렇다. 한 생애를 정리해 가면서 삶이 잘 익어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치 저 하늘의 맑은 노을빛처럼 고운 물이 든 것인지도.

 그러는 사이에 몸피가 조금씩 줄어들면서 간직하고 있던 물기도 빠져나간다. 오직 마른 살갗밖에 남지 않았다. 올 날이 온 것이다. 발그레한 빛을 곱게 뿌리던 저 해도 건넛산 마루를 넘고 있듯이 인제 땅으로 내려앉을 때가 된 것 같다.

  나뭇잎은 몸짓도 가볍게 땅을 향해 몸을 내린다. 나게 해주고 살게 해준 가지지만, 돌아보지 않고 내려앉는다. 달려 있을 때나 내려앉을 때나 그 마음이 별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가지도 담담하다. 잎새가 태어나는 것도, 떨어지는 것도 숨 쉬는 일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어떤 나무에는 여느 잎들이 다 떨어져 나가도 끈기 있게 달려 있는 마른 잎도 있다. 새롭게 태어날 어린 것들의 자리를 감싸 지켜주기 위해서다. 새것이 움틀 봄뜻이 느껴지기만 하면 미련 없이 내려앉을 것이다.

  나뭇잎은 땅 위로 사붓이 내려앉았다. 한 생애가 막을 내린 것이다. 가지는 태어날 적의 제 자리이듯, 땅은 생애를 마칠 적의 제 자리가 아닌가. 제 자리에서 또 하나의 제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저 우람한 가지도 아무 일 없었던 듯 또 새로운 생명을 맞이할 것이다.

  세상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는 변화 아닌 변화일 뿐이다. 이제 나뭇잎은 땅속으로 들기만 하면 된다. 새로운 생명의 거름으로 몸을 바꾸면 된다. 거름이 바로 싹이 되어 언젠가 철이 돌아오면 새 생명으로 태어나면 된다.

  나는 지금 푸른 철 다 보내고 마른 잎 생애를 살고 있다. 익어가던 물빛이 아직 조금은 남아 있어 그 빛깔을 즐기며 살고 있다. 이렇게 즐기던 어느 날, 나도 저 잎새처럼 땅으로 내릴 것이다. 지금의 내 발 자리가 내 자리이듯, 내려앉을 자리도 내 자리가 아닌가. 익은 몸짓으로 내려앉을 것이다.

  보건소에 가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라는 걸 작성하고 왔다. 생애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을 때 구차스러운 삶을 이어가지 않겠다는 서약이다. 국가가 정한 법과 규칙에 따라, 임종 과정에 있다는 의학적 판단이 나면 인명 의료를 시행하지 않거나 중단하겠다는 약속이다.

  순순히 가겠다는 말이다. 저 나뭇잎처럼 아무 걸림도 미련도 없이 땅으로 내려앉겠다는 말이다. 잎새 하나 진다고 나뭇가지가 요동할 일이 없듯, 나 하나 간다고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는 세상을 조용히 떠나겠다는 것이다. 태어난 자연으로 곱게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은 나뭇잎이다. 나뭇잎 삶이다. 나뭇잎처럼 해맑게 태어나고, 나뭇잎처럼 푸르고 붉게 살다가, 나뭇잎처럼 소곳이 가야 할 삶이 아닌가.

  저 나뭇가지의 잎새처럼-.(202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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